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제4편 공국의 후계자 (3)
역시, 수명이 끝나가는 구슬을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구슬로 마나가 하염없이 빨려들었고, 대공녀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문 옆에 서 있던 전속 하녀가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하게 될 무렵,
겨우 대공녀가 구슬에서 손을 뗐다.
“고친 것 같기는 한데……. 제대로 된 건지는 모르겠어요.”
대공녀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녀의 말이 이상했다.
유물을 수리한 사람이 잘 고쳐졌는지 모르겠다니.
전생이었으면, 돈 한 푼 못 받을 말이었다.
하지만,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으니, 이쪽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발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은 구슬을 쳐다보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구슬을 보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 전에 혀를 찬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여겨지지 않았다.
구슬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발레아가 결국, 나에게 물었다.
“한번 만져봐도 되나요?”
“네, 만져보세요.”
어차피 관리자로 등록된 사람이 아니라면 평범한 구슬로 여겨질 뿐이었다.
감정 능력이 있는 대공녀나, 레스티가 아니라면 알아낼 리가 없었다.
내 예상대로 발레아는 아무것도 다른 점을 찾지 못했다.
구슬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발레아는 고개를 젓고 구슬을 내려놓았다.
대공녀는 소파 위에서 반쯤 기절해 있고, 발레아가 흥미를 잃자, 그제야 나는 구슬에 손을 올렸다.
머릿속에서 전에 들었던 음성이 들려왔다.
그때는 소음처럼 들려오던 음성이었지만, 지금은 정돈된 목소리가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관리자가 인증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관리자님.
조금 전, 용사 관리 체계가 수리되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늦지 않게 수리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쉽게도 시간이 지나 많은 정보가 유실되었습니다.
중앙 에고와 접속이 불가능한 관계로 유실된 정보를 복구할 수 없습니다.
여러 유실된 정보들로 인해 12번째 예비 에고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습니다.
에고를 활성화하기 위해 재시작을 권합니다.
재시작하시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에고라는 것은 AI와 닮아 있었다.
저 재시작이라는 것은 분명 재부팅일 테고.
결국, 전생의 들었던 말로 바꾸면, 메모리 안에 들어 있던 데이터가 많이 날아가 버려서 재부팅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제대로 쓰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재시작한 뒤에 잘못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대답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메시지창에 대답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예’라고 대답했다.
[곧 재시작하겠습니다.
재시작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예상보다 많이 걸릴 수도 있으니, 참을성 있게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재시작 중에는 대답할 수 없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재시작 작업이 끝난 뒤에 뵙겠습니다.]
마지막 말을 끝으로 구슬은 침묵했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곤란한데.”
“왜요?”
발레아의 물음에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망가진 지 너무 시간이 지났나 봅니다. 잠들었네요.”
작업이 끝날 때까지 남은 시간이라도 표시되면 좋으련만, 이건 아예 먹통이 되어버렸다.
왜, 대공녀가 제대로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재시작할 때까지는 이 구슬이 제대로 고쳐질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기다리기만 하면 그만이니, 전보다는 나았다.
설마 몇 달, 몇 년을 기다리지는 않을 테니. 작업이 끝날 때까지 조금만 참으면 되었다.
내가 구슬을 살피는 동안 대공녀는 아예 잠이 들어버렸다.
단도를 수리할 때도 기절하더니, 이번에도 한계까지 능력을 쓴 모양이었다.
발레아와 나는 잠든 대공녀를 두고, 방을 빠져나왔다.
응접실 앞에는 집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일도 많을 텐데, 왜 여기서 우리를 기다린 것인지 의아했다.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집사장의 말은 당연하고, 평범한 내용이었다.
왜 왕궁의 집사장이 직접 안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면 될 뿐이었다.
나도 궁에서 지내는 것이 좋긴 했지만, 이미 계약해놓은 뒤였다.
“아, 궁 가까운 여관에 방을 빌렸습니다. 마차도 빌리고.”
특히 마차는 큰돈을 썼다. 아까워서라도 오늘은 계속 타고 다닐 생각이었다.
내 대답에 집사장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손님을 궁밖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죠. 마차와 여관 문제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내 대답에도 또 한 번의 권유. 이건 권유 이상의 말이었다.
왕의 체면을 걸고넘어지는데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사장의 뒤를 따랐다.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발레아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발레아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왕세자님과 대련이 있잖아요.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 아닐까요?”
“설마, 그럴 리가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속으로 뜨끔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시무시한 공국왕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만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기면 큰일 나는 것은 아니겠지?’
이제는 이기는 것보다 무사히 대련이 끝나기를 바래야 할 것 같았다.
집사장의 말대로, 여관의 있던 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궁 안으로 옮겨졌고, 빌렸던 마차는 순식간에 궁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대련은 이틀 뒤. 다음날 나는 방 안에서 대련을 준비했다.
솔직히 따로 준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왕세자와 대련을 하기로 한 자가 준비도 안 하고 궁을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대신, 발레아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궁을 쏘다녔다.
발레아의 친화력은 무시무시했다.
다음날 대련하러 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발레아를 아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왕세자와 대련을 하게 된 장소는 왕궁 지하에 있는 지하 훈련장이었다.
공국왕과 왕세자만 쓰는 비밀 훈련장인듯했다.
공국왕은 나와 왕세자의 대결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날 아침, 집사장은 나와 발레아를 데리고 계속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훈련장은 생각보다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발레아가 우리를 감옥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발레아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한 덕분에 집사장은 발레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지하 훈련장은 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실이었다.
세우타 공작과 훈련했던 개인 훈련장과 비슷한 석실이었지만, 크기도 단단함도 전혀 달랐다.
더구나, 벽과 바닥에 여러 문양이 그려진 것을 보니, 뭔가 부서지지 않게 처리된 모양이었다.
내가 훈련장 안에 들어서자, 호감형으로 생긴 20대 청년이 벽을 두드리며 내게 말했다.
“마물 왕이 공격해도 끄떡없는 벽이야. 이 훈련장 덕분에 걱정하지 않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
내게 말하는 사람은 1년 전에 보았던 사람이었다.
바로 대공녀의 오빠이자, 이 공국의 왕세자인 안토니오 데 카를로스 왕자였다.
“반갑군. 동생에게서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네. 나보다 잘 싸운다고 계속 이야기해서 꼭 한번 싸우고 싶었어.”
역시 대공녀 때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대공녀를 쳐다보았다.
대공녀는 이미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녀는 발레아와 함께 석실의 문양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왕세자가 내 어깨에 팔을 척하니 걸쳤다.
“계속 들어서 그런가, 낯설지 않단 말이야.”
왕세자는 나를 끌고 석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많으면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을 정도라니까. 왕세자라는 자리만 아니었으면, 나도 활약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가까이 붙으니, 왕세자의 실력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한 말이 그의 진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대공녀의 말대로, 왕세자는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실 선임 기사보다 강하고, 피센 후작의 기사단장과 싸워도 이길 것 같았다.
카를로스 왕국의 두 왕자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공국왕이 아들 자랑을 할 만했다.
그리고, 왕세자가 자신의 위치를 갑갑하게 여길 만했다.
젊은 나이에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왕세자라는 자리에 묶여 있으니, 답답할 만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래도, 자네가 온 덕분에 길이 생겼어.”
그건 또 무슨 이야기인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또, 내가 모르는 곳에서 뭔가 진행되고 있는 건가.
매번 죽어 가면서 이유를 찾을 수도 없으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렇게 왕세자에게 이끌려 우리 두 사람은 석실 중앙에 서게 되었다.
때마침, 석실 문으로 공국왕이 들어왔다.
왕은 아무 수행원 없이 혼자 안으로 들어왔다.
공국왕은 다른 누구에게도 이번 대련을 보여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왕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왕세자와 나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대공녀와 발레아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공국왕이 다가오자, 발레아가 손을 가슴에 올리고, 깊게 머리를 숙였다.
예법의 표준 같은 모습이었다.
공국왕도 만족한 듯이 발레아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국왕은 대공녀 옆에 서서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해라.”
식전 행사나 인사 같은 것을 모두 무시한 말이었다.
예법에 어긋나 보였지만, 공국왕 다운 말이기도 했다.
왕세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뽑았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유물 검이었다.
그는 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물 검을 쓴다고 들었다. 그래서 원래 쓰던 검을 가져왔다. 이 검은 몇 가지 신체 강화가 걸려 있는 검이다. 항상 써와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
왕세자의 말에 속으로 웃고 말았다.
왕세자는 생각보다 훨씬 성격이 좋은 왕자였다. 정치적인 공국왕과 달리 꽤 순수했고.
그는 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 좋은 기사 같았다.
“자네도 이 싸움에 뭔가 걸려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니, 서로 후회 없는 싸움을 했으면 한다.”
아니, 잠깐. 왕세자도 이 대련에 뭔가 걸려 있다고?
정말 이기면 안 되는 거 아냐?
나는 뒷머리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힘든 대련이라니.
다른 대련, 마물과의 싸움보다 더 긴장되는 대련이었다.
어쨌거나 왕세자가 검을 꺼냈는데, 내가 안 꺼낼 수는 없었다.
나도 등에서 검을 꺼냈다.
항상 쓰던 검.
내 대검이었다.
내가 검을 잡는 것을 보고 왕세자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는 검을 세우고 내게 인사했다.
“나는 훌리안 공국의 왕세자, 안토니오 데 카를로스. 기사로서 대련을 청합니다.”
왕세자가 아닌, 기사로서의 인사.
나도 그의 인사에 답했다.
“아이샤 공주의 호위 기사 알렉스 데 그레시아. 기사로서 대련을 허락합니다.”
인사가 끝나자, 왕세자의 몸에서 활화산처럼 마나가 터져 나왔다.
콰과과과과!
‘마나 감응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건 봐주면서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젠장! 우선 이기고 보자고!’
한 번 더 삶을 반복할 것을 각오하고, 나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