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화
제25편 모레나 영지전 (2)
기사단이 병사들과 충돌하는 순간,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서걱! 서걱!
병사들이 들고 있던 창과 쇠스랑은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에 힘없이 잘려 나갔다.
무기 뒤에 있던 몸과 머리도 잘려 나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악!”
“제발 살려…….”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지고, 기사단은 병사들을 뚫고, 진영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막아! 전진하지 못하게 해라!”
뒤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지만, 의미 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병사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는 동안, 기사단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자작의 능력 때문이라면, 물아센도 그나마 만족할 수 있겠지만, 자작은 손가락도 까닥하지 않고 있었다.
자작은 기사단 중앙에서 여유롭게 주변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작이 능력을 미리 사용하게 하려고 병사들을 앞에 내세웠지만, 그건 능력을 쓰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전생의 중세 기사단도 일반 병사들에게는 무적에 가까운 존재였는데, 이곳의 기사들은 마나를 쓸 수 있는 자들이었다.
거기다, 이들은 평범한 기사도 아니었다.
파벌을 만들어 제1 왕자를 따르고 있다지만, 그들도 엄연한 왕실 기사들이었다.
자작이 능력을 쓰지 않는다고, 징집병들로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병사들로 쌓아 놓은 벽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진영은 순식간에 관통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기사단은 뒤에 있던 물아센 기사단과 만나게 되었다.
자작과 같이 있는 기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왕실 기사들을 내어 주었지만, 작은 영지에 왕실 기사를 많이 붙여주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수십 명의 기사.
한 번 지기는 했지만, 아직 물아센의 기사들이 배 이상 많았다.
하지만, 물아센 기사단은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보다 더 많이 있었을 때도 저 기사단에 졌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저 기사단 중앙에 있는 자작의 능력 때문이었다.
선두에 있는 기사가 달려오는 왕실 기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자작이 아직 능력을 쓰지 못하는 상태다! 우린 이길 수 있다!”
분명,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아직 자작은 능력을 쓰지 않고 있었다.
저번 전투에서는 분명 처음부터 썼던 능력이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떨어진 사기를 끌어 올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가자! 물아센을 위해!”
“승리를 위해!”
다행히 기사의 말이 먹혀들었는지, 물아센의 기사들이 검을 치켜들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은 병사들의 장막을 뚫고 나온 왕실 기사들을 향해 말을 달렸다.
선두에서 외쳤던 기사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그는 달려오는 기사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다.
텅!
하지만, 그의 검은 기사의 갑옷을 치고, 힘없이 튕겨 나가고 말았다.
“설마…….”
“설마는 무슨.”
왕실 기사는 그를 비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물아센 기사의 목이 잘려 나갔다.
“젠장! 힘이 빠진다!”
“마나가 약해지고 있어!”
“물러서라! 이대로는 전멸이야!”
동시에 달려오던 물아센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말을 멈춰 세웠다.
전날의 악몽이 다시 밀어닥친 것이었다.
하지만, 힘껏 달리던 말을 바로 멈추기에는 기사들의 힘이 너무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멈추더라도, 상대방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병사들을 쓰러뜨리고, 진영 밖으로 튀어나온 기사들이 물아센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물아센 기사들은 왕실 기사들에게 말 그대로 썰려 나갔다.
물아센 기사들은 말도 안 되게 약해져 있었다.
검과 부딪치면 검을 놓칠 정도였고, 검으로 상대방의 갑옷을 뚫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왕실 기사들은 마치 병사들과 싸울 때처럼 물아센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이렇게 왕실 기사들이 날뛰는 중에도 모레나 자작은 세 명의 기사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기사들은 판금 갑옷을 입고 자작의 삼면을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적의 기습이나 뜻밖의 화살도 모두 막아낼 수 있어 보였다.
자작도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지만, 아직은 괜찮아 보였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왕실 기사 가운데에는 자기 흥에 못 이겨서 너무 멀리 나와 있던 기사가 있었다.
막아서던 기사를 쓰러뜨리고, 다음 상대를 향해 검을 치켜들던 그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상대를 보고 혀를 찼다.
이번 상대는 평범한 병사였다.
말을 타지도 않았고, 어디서 구했는지, 망가진 투구와 흉갑을 두르고 있는 병사.
그래도 대검은 좋은 것을 구했는지, 크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쓸만했다.
기사는 병사를 쓰러뜨리고, 검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기사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서걱.
슬쩍 위로 뛰어오른 병사의 검에 기사의 목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기사는 고삐를 놓치고 아래로 떨어졌고, 병사는 기사 대신 말 위에 올라탔다.
말에 올라탄 병사는 손을 들어 투구를 긁적였다.
뭔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감히!”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을 휘두르던 동료가 그 광경을 보고 병사를 향해 말을 몰았다.
병사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를 향해 말을 몰았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팟!
달려가던 기사의 목에서 핏줄기가 터지고, 기사가 말 위에 엎어졌다.
히이잉!
말은 주인이 쓰러진 지도 모르고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 * *
나는 대검에 묻은 피를 털면서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느낌이 이상해 좀 더 가까이 다가왔지만, 이번에도 힘이 약해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분명, 내 주변의 기사들은 자작의 능력에 당해서 힘이 약해져 있었다.
나도 없어진 시간대에서 당해본 적이 있어서 그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조금 전에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해지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원래 이렇게 앞에 나서서 기사들과 싸울 생각은 없었다.
단지, 자작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가까이서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병사들 사이에 섞여서 왕실 기사단을 따라갔고, 두 기사단이 싸우는 외각에서 슬금슬금 움직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조금씩 접근해도 약해지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싸움터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이걸 어쩐다…….”
벌써 기사 둘을 쓰러뜨렸다.
이미 물아센 기사단은 전멸 상태였고, 왕실 기사들은 모두 내가 기사들을 쓰러뜨린 것을 알아차린 뒤였다.
도망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도망칠 때도 아니었다.
“이래서야 발레아의 말에 반박하기가 어렵겠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박찼다.
목표는 모레나 자작.
이렇게 됐으니, 자작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힘껏 검을 휘두르고, 검을 비껴들어 상대의 검을 흘렸다.
다리에 마나를 불어넣어, 말의 방향을 강제로 바꾸고, 몸을 날려 상대방의 목을 베고, 그쪽 말로 갈아타기도 했다.
쿵. 쿠쿵.
내가 지나간 뒤에 기사들이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기사들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고, 달려오던 기사들이 말을 멈추었다.
자작을 지키던 기사들은 검에 미친 듯이 마나를 불어넣고 있었다.
왕실 기사 여럿을 한순간에 베어버리니, 상대방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넌 누구냐! 어떻게 내 능력을 막아낼 수 있었던 거지?”
기사들 뒤에서 자작이 고함을 질렀다.
알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자작에게 물어보려 했는데, 자작도 모르는 걸까?
자작이 고함을 지르는 동안에도 나는 자작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서걱.
앞을 막아선 기사를 힘으로 베어내자, 뒤이어 양쪽에서 검이 밀고 들어왔다.
자작을 지키던 기사들의 멋진 합동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검들은 보지 않는 방패에 막혀 버렸다.
대검을 들어 검을 막으니,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어떻게?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마나 유형화’로 만든 방패 덕분이었지만, 곧 죽을 이들에게 알려 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고, 두 기사는 내 검에 맞아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기사들이 쓰러지자, 자작과 나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놀란 기사들이 사방에서 달려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이미 자작 앞에 서 있었다.
하얗게 질려 있어도 자작은 아직 잘생겨 보였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왜, 안 먹히는 거지? 안 먹힐 리가 없는데?”
그러게 말이다.
처음부터 안 먹힌 거라면 알지 못하는 내 능력이 더 있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분명 전에는 잘 먹혔었다.
하얗게 된 얼굴로 자작은 분노를 토해냈다.
“같은 계열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우리 집안의 능력이 아니면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야 겨우 조금 못생겨 보였다.
아니, 그것보다 자작의 말로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자작의 말대로라면 같은 집안의 능력이라면 막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결국, 그의 딸인 이바나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능력을 받은 상태였고.
‘설마, 이바나 능력이 디버프 계열도 막을 수 있는 건가?’
단지, 자작의 능력만 막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디버프, 육체를 약화하는 능력을 막을 수 있는 것인지는 따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자작 앞에 서서, 검을 들어 올리자, 자작은 급하게 양손을 들었다.
그는 비굴한 목소리로 빠르게 입을 놀렸다.
“설마, 나를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나는 왕세자의 측근이자, 죽은 왕비의…….”
퍽!
아니, 그건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할 텐데?
생긴 것과 달리, 정말 귀족답지 않은 사람이었다.
몹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말대로 죽이진 않았다.
이미, 한번 동료의 아버지를 죽였었다. 내 손으로 또 죽이기는 곤란했다.
면피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그냥 자작을 기절시키는 것으로 끝을 냈다.
대신, 덤벼오는 기사들은 봐주지 않았다.
내가 기사들을 하나하나 베어내자, 남아 있던 물아센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다시 사기를 올리며 왕실 기사들에게 덤벼들었다.
왕벌에게 꿀벌들이 덤벼드는 것같이 광기에 휩싸인 병사들이 왕실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자작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깔린 것인지, 이미 죽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 덤벼! 모두 죽이고 모레나 영지를 점령하는 거다!”
그때, 뒤쪽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 듣지 못하던 목소리였다.
아마도 물아센 귀족의 목소리일듯했다.
나는 싸우던 기사를 병사들에게 던져주고, 뒤쪽으로 몸을 뺐다.
모레나 자작이나 제1 왕자가 이기는 것이 싫긴 했지만, 제2 왕자가 이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모레나 영지전은 어처구니없게도 두 영지의 공멸로 끝나버렸다.
전투 중에 모레나 자작과 물아센의 영주가 죽어버린 것이다.
모레나 자작을 지원했던 기사들도 모두 죽었고, 물아센의 병력도 무사히 돌아간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다행히 제2 왕자는 모레나 영지를 다시 건드리지 않았다.
이미 내전은 시작되었고, 더 중요한 영지들이 가득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공국의 움직임이 제일 심상치 않았다. 공국의 병력이 왕국으로 진군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수선한 시기에, 나는 공국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