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제2편 공국의 후계자 (1)
1년이 넘어 다시 찾아온 공국의 수도는 무척이나 활기찼다.
아니, 활기차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호객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열심히 떠들고 있었지만, 다들 긴장된 표정은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주변 사람들이, 가족이 싸우러 나갔는데, 마냥 즐거워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겉보기에는 전과 다를 바 없어, 우리는 편한 마음으로 수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우리는 우선, 여관을 잡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바나를 만날 때처럼 대공녀를 몰래 만날 수는 없었다.
발레아의 능력으로도 왕궁을 몰래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대신 우리는 공식적인 방문을 하기로 했다.
나는 대공녀의 절친인 아이샤 공주의 호위 기사로서 대공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 자리에 용병 복장을 하고 갈 수는 없었다.
나는 내 방에 들어가, 준비해온 갑옷을 배낭에서 꺼냈다.
멋진 판금 갑옷.
문양은 다 지워져 있었지만, 왕실 기사단의 갑옷이었다.
이 갑옷은 기사 대전 때 입은 갑옷으로, 공주의 호위 기사라는 것을 알리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는 복장이었다.
발레아도 자신의 방에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동안 질끈 묶었던 머리도 늘어뜨려서 발레아는 무척이나 화사해 보였다.
다만, 레스티는 그대로였다.
그는 왕궁에 들어가는 대신에, 공국의 신자들과 연락을 하기로 한 것이다.
모두 준비가 끝났을 때, 여관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여관 주인을 통해 부른 마차였다.
귀족들이 타는 마차가 아니라, 무척이나 평범했지만, 나도 발레아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예법대로 발레아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고, 마부는 우리 모습을 보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이런 마차에 오르다니.
평범한 임대 마부인 그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 어디로 갑니까?”
“왕궁으로 갑시다.”
거기다 이어진 내 대답은 마부를 앉은 채로 기절하게 할 지경이었다.
이래서야 제대로 왕궁까지 가기도 어려울 듯했다.
나는 굳어진 마부에게 금화를 건넸다.
역시 금융치료. 반짝이는 금빛이 그의 정신을 되돌려 주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는 허리가 부러질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 금화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부자가 된 나에게는 큰돈이 아니었지만, 마부인 그에게는 오랜만에 찾아온 대박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마차를 몰았다.
덕분에 마차는 무척 편했다.
평범한 마차였지만, 우리는 왕궁에 도착할 때까지 왕실 마차를 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뒤, 마차는 왕궁 앞에 도착했다.
도시는 평상시처럼 활기차게 느껴졌지만, 역시 왕궁은 달랐다.
왕궁은 전에 왔을 때와 달리, 무척이나 삼엄했다.
병사들이 내성 성벽 위에 늘어서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고, 성문 앞에도 갑옷을 입은 공국 기사들이 눈을 번뜩이며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마차가 멈추자,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마부는 대답할 수 없었고, 대신 내가 마차에서 내렸다.
착.
갑옷을 입은 기사가 마차에서 내리니, 사방에서 검을 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위를 올려다보니, 성벽 위에서도 병사들이 이쪽으로 쇠뇌를 겨누고 있었다.
갑옷을 입고 온 것이 잘못이었으려나. 괜히 사람들을 긴장시킨 것 같았다.
이래서야 뭔가 말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때, 긴장이 가득한 상황에서, 발레아가 밖으로 나왔다.
아.
작은 감탄사가 들리고, 이어서 바짝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다행이었다.
발레아의 미모가 이런 곳에서도 빛을 발하다니.
어이없게 느껴졌지만, 나야 어찌 되었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레시아 공작가의 일원인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아이샤 공주의 호위 기사로 대공녀님을 만나 뵙기를 원합니다.”
그레시아의 일원이라…….
말을 하면서도 뭔가 낯선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 꺼낸 말이기 때문인 듯했다.
공주와 손을 잡기로 한 뒤, 나는 공작에게 암묵적으로 이 이름을 쓰는 것을 허락받았다.
드디어 서자라는 꼬리표를 떼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 허락은 예외로 허락된 조건이 덕지덕지 붙은 허락이었다.
이 내전 중에 밖에서 활동할 때만 쓸 수 있는 이름.
가문 안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공식적으로 인정도 못 받는 이름이었다.
꼬장꼬장한 장로들과 인척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더구나, 후계자인 시몬의 자리가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웃기는 조건들이었지만, 별 상관없었다.
나도 어차피 이번 내전에만 쓸 생각이었다.
내전이 끝나면 작위와 영지를 얻게 될 터이니, 공작가에 더 이상 손을 벌릴 이유가 없었다.
내게도 그냥, 쓰기 좋은 이름표일 뿐이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해도, 씁쓸함은 가시지 않았다.
아마도, 오랜 시간 서자라는 이름으로 당해온 상처 때문일듯했다.
내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내 말을 들은 기사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혹시 신분을 확인할 것이 있는지…….”
제대로 된 마차를 타고 온 것도 아니고, 호위도 없이 평범한 마차와 젊은 남녀 두 명만 달랑 찾아왔으니, 신분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하기에는 우리의 모습이 평범하지 않았을 테니.
저렇게 난감해하는 것도 이해할만했다.
그래서, 내가 공주의 편지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다행히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뒤쪽에 서 있던 기사였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작년에 왕국 아카데미에서 파견 나왔던 학생 맞지?”
나도 그가 기억났다.
“아, 잘 지내셨나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작년 대공녀가 유학을 떠날 때, 국경까지 우리를 경호하던 기사였다.
같이 제국 기사들과 용병들을 상대한 경험 덕분에 나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전우를 잊을 리가 없지.”
그도 마찬가지였다.
“왕국 공주의 호위 기사 맞습니다. 작년에 공주와 같이 왔었습니다.”
그의 말에 검에 손을 올리고 있던 기사들이 검을 놓았다.
겨누고 있던 쇠뇌들도 사라졌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처음 말을 꺼냈던 기사의 말투도 훨씬 정중해졌다.
전세를 낸 마차의 마부도 한껏 공손해져 있었다.
황금이 친절을 만드는 것이라면, 권력은 예의를 만드는 모양이었다.
안쪽으로 연락을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장이 정문으로 급하게 걸어왔다.
1년 전에 보았던 그 집사장이었다.
그는 내 앞에 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1년 전보다 훨씬 정중한 인사였다.
“프리다 공주님께서 두 분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공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행히, 프리다 대공녀는 우리를 반가워했다.
그런데, 전에도 대공녀를 공주라고 불렀었나? 나는 집사장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별문제 없이 대공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쉽게 진행된 일이 몇 없었다. 항상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으니, 이런 날도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나는 발레아와 함께 궁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방해가 있었다.
집사장이 나를 막아선 것이다.
“발레아 양은 바로 가셔도 되지만, 공주님께 가시기 전에, 알렉스 공자님은 들리실 곳이 있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집사장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상한 곳만 아니면 좋을 것 같았다.
집사장이 내 물음에 대답했다.
“왕께서 부르십니다.”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공국왕이라니!
제일 이상한 곳이었다.
왕을 만나는 것은 아예 포기했었는데, 그 왕이 직접 부르다니.
접견실에 들어서면서도 나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갑옷을 입은 채로 접견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신체검사도 하지 않아, 유물 주머니를 가지고, 검을 찬 채로 공국왕을 만날 수 있었다.
접견실에 들어가, 공국왕을 보니, 왜 신체검사를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몸 전체를 감싸는 갑옷과 허리에 찬 번쩍이는 검.
공국왕은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설마, 자신과 대련하라고 하지는 않겠지?’
공국왕을 처음 본 순간 떠오른 것은 대련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그만큼 공국왕은 자신의 마나를 드러내고 있었다.
내 감각과 마나로 느껴지는 공국왕의 실력은 웬만한 왕실 기사 이상이었다.
제1, 2 왕자보다도 강했고, 왕실 선임 기사보다도 강할지 몰랐다.
다만, 공국왕에게 나라를 갈라 주게 만들었던 ‘마나 감응력’은 의외로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지금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공국왕이 나를 보며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공주의 호위 기사로 왔다고 해서 불렀다. 공주의 친서는 가지고 왔나?”
호위 기사로 왔다는 말로, 친서를 가져온 것을 알아차리다니.
아직도 권력자들의 직관은 따라가기 어려웠다.
나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 공국왕에게 바쳤다.
공국왕은 그 자리에서 봉인을 떼고, 편지를 읽어내렸다.
편지를 다 읽고, 공국왕은 벽에 세워진 촛불에 편지를 불태웠다.
“공주가 직접 쓴 것치고는 훌륭한 편지야. 하지만, 지금은 쓸모없는 내용이군.”
나도 공국왕의 말에 동의했다.
힘을 합쳐 두 왕자를 상대하자는 이야기는 지금으로서는 너무 늦은 말이었다.
공국왕이 전면으로 나서기 전이나, 공주가 후계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전이었으면 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뒤였으니, 힘을 합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왕을 만났는데, 친서만 냉큼 던지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협력할 수 없어도, 비공식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비공식?”
“서로 방해만 하지 않아도, 먼저 공격하지만 않아도 협력 이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전생의 수많은 조직과 나라가 행했던 일이었다.
전생에는 나라들끼리 맨날 뒤에서 작당 모의를 해대서 짜증이 났던 평범한 국민이었지만, 의외로 효과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내 말에 공국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왕답지, 귀족답지 않은 일인데…….”
나는 공국왕을 삐뚜름히 쳐다보았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소리를.
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되돌렸지만, 그전에 공국왕이 내 표정을 보게 되었다.
“하하하! 웃긴 놈이군.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짓다니.”
에고, 너무 나댔나.
슬쩍 주변을 살펴보았다.
곳곳에서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보기에는 허름해도 무서운 곳이었다.
운이 나쁘면,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내가 열심히 눈을 굴리는 것을 보고, 공국왕이 피식 웃었다.
공국왕은 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놈을 부른 것은 친서 때문이기도 했지만, 딸이 네 칭찬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역시, 괜히 왕이 부를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칭찬했길래, 왕이 부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공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
“좋아, 한가지 내기를 해서 이기면 네 의견을 고심하도록 하지.”
나는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내기라니?
“내가 지정한 상대와 대련을 해서 이기면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 보겠다.”
거기다 대련이라니. 설마, 공국왕 자신하고 싸우자는 말은 아니겠지?
이건 이겨도 목이 붙어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대련 상대는 공국왕이 아니었다.
“대련 상대는 내 아들. 이 공국의 왕세자다.”
따지고 보면 공국왕보다, 더 난감한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