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제20편 각자의 임무
수도의 외성에서 몇 km는 떨어진 공터에서 공작 일행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가 마차들과 말을 탄 기사들.
공작이 제대로 준비해 온 것인지, 기사들은 그레시아 기사단의 정예들이었다.
알론소 기사단장과 우고 선임 기사에 앙헬 선임 기사까지.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지게 된 얼굴들이었다.
공작과 시몬, 마뉴엘 두 형이 마차에서 내려 공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이샤 공주님. 저희가 공작령까지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공주가 마차에서 내리자, 공작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린 소녀나 귀족 영애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왕족, 그것도 왕세자 같은 직위를 가진 왕족에게 하는 인사였다.
공작은 아이샤 공주를 완전히 차기 왕위 계승자로 대우하고 있었다.
정예기사들을 데려온 것도 그런 이유일 터였다.
하지만, 공주는 공작의 정중한 인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주는 또박또박 공작의 말에 대답했다.
“저는 안전하게 몸을 지키기 위해 공작령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지만, 공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공작님과 다른 귀족분들과 함께 이 나라의 왕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공작령으로 가는 겁니다.”
나이답지 않은 정치적인 말.
어린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 말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공작은 잠시 공주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가 말을 실례했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공작령까지 안내하겠습니다.”
그제야, 긴장했던 공주의 몸이 풀리는 게 보였다.
“공주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시몬 데 그레시아입니다.”
“마뉴엘 데 그레시아입니다.”
공작과의 인사 뒤에 공주는 공작의 두 형제와도 인사를 마쳤다.
공주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는 말없이 공주 뒤에 서 있었다.
시몬과 마뉴엘은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했지만, 나는 공주 뒤를 지키는 일에 충실했다.
공주가 인사를 하는 사이, 발레아는 벌써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뉴엘과 시몬은 물론, 기사들까지. 그녀는 발랄한 귀족 소녀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하려고 할 때, 수도 쪽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두 기사가 있었다.
급하게 문양을 지워버려서인지 반들거리는 판금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
미로와 악셀. 공주의 호위 기사, 전 아카데미 기사들이었다.
“늦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악셀 기사가 말에서 내려 공주에게 인사했다.
이어서 미로 기사도 도착했고, 두 사람은 숨도 가다듬지 않고, 공주 뒤에 섰다.
두 사람이 공주 뒤에 서니, 공작의 기사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제야 구색이 갖춰진 기분이 들었다.
두 기사가 찾아오고, 모두가 다시 출발하려고 할 때, 나는 공주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명령하신 내용을 수행하고, 늦지 않게 공작령으로 가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 말을 의아해했지만, 공주와 발레아, 공주의 두 기사는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악셀과 미로 기사가 열심히 달려온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다.
며칠 전, 입관을 마지막으로 장례식이 끝난 뒤, 왕비의 응접실에 공주와 나, 카트린과 왕비가 모였었다.
처음 내가 왕비와 공주를 만났을 때의 그 멤버였다.
1년 반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각각의 입장은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
아이샤는 각성 전인 공주에서 후계자 싸움을 하는 왕족이 되었고, 나는 막 상경한 서자에서, 실력이 있다고 소문난 공주의 호위 기사가 되어 있었다.
카트린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왕비는 이제, 과부가 되어 홀로 왕궁을 지켜야 했다.
“같이 가시면 안 되나요?”
밖에서는 담대하게 두 왕자와 말싸움을 하는 공주였지만, 혼자 남게 되는 왕비 걱정은 끊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공주의 애원에도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왕비는 오랜 장례식으로 지쳐 보였지만, 말도 행동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후계자 싸움을 하던, 내전을 하던, 누군가 왕궁에 남아서 이 나라 왕실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야 해.”
왕비의 말이 맞긴 했다.
외국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도, 왕국의 백성들을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구심점은 있어야 했다.
“그걸 왜 어머님이 하셔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공주는 밖에서 보이지 않던 눈물을 보이며 왕비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초대 왕이 나라를 세웠다면, 초대 왕의 왕비는 이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었다.
나라의 체계와 법률, 세금과 행정 시스템까지.
초대 왕의 왕비가 괜히 국모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이 나라에서는 왕비의 권위는 작지 않았다.
실질적인 권력은 거의 없었고, 왕이 있다면 그 권위마저 왕에게 귀속되었지만, 이런 시기라면, 왕국을 지킬 사람은 왕비밖에 없었다.
공주는 그 뒤에도 몇 번이나 부탁했지만, 왕비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왕비는 대신,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과, 1년 반밖에 쓰지 못하는, 우리의 최고 무기인 알렉스 공자를 어떻게 쓸지 고민해볼까?”
왕비의 말에 공주도 카트린도 표정이 바뀌었다.
왕비도 공주도 카트린도 모두 알고 있었다.
공주와 손을 잡은 소수의 귀족은 모두 각자의 욕심 때문에 공주와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
그레시아 공작가도, 왕비의 친정인 라텐하마르 백작가도, 모두 진정한 한편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이곳에 모여 있는 네 명만이 진정한 공주의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왕비 말대로 나야 1년 반짜리 한시적인 동료였지만.
그래도, 나를 제외하지 못하는 것은 1년 반짜리였지만, 나를 제외하면 믿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비의 말이 끝나자, 이 자리는 아이샤 공주 파벌의 전략을 수립하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나를 호위 기사로만 쓰기는 아깝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공주가 공작령에서 세력을 모으는 동안, 자유롭게 움직이기로 했다.
물론, 미리 계획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었지만, 호위 기사에서 자유 기사로 잠시 전업을 한 셈이었다.
나는 좀 전에 인사를 생략했던 기사들에게 갔다.
나는 인사 겸해서 기사들에게 공주를 부탁했다.
“공주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론소 단장과 우고 기사, 앙헬 기사와 다른 기사들까지.
사이가 좋은 기사도 있고, 서먹한 기사들도 있었지만, 전부 그레시아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이제 공주의 목숨을 이들에게 맡기게 되었으니, 최선을 다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돌아가면 미겔도 지켜드릴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사단장의 평범한 대답과 우고 기사의 반가운 대답 뒤에, 앙헬 기사는 조금 딴지를 걸었다.
“호위 기사 일을 하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정식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공작부인 쪽 기사였고, 수도를 오가면서 나를 여러 번 봐서였을까.
그는 공주와 친해진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뭐라 대답하지 않고, 그냥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형제들 간의 인사.
“집에도 안 들릴 생각이냐. 아만다 부인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
나를 생각하는 듯한 시몬의 말은 역시나 가슴에 생채기를 남길 뿐이었다.
“뭐, 바쁜 일이 있나 보지. 아카데미에서도 뭐가 맨날 바쁜지 얼굴 보기 힘들었는걸.”
오히려 툴툴대는 마누엘의 말이 듣기 편할 정도였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죠.”
나는 무난한 대답을 하고, 마지막으로 공작 앞에 섰다.
공작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것이냐.”
말이 끝나는 순간 공작은 슬쩍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우우웅.
공작과 내 주변에 마나로 만든 벽이 펼쳐졌다.
동시에 주변의 소리가 사라졌다. 방음벽이었다.
내 대답을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배려였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입을 여는 대신 공작을 쳐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
전에는 무섭고, 넘어서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다들 실력 있는 기사와 상속능력자들이었다. 방음벽이 펼쳐진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배려는 개뿔.
오해를 사기 딱 좋은 짓이었다.
나는 발을 들어 올려, 힘껏 내려쳤다.
쿵.
땅이 울리고, 내가 퍼트린 마나가 방음벽에 부딪혔다.
그그그.
잠깐의 힘겨루기 후 마나로 만든 벽이 깨져나갔다.
쨍그랑.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 사람들이 움찔 놀라는 기척도 들려왔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나는 대답했다.
“저는 아이샤 공주님의 호위 기사입니다. 공주님의 지시가 있어서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내 말에 공작이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한마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가. 그럼, 그렇게 알고 있지.”
내 말과 공작의 대답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내 표정과 그의 표정에도.
물론, 서로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는지도, 제대로 받아들여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일행에게 향했고, 공작은 마차에 올랐다.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공주와 엄지손가락을 올린 발레아.
나는 공주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혼자 괜찮겠습니까?”
공주는 내 말에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대신, 알렉스도, 발레아도 빨리 돌아와야 해요.”
공주의 말에 나는 발레아를 흘겨보았다.
발레아가 공주와 같이 남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요. 공자님을 따라갈 거예요. 내가 휴학한 이유는 공자님 때문이에요.”
하지만, 발레아의 고집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그녀가 말한 이유 때문에도, 억지로 공주 곁에 붙여 놓기는 어려웠다.
결국, 두손 두발을 다 들고, 나와 같이 가게 되었다.
다행히 발레아는 무척이나 도움이 되는 동료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와 같이 다니려면, 계약을 새로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남게 되는 공주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두 기사도 있고, 공작령에는 어머니도 계셨다.
편지를 공주에게 전해 두었으니, 잘 도와주실 터였다.
거기다, 카트린과 벤자민 선배도 곧 공작령으로 찾아갈 테니, 걱정은 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인사를 끝낸 뒤, 마차와 호위하는 기사들이 공터를 떠났다.
공주가 탄 마차가, 공작의 마차들과 함께 멀어져갔다.
이제 저들은 그레시아 공작령으로 가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할 것이었다.
먼저 치고받을 두 왕자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그렇게 저들, 공주의 파벌은 차츰차츰 세력을 키워갈 것이다.
귀족들이 모이고, 거절하는 주변 영지들을 정복해서 점점 크기를 불려 나가, 마지막에는 왕위를 두고 한바탕 다른 왕자들과 싸우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지금도, 마지막 싸움 때까지 이 파벌에서 공주는 형식적인 군주이자, 구심점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용맹을 나타내도, 훌륭한 지휘를 해도, 어린 나이는 항상 그녀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든 실속은 그레시아 공작과 다른 귀족들이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 아니 내가 그걸 그렇게 놔둘 리가 없었다.
공주가 형식적인 구심점으로 공작령에 자리 잡는 사이, 내가 다른 곳에서 공주의 세력을 키울 생각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내가 할 일도 몇 개 있었고.
마차와 일행은 이제 내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둘이 가는 건가요?”
“아뇨. 같이 갈 사람이 더 있습니다.”
뒤쪽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돌리니, 발레아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멀리, 말을 탄 사람이 비어있는 말 두 마리를 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용병? 아, 피센 후작 저택에 같이 갔었던 감정사분 아닌가요?”
발레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들을 끌고 오는 사람은 발레아의 말대로, ‘경매장 주인’이자, ‘전 신검 추적자’인 레스티아도였다.
지금은 물론, 셀린 교단의 마지막 신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