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제19편 공회 (2)
빛뿐만이 아니었다.
공주의 몸 주위로 작은 불꽃들이 피어났고, 머리카락 사이로 스파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평범한 빛이 아니었다.
다른 귀족들은 모르겠지만, 대귀족들과 왕족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새로운 후계자가 나왔다는 것을.
하지만,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금 전 동생에게 뒤통수를 맞은 제1 왕자였다.
제1 왕자가 공주를 보며, 고함을 질렀다.
“말도 안 돼. 넌 분명히 왕비의 능력을 얻었잖아! 나도, 저 녀석도 같이 봤었단 말이다!”
제1 왕자는 방금까지 싸우던 동생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제2 왕자는 형의 말에 아무 관심도 주지 않았다.
단지, 인상을 쓰며 공주를 노려볼 뿐이었다.
제1 왕자는 그전까지 쌓인 분노를 모두 토해낼 듯 소리쳤다.
“각성식 때 모두를 속였다는 말이냐! 감히, 신성한 각성식을 모독해!”
얼굴이 벌게지면서 소리치는 모습은 삼자인 내가 봐도 무척이나 섬뜩했다.
하지만, 공주는 그런 왕자를 보며 또박또박 반박했다.
“아뇨. 전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아이샤 공주는 들고 있던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서걱.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테이블 위에 있던 잔이 잘려 나갔다.
“저는 어머님의 능력도 ‘마나 감응력’도 다 가지고 있어요.”
이제 공주는 제1 왕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검 끝이 일렁이는 검을 들고, 공주는 제1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다중 능력자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설로 전해지는 정도였고, 그것도 세우타 공작 정도나 알고 있었다.
왕자들도, 다른 귀족들도 공주를 보고 기겁할 듯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놀라는 왕자나 다른 귀족들을 보고, 쓴웃음이 나왔다.
일개 조직보다 정보가 늦은 왕국이라니.
‘조직 쪽은 다중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
내게 죽은 비드라는 검사가 바로 화염과 육체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다중 능력자였다.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조직이 얼마나 대단한 집단인지 알 수 있었다.
홀 전체가 술렁였다.
갑자기 공주가 새로운 후계자로 등장한데다가, 그녀가 전설로 여겨지는 다중 능력자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으니…….
소란이 없을 리가 없었다.
다만, 공주가 ‘마나 감응력’을 얻었다 해도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전설로 전해지던 다중 능력을 지녔다 해도, 그녀는 아직 검이 질질 끌리는 11살짜리 아이였다.
각자 성인으로 세력을 일군 두 왕자에게는 감히 비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비밀로 해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지금도, 그녀 스스로 밝힌 이야기였다면, 이렇게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를 지목한 것은 그레시아 공작이었다.
소란 가운데에서도 귀족들은 그레시아 공작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언제나 왕국을 먼저 생각하고, 중립을 지켜왔다고 여겨지던 그레시아 공작이었다.
그런 공작이 공주를 지목했다는 것은 공주를 지지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두 왕자의 세력에 비해 약하긴 했지만, 이제 후계자 싸움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젠장!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회의야! 왕세자인 내가 왕위를 물려받는 게 당연한 거잖아! 좋아, 반대할 놈들은 내 동생들 뒤에 서도록 해!”
제1 왕자는 몸을 돌려, 벽에 걸린 검, ‘기사의 검’을 끌어 내렸다.
“대대로 왕세자가 들었던 이 검으로 반역자들을 모조리 쓸어줄 테니까.”
제1 왕자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 위로 치켜들었다.
부우웅.
기사의 검이 마나를 머금어 환하게 빛났다.
빛나는 검을 보고 제2 왕자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1 왕자가 갑자기 검을 끌어내릴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저렇게 막무가내로 움직일 줄이야.
문제는, 저런 생각 없는 행동이 귀족들에게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소란스러웠던 홀이 다시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제1 왕자의 손에 든 빛나는 검을 쳐다보았다.
초대 왕부터 내려오던 왕가의 상징.
왕세자가 바로 그 검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난 이 검 아래에서 맹세하겠다. 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적을 무찌르고…….”
그는 검을 들고, 왕위 계승을 하는 것처럼 열변을 토해냈다.
나는 열변을 토하는 왕세자를 보고, 몸을 돌렸다.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단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왕세자가 열어 놓은 홀의 문을 빠져나왔다.
열린 문 사이로 왕세자의 연설이 계속 들려왔다.
“……이 나라는 이 검을 든 왕의 뒤를 따라…….”
문을 지키던 기사들도 홀 안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만큼 볼만한 광경인 모양이었다.
반전의 기회가 될만한 명연설이 될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걸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나였다.
“소환!”
머릿속으로 기사의 검을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린 순간,
우우웅.
기사의 검이 내 손에 들렸다.
조금 전까지 제1 왕자의 손에 들려 빛을 뿌리던 그 검이었다.
“……검이 어디 갔어!”
연설이 멈추고, 제1 왕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난장판.
“검이 사라졌다!”
“기사의 검이 없어졌어!”
“누가 훔쳐 간 건가?”
“능력으로 훔칠 수 없는 물건 아냐?”
“다들 움직이지 마!”
“문을 닫아!”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이 열린 홀의 문을 급하게 닫았다.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검을 가슴에 밀어 넣었다.
자해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검은 가슴 안에 있는 유물 주머니에 곱게 들어갔다.
본 사람도 없고, 눈치챈 사람도 없으니 완전범죄였다.
지금 검을 빼낸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지금보다 검을 빼내기 더 좋은 순간이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공주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왕세자를 엿 먹일 수도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 일석삼조였다.
* * *
공회는 많은 이들이 예상했듯이 새로운 왕을 세우지 못하고 끝이 났다.
두 왕자 간의 내전도 공회 도중에 발표된 두 영지의 영지전으로 이미 시작되어버렸다.
새로운 왕을 세우는 공회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모두 생각한 일이었다.
하지만, 공회에서는 그 뒤로도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버리는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공주가 ‘마나 감응력’을 펼쳐 후계자를 선언한 것도, 그녀가 다중 능력자라는 것도, 그레시아 공작이 공주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까지 모든 것이 충격의 연속이었다.
거기다, 제1 왕자의 손에 들려있던 기사의 검이 사라진 것은 충격을 넘어, 모두를 두렵게 만들었다.
이렇듯, 새로운 왕을 세우는 공회는 큰 충격을 남긴 채로 끝이 났다.
귀족들은 기사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계파별로 흩어졌고, 공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집을 걸어 잠갔다.
회의가 끝나는 순간부터 수도는 터지기 직전인 도시가 되어버렸다.
집과 가게가 문을 닫고, 병사와 기사들이 살기 어린 눈을 하고 거리를 몰려다녔다.
어딘가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도시 전체가 불타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공주와 나는 긴장감이 가득 찬 도시를 가로질러, 아카데미로 향했다.
살벌한 도시와 달리, 아카데미는 아직 한적하기만 했다.
마차는 정문에서 멈추지 않고, 아카데미 안을 계속 달려 나갔다.
마차는 입학식을 했었던(내 기억 속에서는 여러 번 박살 나기도 했던), 건물을 지나, 아카데미 행정 건물에 도착했다.
공주와 나는 마차에서 내려 교무처로 향했다.
어딘가 어수선한 교무처.
나는 서류를 정리하는 직원 앞에 섰다.
“휴학을 할 생각입니다.”
“또 휴학인가요. 왜 이렇게 휴학하는 사람이 많은지…….”
고개를 들며 중얼거리던 직원은 나와 내 뒤에 선 공주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설마 공주님이 휴학을…….”
“아이샤 데 카를로스 공주님과 알렉스 데 그레시아의 휴학 신청입니다.”
공주와 나는 휴학 신청을 하기 위해 아카데미로 돌아온 것이었다.
내전이 벌어지게 될 상황에서 후계자 선언을 한 공주가 아카데미를 다닐 수는 없었다.
자퇴는 보기에 안 좋으니, 우선 휴학 신청을 할 생각이었다.
거기다, 공주를 1년 반 동안, 더 도와주기로 한 나도 휴학을 해야 했다.
다만, 아카데미에 공주가 직접 올 필요는 없었다.
그냥 안 나와도 되고, 다른 사람이 대신 휴학 신청을 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이샤 공주는 마지막으로 아카데미를 보고 싶어 했다.
1년 반의 생활이었지만, 공주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니게 된 교육기관이기 때문일 터였다.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공주와 나의 휴학 처리는 큰 문제 없이 끝났다.
교수나 학장을 보고 가달라는 부탁이 있었지만, 그런 시간을 내기는 어려웠다.
공주와 나는 행정 건물 밖으로 나와 아카데미를 둘러보았다.
넓은 부지에 많은 고색창연한 건물들.
왕국 최고의 아카데미라는 말이 무척이나 어울리는 곳이었다.
1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파란만장한 일들이 벌어진 아카데미였다.
물론, 나에게는 1년 반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지만.
교육기관답게 내 성장에 엄청나게 도움을 주었던 곳이었고, 예상과 달리 여러 인맥도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곳이었다.
휴학했지만, 아마 다시 돌아오기는 어려울 듯했다.
내전이 어떤 식으로, 언제 끝나든 간에, 공주와 내가 아카데미로 돌아오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내전 중에 이 아카데미가 멀쩡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거기다, 공주도 나도, 다른 사람들도 무사히 돌아오기를.
잠시, 어울리지 않는 소망을 되뇌고, 공주와 나는 마차로 향했다.
마차 옆에는 아는 사람, 발레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휴학은 잘했어요?”
그녀는 아카데미 제복이 아니라, 여행복을 입고 있었다.
“쉽게 해주더라고요.”
“어제 내가 휴학계를 냈을 때는 별걸 다 트집을 잡았는데……. 나도 같이 낼 걸 그랬나 봐요.”
공회가 시작되기 전, 난 몇 사람에게 공주와 내가 휴학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미로와 악셀, 아카데미 두 기사와 벤자민 선배, 글란 후배. 그리고, 발레아까지.
바로 알려질 일이니, 이야기가 퍼지지 않을 정도로 가감해서 각자에게 전해주었다.
두 기사는 바로 퇴직계를 내고, 우리 일행에 합류하기로 했고, 벤자민 선배도 늦지 않게 휴학하기로 했다.
글란 후배는 다닐 수 있는 한 계속 아카데미를 다닐 모양이었다.
그리고, 발레아는 휴학계를 내고, 이렇게 내 앞에 서 있었다.
“집에 안 가도 되겠습니까?”
“괜찮아요. 여름에 내가 할 일은 다 해놓았어요.”
발레아는 휴학하고, 공주를 돕기로 했다.
발레아 말로는 나를 돕겠다고 한 것이지만, 그게 공주를 돕는다는 말이겠지…….
나는 왜 발레아가 공주, 아니 나를 따라다니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를 죽인 남자에게 반해서인 것도 아닌 것 같았고, 쫓아다니며 복수할 기회를 노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다른 뜻이 없고, 도움이 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하지 않았다.
공주와 나, 발레아가 마차에 올랐다.
우리가 탄 마차는 왕실 마차가 아니었다.
그레시아 공작가의 마차였다.
우리는 이대로 수도에서 벗어날 예정이었다.
공회에 참석했던 공작과 시몬, 그리고, 마뉴엘도 이미 수도를 떠나는 중이었다.
이 수도는 두 왕자의 텃밭이었다.
후계자 선포를 하고 적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발레아의 짐과 내 짐, 공주의 짐은 마차 안에 있는 내 배낭에 모두 잘 들어 있었다.
마차는 우리 세 사람을 싣고, 수도의 동문으로 달려갔다.
오랫동안 보지 못할 것 같아, 우리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거리를 구경했다.
아쉽게도 거리는 적막하고, 살기가 넘쳤다.
겉보기에는 전처럼, 화려하고 멋진 거리였지만, 일반인 대신, 병사와 기사들만 보이는 거리는 무척이나 삭막해 보였다.
우리는 크게 실망하고, 창문을 닫았다.
그 와중에도 마차는 계속 달려, 동문 앞에 도착했다.
“그레시아 공작의 자제들이시다.”
마부가 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공회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검문인가?
“알겠습니다. 모두 비켜!”
다행히 검문은 없었다.
마차는 비켜선 병사들을 지나 동문을 빠져나왔다.
공주는 마차의 뒤창을 열고, 멀어지는 수도를 바라보았다.
공주가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왕비는 왕궁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왕궁에 남아 왕가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 담긴 행동이었지만, 공주로서는 왕비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발레아가 걱정하는 공주를 위로해 주었고, 나는 허공을 쳐다보았다.
메시지창이 떠 있었다.
<수도를 떠났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
새로운 시작,
앞으로 어려움과 위기가 닥칠 거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메시지였다.
나는 바로 ‘예’라고 대답했다.
“이랴!”
수도를 벗어난 마차가 동쪽으로 힘차게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