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제23편 아버지와 딸
특별한 장식도 없고, 크지도 않은 방.
벽에 걸린 검과 한쪽에 세워진 갑옷만이 이 방이 누구의 방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작은 등이 켜져 있는 검소한 방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침대에 누워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나이 든 남자.
다른 한 명은 침대 옆에 앉아, 걱정스럽게 남자를 바라보는 소녀, 이바나였다.
그리고, 이 방은 침대에 누워 있는 늙은 남자, 오헨 기사의 방이었다.
조용하던 방에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쿨럭.”
오헨이 마른기침을 토해낸 것이다.
이바나는 바로 옆에 있는 젖은 수건으로 오헨의 입을 적셔 주었다.
아쉽게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다.
오헨의 부상은 영지민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심했다.
이바나의 능력 덕분에 전성기 체력으로 지휘와 전투를 이어갔지만, 몸 자체가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큰 상처도 버틸 수 있는 젊은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상처를 이겨낼 힘이 없었다.
포션도 효과가 없었고, 이 작은 영지에는 신관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오헨은 내일 해를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그게 더 아프게 만들 줄은 몰랐어요.”
이바나는 혼수상태에 빠진 오헨에게 계속 사과를 하고 있었다.
테러 이후 왕세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자, 그녀는 다른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지루하기만 했던 영지도, 답답했던 영지민도, 그리고 왕세자의 명으로 그녀를 지키던 오헨도 전혀 다르게 보였다.
지루했던 영지는 포근하게 느껴졌고, 답답했던 영지민들은 순박하고 따스했다.
오헨 기사도 달랐다.
왕세자의 명으로 자신을 지켜왔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런 이유만으로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보살폈을 리가 없었다.
아프면 약을 찾아 산을 헤매고, 개인 교사에게 칭찬을 들으면 본인도 기뻐하던 오헨이었다.
아카데미를 갈 때도 아쉬워 보이는 얼굴로 기뻐해 주었고, 그녀가 돌아왔을 때도 언제나처럼 반겨 주던 오헨.
오헨은 아카데미에 갔을 때도 얼굴도 보여 주지 않았던 아. 버. 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오헨이 나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힘을 내요.”
이바나가 주름진 오헨의 손을 잡고 말을 했지만, 오헨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등 뒤에서 다른 사람의 말이 들려왔다.
“그런다고 죽을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
듣기 좋은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이바나가 오랫동안 듣기 원했던 목소리였고, 지금은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이바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오헨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물었다.
“왜 오셨나요. 기다려 준다고 하셨잖아요.”
모레나 자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영지를 구했지만, 계속 영지를 지킬 생각은 없었다.
그는 마을 밖에 적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이바나를 데리고 수도로 갈 생각이었다.
제1 왕자의 기사단을 빌려온 것도 그런 이유였고, 그는 하루빨리 이바나를 데리고 바로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바나의 고집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바나가 오헨의 마지막을 보고 떠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이바나의 물음에 자작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온 거다. 죽었는데 시간을 끌 이유가 없으니.”
이바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혈육이 저렇게 메마른 인간이었다니.
그동안 들었던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오빠인 왕세자를 돕기 위해 수도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
언제나 함께 살고 싶다는 말.
자작과 만난 뒤에 물어보았지만, 편지에 적혀 있던 말은 자작이 알지 못했다.
전부 남이 대신 쓴 편지였을 뿐이었다.
아마, 황태자가 쓴 편지도 그렇겠지.
이바나는 오헨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돌려 모레나 자작을 쳐다보았다.
중년의 나이에도 정말 잘생긴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바나는 그 잘생긴 얼굴에서 욕심만 보였다.
이바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평생 이 영지를 대신 지켜 주신 분이에요. 그런 분에게 그렇게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건가요?”
“호위 기사로 평생 왕비와 너를 지켰다. 기사의 명예를 충분히 지켰으니, 오헨도 만족했을 거다.”
이바나는 자작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자작의 말은 권리와 의무를 뒤바꿔놓은 궤변일 뿐이었다.
이바나는 주먹을 쥐고 자작을 노려보았지만, 자작은 그녀의 분노에 조그마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자작은 누워 있는 오헨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침이면 끝날 것 같으니, 물러가도록 하지. 너도 새벽에 떠날 수 있게 짐을 준비해 놓아라.”
냉정한 자작의 모습에, 이바나는 결국 참고 있던 질문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딸 맞나요?”
자작은 이바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능력을 보니, 딸이 맞겠지.”
자작의 웃음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이바나 앞에 들이밀었다.
“네 덕분에 왕세자와 줄을 이을 수 있었지만, 괜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는 왕세자와 같은 어머니를 두었을 뿐, 그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니까.”
그는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자작이 나가자, 이바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짧은 대화 동안, 진이 빠진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오헨의 방에서 자작 때문에 울 수는 없었다.
“일어나야지.”
이바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마지막까지 오헨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고개를 든 그녀 앞에 엉뚱한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타이밍이 안 좋을 때 온 것 같네요.”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이바나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발레아는 터널을 저택의 지하실과 연결했다.
지하실은 지키는 사람이 없었고, 우리는 쉽게 저택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바나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발레아가 지하실에서 저택 전체에 영역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바나와 자작의 대화도 모두 들을 수 있었고, 이렇게 알맞은 시간에 이바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지금도 발레아는 지하실에서 영역을 펼치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이 방에 오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방도 발레아의 영역 안에 있었다.
지하실에 있는 그녀가 내게 말을 전할 수도 있었고, 내가 이 방에서 떠드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따로 방음벽을 펼치지 않았다.
전부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동료들에게 전부 숨길 필요도 없었다.
신검이 있으니, 최대한 알려주고 계약을 하는 편이 더 좋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발레아부터였다.
“어떻게 여기를…….”
“지나가다가 들렀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약속이 생각나서요…….”
이바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했다.
역시, 타이밍이 안 좋았다.
어이없는 말 덕분인지, 이바나는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공회 이야기는 들었어요. 공주님이 대단한 선언을 하신 모양이더라고요.”
자작과 기사들은 공회가 끝나기 무섭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이바나의 말에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바나가 알고 있을 줄이야.
공주의 선언 덕분에 제1 왕자와 나는 공식적으로도 서로 적 비슷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이바나가 알아버렸으니, 뭔가 더 해보기가 곤란해져 버렸다.
난감해하는 나를 보고 이바나가 뭔가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잘되었어요. 약속을 지킬게요. 오빠, 아니, 왕세자와 모레나 자작을 이겨 주세요.”
조금 전에 자작과 싸우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이바나가 이렇게 말할 줄 생각도 못 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나한테는 좋은 이야기였다.
다만,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능력은 저 기사님에게 쓴 것 같던데……. 지금 능력을 빼내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을 넘기지 못하다고 했으니, 죽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이야기일까?
내 말에 이바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우울한 미소였다.
“아카데미에 갔던 이유 중 하나가 제 능력을 더 키우기 위해서였어요. 바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목적은 이룰 수 있었어요.”
그녀는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이 은은하게 빛났다.
“영지에 돌아온 뒤에 두 명까지 능력을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을 알게 되었어요. 바로 오헨 경에게 능력을 부여하고, 한 명분은 계속 쓰지 않고 있었어요.”
이바나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속 능력을 남겨 놓았다는 이야기였다.
한 명에게 부여할 수 있었을 때도, 두 명인 지금도.
이바나의 말에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 약속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과 앞으로 하게 될 일까지.
이바나는 내 가슴에 손을 올렸다.
“몸에 마나가 스며들 거예요. 거부하지 마세요.”
이바나의 손에서 마나가 흘러나왔다.
변형된 마나가 가슴에서부터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묘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 말대로 퍼져나가는 마나를 막지 않았다.
그녀의 마나는 몸 전체로 퍼져나가며 내 신체를 일깨웠다.
다 크지 않은 세포를 일으켜 세우고, 약해진 세포를 건강하게 바꾸었다.
그녀의 힘, 마나가 내 몸의 세포를 최고의 상태로 바꿔 버렸다.
‘이래서 조금만 훈련하면 전성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였군.’
전성기를 거친 사람이라면 훈련 없이도 전성기 때의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듯했다.
오헨 기사가 두 기사를 상대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터였다.
“됐어요. 이제 제가 능력을 거두거나, 죽지 않는 한, 이 능력은 유지될 거예요.”
이바나는 지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이바나가 능력을 마음대로 거두어갈 수 있다라…….
조금 걱정이 되어 계약해 버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좋은 능력이었지만, 생각처럼 대단한 능력은 아니었다.
당장 표가 나는 것도 아니었고.
억지로 계약을 권해 관계가 깨지는 것보다, 이렇게 헤어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대신,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 보답을 하기로 했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누워 있는 늙은 기사에게 걸어갔다.
이바나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랐지만,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만큼 믿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검을 기사의 몸 위에 걸쳐놓았다.
그리고,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우우우웅.
마나를 받아들인 신검이 검명을 토해냈다.
환하게 빛나는 검.
기사의 몸이 치료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는 받은 능력이 대단치 않은 것 같아, 무척 아쉬워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몇 시간 뒤에 바뀌게 되었다.
그녀의 능력은 내 생각 이상으로 무척이나 좋은 능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