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제24편 모레나 영지전 (1)
해가 아직 떠오르지 않은 새벽.
막 자리에서 일어난 모레나 자작은 때맞춰 찾아온 집사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차도가 있다고?”
“네. 위험한 시기를 넘기고 빠르게 회복 중이십니다. 늦게나마 포션이 효과가 있는 듯합니다.”
“그럴 리가……. 포션으로 치료될 상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확인했습니다. 이바나 님도 안심하고 조금 전에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포션이 아니면, 이바나의 능력 때문인가? 전성기의 몸 상태로 바꾸어 주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치유 능력도 있는 걸까?”
자작은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집사는 자작이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렸다.
“뭐, 상관없겠지. 오헨이 살아났다니, 편하게 이바나를 데리고 갈 수 있겠군.”
“그게……. 오헨 기사님이 돌아가시면 데려가신다고 하셨다고…….”
자작은 집사를 노려보았다.
수도에 가서 오랜 기간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 영지의 주인은 그였다.
감히 자신의 말에 딴지를 걸다니.
시킬 사람이 없어서 지금은 놔두지만, 내전이 끝난 뒤에는 모두 정리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정말, 이 집의 사람들과 영지는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작고, 촌스러운 동네는 어렸을 때부터 답답하기만 했다.
한번 온 기회를 붙잡아 수도로 날아오를 수 있었지만, 자신의 등에 달린 모레나라는 꼬리표는 언제나 그를 답답하게 했다.
이제, 그 꼬리표를 뗄 시간이었다.
“오헨 걱정에 자리를 뜨지 못한 것이니, 살아났으면 아무 문제 없을 텐데?”
자작은 집사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하지만, 집사는 할 말이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물아센 병력이 마을 밖에 있습니다. 자작님이 떠나신 다음에 저들이 또 공격해오면 저희는 막아 낼 수가 없습니다. 이바나 님도 걱정을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자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결국, 자작이 떠나면 자신들이 위험해질까 봐 하는 소리였다.
되지도 않는 충성심보다, 차라리 이쪽이 편했다.
마음에 부담이 없이 버리고 가기에는.
“오헨이 일어나면 오헨하고 막아내면 될 텐데?”
편해진 자작은 집사에게 유치한 대답을 했다.
집사의 표정이 굳어졌고, 자작은 그 표정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왕세자님과 대국을 논해야 하는 내가 이런 촌구석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 첫수에서 밀렸다고, 계속 말려들 수는 없는 법이지.”
자작은 집사에게 손을 내저었다.
“예정대로 아침에 출발한다. 해가 떠오르면 이바나를 깨워서 데려오도록.”
“……알겠습니다.”
자작의 지시에 집사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집사가 나간 뒤, 다른 사람이 또 자작의 침실에 찾아왔다.
자작은 화를 내려 했지만, 급하게 들어온 사람을 보고는 화를 내지 못했다.
왕실 기사가 찾아온 것이었다.
기사는 판금 갑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있었다. 밤에 경계를 섰던 모양이었다.
“물아센 병력이 마을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시 덤벼들 모양입니다.”
기사의 말에 자작은 혀를 찼다.
전투에 지고도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덤벼들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하루만 늦게 움직일 것이지……. 지금 공격하면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로 피곤한 짓이 되어버릴 게 뻔했다.
자작은 이왕 벌어진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싸워야 할 제2 왕자 쪽 귀족들이었다.
거기다,
“물아센 병력을 철수시키면 이바나도 더 어물거리지 않겠지.”
이바나의 능력도 나름대로 쓸모 있는 것 같으니, 조금은 구슬려 둘 필요가 있었다.
“처음으로 마나 고갈이 될지도 모르겠군.”
자작이 한바탕 능력을 쓰고 겨우 하루가 지났다.
또, 힘을 쓰면 마나 고갈이 될 가능성이 컸다.
‘무척 힘들다고 하던데…….’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이번에 쓰면 앞으로 한동안 능력을 쓸 일이 없었다.
수도에서 왕세자 옆에 붙어 이런저런 참견만 하면 그만이었다.
“부대장에게 말해서 기사들을 모두 준비시키도록. 이번에는 적진을 관통해서 귀족이나 영주를 잡아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기사는 선임 기사에게 하듯이 그에게 경례하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기사의 깍듯한 모습에 자작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제1 왕자에게 통솔권을 넘겨받았지만, 그가 능력을 발휘하기 전에는 뻣뻣했던 왕실 기사단이었다.
하지만, 첫 싸움 이후 기사단은 그를 제대로 대우해주었다.
자작의 상속능력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군문으로 나갔으면 꽤 성공했겠지?”
확실히 자작의 능력은 싸움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었다.
군대로 빠졌으면, 장군 이상도 가능했고, 승작을 했을지도 몰랐다.
“쩝, 어차피 성격에 안 맞았으니.”
지금도 어쩔 수 없이 싸우고 있지만, 싸우는 것은 영 성미에 안 맞았다.
피가 난무하는 전장보다, 연회에서 자신에게 반한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훨씬 좋았다.
“나는 대놓고 싸우는 것보다, 모략과 계책들이 오가는 전장이 더 맞아.”
물론, 그런 모략을 성공시켜본 일은 없었지만, 자작은 잘생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막 해가 떠오르는 새벽.
떠오르는 해를 등에 지고, 천 명이 넘는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쇠스랑을 든 농사꾼부터 제대로 창을 들고, 가죽 갑옷을 입은 영지병까지.
패배를 추스른 물아센 병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첫 싸움에서 많이 죽고도 저 인원이라니. 영지의 젊은 남자 대부분을 징집한 듯했다.
마을 쪽도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목책 위로 병사들이 올라왔고, 마을 안도 싸울 준비를 하는지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전쟁의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길과 조금 떨어진 반파된 집, 우리를 막아섰던 기사와 병사들이 있던 집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천 명의 영지전이라.
전생에 읽고, 들었던 수만 명의 전투를 생각하면 대단치 않은 전투였다.
하지만, 천 명의 병사가 진군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니,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전생에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과는 차원이 다른 박력이 느껴졌다.
원래, 이바나에게서 능력을 받고, 그냥 떠나려 했었다.
능력을 받은 보답은 오헨 기사를 치료한 것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을 밖으로 나와 신관 레스티를 만나면서 떠나려던 계획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물아센 병력이 새벽에 다시 한번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영지전을 직접 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거기다, 모레나 자작의 능력을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었다.
없어진 시간대이긴 했지만, 모레나 자작 때문에 한 번 죽었었다.
이런 기회가 왔는데 놓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물아센이 이겨서 이바나가 죽게 놔둘 수도 없었다.
“세심한 조율이 필요하려나…….”
내 말에 레스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하지만, 발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요.”
두 사람에게는 전투만 보고, 떠나자고 말했다. 그래서 레스티가 내 말에 어리둥절한 것이었다.
발레아는 아쉽게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동안의 경험 때문이려나.
그래도, 발레아에게 저런 소리를 듣게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꽤 억울한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는 레스티가 한쪽에 놓아두었던 투구와 흉갑을 집어 들었다.
찌그러지고, 흠이 가득한 투구와 가죽 흉갑이었다.
“이건, 제가 좀 쓰겠습니다.”
“그거야 상관없지만, 왜 그 갑옷을…….”
레스티가 물아센을 염탐하기 위해 썼던 흉갑과 투구였다.
이 집을 사용하던 기사와 병사들이 수거했던 물건 중 하나였는데, 그나마 다른 장비보다 깔끔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보려고요.”
내 말에 발레아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가까이 가서 보다가 참견할 생각일 테고요.”
무서운 발레아.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위험할 텐데…….”
레스티가 걱정하는 말을 꺼냈다가 바로 말을 얼버무렸다.
레스티도 내가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병사들 사이에 움직이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았다.
내 실력이라면, 병사들의 엄한 창이나 화살에 찔릴 위험은 없었다.
물론,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려고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발레아는 같이 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잘한 결정이었다.
발레아는 육체 능력자가 아니라, 저런 전장에 숨어들기는 어려웠다.
나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다음, 반파된 집을 빠져나왔다.
이미, 물아센 쪽 병력은 진영이 무너져 있었다.
강제로 징집한 영지민들이 진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뒤에서 기사와 영지병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으니, 그들은 계속 마을과 목책을 향해 나아갈 따름이었다.
나는 새벽의 어두움을 이용해서, 병사들 사이에 숨어들었다.
시체와 파헤쳐진 흔적을 이용해 이동하니, 내가 스며든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병사들 사이에 끼어드니, 사방에서 압력이 훅 밀려들었다.
헉. 헉.
거친 숨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고,
긴장된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출발하기 전에 술이나 약물을 들이켰는지, 징집병들의 눈에 핏줄이 서 있었다.
‘이게 진짜 전쟁이려나…….’
그동안의 싸움과는 느낌이 달랐다.
일반인과 다른 정신과 신체를 가진 나도 이 안에서는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살고 싶은 욕망과 약물에 취한 광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일종의 정신 공격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마나를 둘러, 밀려드는 광기를 밀어냈다.
광기를 밀어내고 보니, 어느새 목책이 다가와 있었다.
‘공성전을 하게 되려나…….’
공성전은 조금 곤란했다.
목책을 지키는 사람들의 태반은 마을 사람들이었다.
내전과 상관없는 마을 사람들이 다치게 되는 것은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성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순간,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극!
뒤쪽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모두 창을 들어!”
“무기를 앞으로 내밀어! 기사단이 온다!”
성문이 활짝 열리고, 기사단이 튀어나왔다.
왕실 기사단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문양을 지운 기사단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었지만, 기자나 신문이 없는 이 세상에서는 저 정도면 충분했다.
문을 박차고 나온 기사단은 병사들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숨소리들이 더 거칠어졌다.
“제발…….”
“젠장! 죽고 싶지 않아!”
“엄마…….”
병사들 사이에 공포가 퍼져나갔다.
공포가 광기를 점점 밀어냈지만, 안타깝게도 병사들은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멈추지 마라! 뒷걸음질 치는 자는 바로 목이 잘릴 것이다!”
뒤에서 소리치는 기사들 때문이었다.
‘기사단은 기사단이 상대하는 게 아니었나? 이렇게 병사들을 밀어 넣으면 전부 기사단에게 죽어 나갈 텐데?’
나는 억지로 나아가는 병사들 사이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물아센의 집단 자살 같은 전략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다시 들려온 고함 덕분에 풀리게 되었다.
“기사단은 뒤로 빠져! 저번처럼 당할 생각이냐! 상대 기사단은 병사들이 상대한다!”
그리고, 고함을 듣고, 왜 대패한 물아센이 지금 다시 덤비는지도 알 수 있었다.
물아센 지휘부는 병사들을 내세워 모레나 자작의 능력을 막을 생각이었다.
기사들이 능력에 당해 약해졌으니, 대신 병사들이 당하게 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병사들을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쓰레기 같은 작전이고, 상대방이 다른 방법을 쓸 거라는 생각은 요만큼도 하지 않는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달려온 기사단이 병사들과 충돌했다.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