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5화
제5편 대련의 결과
커다란 대검이 빛에 감싸인 왕세자에게 떨어져 내리고, 왕세자는 검을 휘두르며 대검 안으로 몸을 던졌다.
카앙! 캉!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훈련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웬만한 기사들은 아직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신의 눈으로도 두 사람의 움직임은 따라가기 벅찼다.
자신도 이제 나이가 든 것일까…….
왕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들의 멋진 검술과 화려한 움직임은 언제 보아도 감탄할 만했다.
빛에 휩싸인 검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무지막지한 대검을 손가락 하나 차이로 피하는 저 몸놀림.
제대로 된 ‘마나 감응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묘기였다.
왕은 슬쩍 마나를 끌어올려 보았다.
손을 들어보니, 느끼기 어려울 정도의 희미한 빛이 보였다.
저기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아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흐린 빛이었다.
공국왕은 주먹을 쥐고, 마나를 흩어버렸다.
실전에서는 쓸모가 없을 정도로 약한 힘이었지만, 그래도 이 약한 능력 덕분에 이 공국을 얻어낼 수 있었다.
좀 더 제대로 된 능력이었으면, 죽은 형을 밀어내고 카를로스 왕국을 차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에는 공국을 얻어내는 게 최선이었다.
그 여파로 형은 자식들에게 나라를 나누어주는 것을 포기해버려서 결국 내전이 일어나게 만들어버렸으니.
‘그때 그가 내게 도움을 준 것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을 위한 것이라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되어버리겠지.’
어렸을 때, ‘마나 감응력’을 가진 형을 부러워하던 자신에게 낯선 이가 준 선물.
제국 쪽 사람이 분명했고, 그 뒤에 제국의 손을 들어주는 일이 적지 않게 되어버렸지만, 그의 도움을 받은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수십 년이 지나 아들에게 다시 찾아온 것은 예상 밖이었지.’
아들의 잠재력이 더 좋아서인지, 그들의 기술이 더 발전해서인지, 아들은 자신과 달리 제대로 능력을 얻게 되었다.
왕은 저기서 힘차게 검을 휘두르는 아들을 보고, 다시 욕심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카를로스 왕국의 왕위를.
아들의 대련을 지켜보던 그는 잠시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렀다.
갑자기 쏟아져 나온 ‘마나 감응력’을 가진 왕족들.
‘설마, 제2 왕자와 공주도 그들이 찾아갔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대대로 한 명만 발현되던 능력이 갑자기 쏟아져 나올 리가 없었다.
과연,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찾아왔을 때도, 아들의 능력을 깨울 때도 그들은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었다.
‘정말, 왕국의 혼란을 원한 것이었을까.’
공국의 왕이 되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니,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친 계획이라니.
이건 미래를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때 능력을 일깨우는 것을 거절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왕위를 오를 기회를 버리다니. 그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카아앙!
“큭!”
왕이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대련 상황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백중세를 유지하던 싸움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지고 있는 쪽은 왕세자였다.
캉! 카앙!
그는 입술을 깨물며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힘껏 입술을 깨물고 있는지, 입가에는 피가 가득 묻어있었다.
일그러진 왕세자의 얼굴은 여러 표정이 마구 스쳐 지나갔다.
놀람과 분함과 아쉬움, 승부욕까지.
왕국에서 제일 강하다고 여겨지는 자신이 더 어린 기사에게 지고 있으니 분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고,
대련이라 제 실력을 더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이기고 싶을 테니 승부욕이 끓어오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놀람.
왕은 대검을 휘두르는 어린 기사를 보고는, 아들이 놀란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들이 대검을 피하는 것보다, 어린 기사가 아들의 검을 피하는 것이 더 아슬아슬해 보였다.
마치 사방에 눈이 달린 것처럼 검을 피하고, 저 무거운 대검으로 아들의 검을 막았다.
마치,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왕이 놀란 것은 소년의 검술이었다.
아들의 검을 흘리고, 밀고 당기고, 저 큰 검이 어느 때는 산처럼 무거워 보였다가, 다른 때는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레시아 공작의 검술이 보이기도 하고, 왕실의 검술이 언뜻 보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세우타 공작의 검술도 보이는 듯했고.
왕국의 검술이 하나가 된, 초대 왕의 검술이 보이는 것 같았다.
왕은 손을 들어 눈을 꾹꾹 눌렀다.
대련 속도가 빨라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이런 망상이라니.
저 어린 소년에게서 초대 왕의 검술이 보일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전쟁을 준비하느라 신경을 너무 많이 쓴 모양이었다.
카아아앙!
그렇게 눈을 풀고, 다시 앞을 보는 순간,
큰 소리와 함께, 안타까운 신음이 들려왔다.
텅, 터엉.
이어진 검이 벽에 튕겨 나가는 소리까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왕세자는 검을 놓치고,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그의 검은 벽까지 날아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그런데, 어린 기사는 숨도 차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차이가 날 줄이야.
분명, 자신의 아들이 공국 최고의 기사일 텐데.
왕은 어린 기사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왕세자보다도 훨씬 어린,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한 예비기사.
하지만, 그 기사는 방금 공국 최고의 기사를 꺾고도 숨도 거칠어지지 않았다.
왕은 오랜만에 욕심이 나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 * *
아슬아슬했다.
잘못했으면, 전부 들킬뻔했다.
보이지 않는 검, ‘마나 유형화’도 사용하지 않고, ‘마나 감응력’도 눈치채지 못하게 최소한으로 줄이고, 최대한 검술로만 상대해서 대련을 이기다니.
솔직히 육체 강화 빨로 억지로 이긴 거나 다름없었다.
공국 최강이라더니, 내가 상대한 사람 중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이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오래지 않아 왕국에서도 상대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승부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아직 내 실력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낀 시간이기도 했다.
이래서야 내 원래 실력으로 수련 검 속에 있는 20살 초대 왕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더 강해져야 했다.
“정말, 질 줄은 몰랐는데.”
왕세자가 고개를 흔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왕세자. 역시 꽤 괜찮은 왕자였다.
왕세자가 패배를 인정한 덕분에 대련은 나쁘지 않게 끝났다.
둘 다 다치지 않고, 왕세자의 감정도 상한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내 다른 능력들도 들킨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공국왕은 대련을 이긴다고 무조건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었다.
긍정적으로 검토를 한다고만 했을 뿐,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었다.
역시 수십 년간 공국을 이끌어온 노회한 왕이었다.
왕이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도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왕자가 대련에 걸어놓은 내기도 있었다.
도대체 뭘 걸어놓은 것인지, 궁금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왕이 왕세자에게 말했다.
“그럼, 대련에서 졌으니 약속대로 해야겠지?”
“하아, 약속은 지켜야겠죠?”
왕세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련에서도 지는 실력으로 선봉에 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얌전히 지휘부에 남도록.”
“알겠습니다.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죠.”
왕세자는 아쉬워했지만, 공국왕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대공녀는 기뻐하는 것 같았고.
뭔가 내 생각과는 다른 내기였던 것 같았다.
왕과 왕세자가 대화하는 사이에 슬쩍 물러선 나는, 대공녀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약속이었던 거죠?”
내 물음에 대공녀는 바로 대답해주었다.
“아버님이 오빠에게 후방 지휘부에서 병력을 통솔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빠는 오히려 기사단과 함께 선두에서 싸우겠다고 했던 모양이에요.”
왕세자는 전쟁터에서 직접 싸우고 싶어 했고, 공국왕은 왕세자가 안전한 곳에 있게 하려던 것 같았다.
“계속 다투다가, 공자님과 대련으로 결론을 짓기로 했나 봐요. 이기는 쪽 말을 듣기로.”
대공녀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길 줄 알았어요. 잘하셨어요. 세자빈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공국왕도 좋아하고, 대공녀도 좋아하고, 왕세자의 아내도 좋아한다니까 분명 잘된 일일 텐데…….
울적해 보이는 왕세자를 보니, 조금 안돼 보였다.
저 젊은 나이에 저런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뒤에서 지휘만 해야 하다니.
저런 표정이 나올만했다.
예상대로 공국왕은 그 자리에서 내게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내일 다시 접견실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훈련장을 떠났다.
내일 결과를 알려줄 모양이었다.
오빠가 졌는데도 대공녀는 마냥 즐거워 보였다. 발레아와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떠드는지,
돌아오는 길에, 나는 멀찍이 따로 떨어져서 걸어야 했다.
털썩.
그러던 중, 나를 외면한 두 여성 대신에, 내 어깨에 팔을 올리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서 벌써 씻고 왔는지, 반짝이는 얼굴을 들이대는 왕세자였다.
“이름은 알렉스고, 그레시아 공작의 아들이라고 했지.”
“네.”
왜 갑자기 호구조사를 하는지……. 어쨌거나 왕세자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프리다하고도 친하고.”
“친하다기보다…….”
갑자기, 앞에서 걸어가던 여성들이 대화가 뚝 끊어졌다.
대공녀가 휙 뒤를 돌아봤고, 나는 반사적으로 나오던 말을 바꿔야 했다.
“……. 아, 네, 친합니다.”
“좋아.”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걸까.
“그레시아 공작이라면 아직 왕위 계승 순위 안에 드는 곳이지?”
“그렇기는 합니다만.”
“자네는 공작의 아들이고.”
왕세자의 말에 나는 쓰게 웃고 말았다.
뭔가 했더니, 동생과 나를 더 엮어볼 생각인듯했다.
공국의 대공녀와 그레시아 공작의 아들이라면 조금 기울어지긴 해도 어떻게 엮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참, 머릿속이 맑은 기사다운 단순한 생각이었고,
정치적인 감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절대 떠올리지 못할 생각이었다.
내 실력을 보고 지금 즉흥적으로 떠올린 생각일 게 뻔했다.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미리 말해주는 편이 좋을 듯했다.
“저는 그레시아 공작의 아들이긴 하지만, 서자입니다.”
“어, 맞다……. 이런, 그게 있었지.”
왕세자는 난감한 얼굴로 내 어깨에 걸친 팔을 내렸다.
그는 미안한 얼굴로 내게 사과했다.
“이게 몸에 열이 오르면 머리까지 멍청해지는 모양이야. 미안하네.”
왕세자가 사과하는 사이, 대공녀는 성큼성큼 먼저 걸어가 버렸다.
발레아가 옆에서 계속 말을 걸었지만, 대공녀는 아무 대답 없이 계속 발을 옮겼다.
멀어지는 대공녀의 뒷모습에 왕세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화가 난 것 같지? 나중에 혼나려나.”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혼날 것 같기는 했다.
그렇게, 정신없었던 하루가 끝나고,
모두가 잠든 밤, 구슬이 잠에서 깨어났다.
[재시작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