제256화
제6편 재부팅
어두운 밤.
모두가 잠든 시간에 나는 홀로 깨어있었다.
내가 있는 방도 아무런 불이 없어 깜깜하기만 했다.
그런 방에서 나는 손 위에 검은 구슬을 올려놓고, 멍하니 허공을 보며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디가 아픈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한참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을 듣고 있었다.
[저장된 정보를 확인, 관리자 재승인을 마쳤습니다.
중앙 에고와는 연결이 끊어진 것이 재확인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현 용사 관리 체계는 재시작된 12번째 예비 에고가 담당합니다.
…….]
구슬은 전에 들었던 목소리로 다시 말을 늘어놓았다.
그 말은 전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내용이 쭉 이어졌다.
마치 전생의 컴퓨터가 재부팅 하는 동안 시스템을 체크하는 것 같아, 비슷한 말이어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구슬은 그렇게 한참을 떠들더니, 드디어 내가 원하는 내용을 이야기했다.
[관리자의 정보가 불안정한 상태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다시 정보를 갱신하겠습니까?]
그래, 바로 이걸 원했었다.
설명 없이 덩그러니 뜬 정보창을 드디어 바꾸게 된 것이다.
당연히 나는 ‘예’라고 대답했다.
화아아악!
다시 한번, 눈앞이 환해졌다.
마치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진 것 같았다.
그리고,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펼쳐졌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육체 최적화 : 레벨 (25/30)
- 마나 회로 구축법 : 레벨 3
- 마나 감응력 : 레벨 2
- 장비 소환 : 레벨 1
- 마나 방출 : 레벨 1
< 비인가 능력 >
- 마나 유형화 : 레벨 2
- 사자 회귀 : 레벨 3
< 능력 부여 >
- 상태 보정: 최적의 신체
정보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조금 달라졌지만, 그건 이바나가 부여한 능력 때문이었다.
육체 최적화의 레벨이 오르고, 옆에 30이라는 새로운 숫자가 등장한 것은 분명, 새로 등장한 ‘능력 부여’라는 항목 때문이었다.
‘상태 보정’이라는 능력 부여는 이바나가 내게 부여해준 능력일 테고.
그 내용을 빼면 항목 자체는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허공을 노려봤다.
이렇게 똑같은 화면을 보려고 그 고생을 한 게 아니었다.
“갱신이라더니, 이게 전부야?”
[자세한 정보를 보기 원하십니까? 자세히 보기를 원하시는 항목을 가리키십시오.]
앗, 같은 게 아니었다.
무척이나 무안했지만, 다행히 이 광경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팔짱을 풀고, 눈앞에 떠 있는 정보창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휙.
바로 정보창의 내용이 바뀌었다.
역시 이것도 예상대로였다.
전생에 보았던 소설들처럼 이 정보창도 일종의 터치스크린이었다.
갈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묘해졌지만, 우선 창에 떠오른 내용을 확인했다.
[육체 최적화 :
기사형 영웅 능력자의 능력 중 하나.
훈련과 실전을 통해 신체를 계속 강화하는 능력으로 개인별로 최대치가 정해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마나를 활용하기 위해 꼭 성장시켜야 하는 능력이다.
강건한 육체가 없으면 마나는 모래로 쌓은 성일 뿐이다.]
아쉽게도 육체 최적화는 설명이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보다 더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정도랄까.
거기다, 뭔가 마지막에 명언 비슷하게 끝난 것도 기분을 찜찜하게 했다.
그래도, 제대로 설명이 되어 있었다.
내가 필요한 설명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다시 화면은 처음으로 돌아갔고, 나는 바로 보고 싶은 목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내가 이곳까지 오게 해준 애증이 가득한 바로 그 능력.
나는 ‘사자 회귀’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휘익.
화면이 바뀌었다.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허공에 나타난 글을 읽었다.
[사자 회귀:
당사자의 죽음을 기점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능력.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은 최초에는 태어난 시간, 그리고, 과거 죽었던 시간과 운명의 변곡점이다.
다른 능력들과 마찬가지로 레벨이 올라가는 데에 따라 다양한 능력의 활용이 가능해진다.
레벨 1 - 죽음을 겪으면 가장 마지막 죽었던 순간과 운명의 변곡점으로 되돌아간다.
레벨 2 - 운명의 변곡점을 저장 시점으로 정할 때, 당사자가 결정할 수 있게 한다. 거절하면 과거 정했던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레벨 3 - 운명의 변곡점을 이겨낼 때 새로운 저장 시점을 제시한다. 이 저장 시점도 당사자가 결정할 수 있다.
레벨 4 - ]
아쉽게도, 다음 레벨은 내용이 비어 있었다.
기존 레벨의 설명도 내가 예상한 것과 큰 차이가 없었고.
그래도, 그 내용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과 다음 레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구슬을 수리한 보람이 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정신 승리이려나…….”
솔직히 조금 실망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
어떻게 이런 능력을 유물로 파악할 수 있었는지,
고대 제국과 용사들의 능력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내 능력은 한계와 숨겨진 능력 같은 것들은 없는지.
그런 것들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평범한 설명뿐이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구슬을 가지고 이리저리 확인했다.
다른 능력이 없나 물어보고, 정보를 더 얻을 방법이 없는지 확인해 보고, 윽박지르기까지 해보았다.
아쉽게도 단도와 달리, 구슬의 에고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구슬은 담담하게 더는 아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할 뿐이었다.
[재가동 이전에 축적된 정보는 대두분 소실되었습니다. 소실된 정보를 회복하려면 중앙 에고와 접속이 필요합니다.]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이리저리 실험하고 확인했지만, 더 알아낸 중앙 에고의 위치밖에 없었다.
중앙 에고의 위치가 평범한 곳이었으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발견이겠지만, 아쉽게도 알아낸 위치는 몹시도 위험한 곳이었다.
[중앙 에고는 제국의 수도. 기술 관리국 중앙에 있습니다.]
구슬이 말하는 제국은 지금의 ‘차르 제국’이 아니라 고대 제국을 말하는 것이었다.
고대 제국은 대전쟁 때 사라졌고, 그 수도 일대는 지금 마왕이 봉인된 봉인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고대 제국의 수도는 봉인지 중심에 있었다.
마물 왕들이 지키고 있는 봉인지에서 제일 위험한 장소.
바로, 마왕이 봉인된 곳이었다.
나는 그 위험한 곳에 추호도 갈 생각이 없었다.
마물 왕 여럿이라니.
마물 왕 하나를 만나 겨우 살아나왔는데, 그런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을 갈 리가 없었다.
더구나, 마왕과 마물 왕들이 설쳤던 곳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분명, 다 부서져서 남아 있는 게 없을 게 분명했다.
결국, 소득이 없이 날이 밝았고, 공국왕과 만날 시간이 되었다.
나는 주머니에 구슬을 넣어두었다.
솔직히 아직 미련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체 능력이 강화된 덕에 이제 밤을 새우는 정도로는 피곤해지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세수를 한 뒤에 집사장의 안내를 따라 접견실로 향했다.
어제 있었던 왕세자와 나의 대련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것이 공국왕의 통치 능력일까?
왕궁 안은 1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평온한 복도를 걸어, 접견실 앞에 도착했다.
집사장이 내 방문을 알리는 동안,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구슬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내게 밤새 시달렸던 구슬이 뜬금없이 정보를 찾을 방법을 꺼내놓은 것이다.
[정보를 얻을 방법이 더 있기는 합니다. 다른 예비 에고와 접촉을 한다면 정보 일부를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에고였지만,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나름, 열심히 생각해서 꺼내놓은 방법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리 쓸모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다른 예비 에고들은 어디에 있는데?’
이어진 내 질문에 구슬이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디 있는지 알아야 찾아보기라도 하지. 구슬이 꺼낸 말은 대륙 전체를 뒤지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접견실 안에는 전처럼 공국왕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을 처리하는 다른 귀족들이 있을 텐데, 공국왕은 만날 때마다 혼자 나와 있었다.
그렇지만, 나를 특별하게 여기기 때문에 독대를 한 게 아닐 터였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고, 저렇게 혼자 결정을 내리는 왕이라니.
공국왕이 얼마나 공국을 휘어잡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그의 약점일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머리 한쪽에 기억하고, 공국왕에게 머리를 숙였다.
“알렉스입니다.”
“알고 있다.”
전보다 짧아진 대화.
공국왕이 예의를 차리는 타입이 아니라 대화하기는 무척 편했다.
“결정을 내렸다. 아이샤 공주 쪽과 손을 잡기로.”
다행이었다.
겨우 공주를 볼 면목이 섰다.
기껏 공주를 설득해서 공국으로 올 수 있었는데, 내 일만 처리하고 돌아간다면, 공주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속으로 희희낙락하며 공국왕의 말을 들었다.
“이 결정은 어떤 문서도, 어떤 계약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고, 누가 물어보아도 나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남들 모르게 손을 잡는 것이니 공국왕의 말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공주와 공국왕의 합작은 둘 사이의 신뢰로만 이루어진 약속일 뿐이었다.
“공주도 당연히 비밀을 지킬 것으로 믿고, 일을 진행할 것이다.”
“믿으셔도 됩니다.”
공국왕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확답을 드렸다.
“나는 공주와 연결하는 연결 고리를 알렉스 너로만 한정할 생각이다. 내가 본 사람은 공주와 너뿐이고,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은 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공국왕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 인장과 공주의 인장이 같이 새겨진 글만 인정할 것이고, 네가 직접 말하지 않은 이야기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왕은 말을 하다 말고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은데. 거기다, 엉뚱한 곳을 보고 있잖은가.”
왕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왕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내 귀에 엉뚱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계열의 능력자가 근처에 있습니다.
상대방의 정보창을 띄우겠습니다.
직접 접촉이 아니면 정보량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구슬의 에고가 떠드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정보창이 떠올라 있었다.
내 정보창이 아니었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마나 감응력 : 레벨 1
< 주의 >
- 불완전한 강제 각성으로 능력이 온전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공국왕의 정보창이었다.
정보창 뒤로 공국왕이 인상을 쓰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더 있다가는 왕이 화를 낼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정보창을 치우고, 공국왕에게 사과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귀에 다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강제 각성을 한 능력자를 발견했습니다. 강제 각성은 5번째 예비 에고 능력입니다!]
머릿속을 울리는 구슬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밝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