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제17편 왕의 장례식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퍼져나갔다.
상점이 문을 닫고, 조기가 걸리고, 종이 울려 왕의 죽음을 애도했다.
수도에서 파발들이 사방으로 달려 나갔고, 소식을 들은 영주와 귀족들은 수도로 출발했다.
첫날부터 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왕궁을 방문했다.
두 왕자부터 빈민층의 노인까지.
귀족들은 중앙 홀까지 들어와 왕의 죽음을 애도했고, 평민과 빈민들은 성 밖과 신전에서 기도를 올렸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상점은 문을 닫았고,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꽃들이 성벽 아래에 쌓였다.
그리고, 셋째 날.
중앙 홀에 두 왕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넷째 날에는 참배객 숫자가 확 줄어들었다.
아직도 왕궁 밖에 서서 기도를 드리는 평민들은 많았지만, 두 왕자 계파의 귀족들은 더는 홀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섯째 날.
이제 수도밖에서 찾아오는 귀족들 외에는 중앙 홀을 방문하는 귀족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여섯째 날.
그동안 자리를 지키던 종친들도 물러가고, 중앙 홀은 한가해졌다.
왕비와 공주, 두 사람만 남아 관을 지키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자는 시간,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계속 공주의 곁을 지켰다.
호위 기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왕의 죽음을 슬퍼하던 왕비와 공주도 이제는 앞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녀와 문을 지키는 기사만 남은 늦은 저녁.
왕비는 홀 구석에 서 있던 나를 불렀다. 공주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고개를 숙이자, 왕비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아직 어린 티가 많이 났었는데……. 1년 반이 지난 사이에 훌쩍 컸네요.”
16살 후반. 얼굴이 앳된 모습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봐도 어른이라 불리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나는 대답 없이 왕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동안 공주를 지키고 도와주신 것 감사드려요. 생각보다 너무 큰 도움이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일국의 왕비가 하기에는 과한 칭찬이었다.
이런 칭찬에는 대답을 잘해야 했다.
“해야 할 일이고, 약속했던 것을 지킨 것뿐입니다.”
내 대답에 왕비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처음, 왕비에게 한 약속은 공주의 졸업 때까지 지켜주겠다는 것이었다.
아카데미에 안에서만 지켜줄 생각이었는데, 지내다 보니, 공주와 같이 여러 곳을 다녔었다.
후회할 일도 아니었고, 후회할 생각도 없었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공주의 졸업은 이제 일 년 반이 채 남지 않았다.
그러면, 약속 기한도 일 년 반이 남았……. 아니, 지금 상황을 보면, 공주가 아카데미를 앞으로 제대로 다니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카데미가 앞으로 운영이 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 약속은 이제 곧 끝나는 것인가.
“앞으로도 계속 호위 기사를 맡아 달라고 하는 것은 과한 부탁이려나요.”
“네.”
왕비 앞이었지만, 이건 확실하게 해야 했다.
단호한 대답에 왕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대답은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왕비는 화를 내지 못했다.
대신 왕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공주가 졸업했을 시간인, 앞으로 1년 반 동안만이라도 공주를 도와주세요.”
이번 부탁은 바로 거절하지 못했다.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처음 부탁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냥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왕비가 말한 1년 반은 아카데미 학생 때의 1년 반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나에게도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하려고 했던 일들.
그 일들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도 한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작위를 드릴게요. 공작가에서 분리된 알렉스 공자만의 영지와 작위를.”
……나만의 작위가 있어야 했다.
내 생각과 같은 말에 나도 모르게 왕비를 쳐다보았다.
조금 바보 같은 모습이었나보다.
왕비는 내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아이샤에게 물었어요. 공자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공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것인지. 분명, 나도 얼마 전에야 떠올린 것인데.
“아이샤는 서자라는 굴레를 지우기 위해서도, 가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공자만의 가문이 필요하다고 말하더군요.”
영지와 작위를 가진 귀족은 다른 귀족들과 다른 존재였다.
그 영지 안에서는 왕과 같은 존재이며, 다른 영지와 영지전을 벌여 땅을 빼앗을 수도 있고, 자식에게 작위와 땅을 물려줄 수도 있었다.
기사단을 둘 수도 있고, 병력을 가질 수도 있었다.
다른 것보다, 그 누구도 ‘서자’라고 나를 놀릴 수 없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 바로 공주와 제 이름으로 계약을 하겠어요. 계약이 끝나면 누구도 이 약속을 뒤집을 수 없을 거예요.”
계약까지 해 주겠다니. 아무래도, 왕비의 말을 거절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만약, 내 실력을 전부 보여준다면, 두 왕자도 내게 작위를 주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왕자들이 내뱉는 말이었고,
하지만, 왕자들은 누구에게도 계약해주지 않았다.
한번 계약해버리면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보상을 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끌어모아야 하기에 약속을 남발해야 했고, 아마도 누가 승리하던 약속은 반 이상 지켜지지 않을 터였다.
역사에 나온 이야기처럼 누군가는 사냥이 끝난 개가 되어 삶아질 것이고, 누군가는 약간의 보상만 받은 채 새로운 왕에 매달리게 될 것이었다.
왕비, 아니 공주는 그만큼 나를 믿고 있다는 이야기였고, 그만큼 내게 의지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된 이상 새로운 계약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 뒤, 홀 밖으로 나갔던 공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볼일이 있어서 나간 게 아니라, 내 결정에 방해가 될까 봐서 자리를 피했던 모양이었다.
* * *
시간이 지날수록, 왕궁의 중앙 홀은 더욱 조용해졌다.
귀족들 간의 밀담과 만남이 늘고, 두 왕자 간에 암계가 수없이 벌어졌지만, 그와 비례해서 죽은 왕을 찾는 사람은 더욱 적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왕이 죽은 지 열흘째 되는 날.
먼 곳에 있는 귀족이 수도로 찾아왔다. 그레시아 공작과 후계자인 시몬 공자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왕이 누워 있는 관 옆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왕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음벽을 펼쳐서인지 둘이 나누는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공작과 같이 온 시몬 형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신기하네. 네가 이 자리에 서 있게 될 줄 생각도 못 했는데.”
공주 때문이긴 하지만, 왕의 유해를 지키는 자리에 서 있게 되다니.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드리아도 네 걱정을 많이 했어. 아만다 부인도, 네 하녀도 안부를 전해 달라더라.”
시몬은 전보다 편하게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혼해서인지, 아니면 공작위를 물려받을 게 확실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전보다 대하기 편해진 것은 나도 나쁘지 않았지만, 시몬의 입에서 흘러나온 아만다 부인이라는 말은 듣기에 거북했다.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다니.
시몬에게는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머릿속에 왕비의 제안이 다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하대를 받지 않으려면, 역시 작위가 필요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이야기는 금방 끝이 났다.
다행히 공작도 대화를 끝내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왕비와 공주님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들었다.”
“도와주는 게 아니라, 계약입니다. 1년 반 뒤에 끝나는.”
나는 공작의 말을 바로 잡았다.
내 대답에 옆에 있는 시몬이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 계약이었지. 어쨌건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겠지. 그럼 내가 왜 왔는지도 알고 있느냐? 왕비께서 말하지 않으셨다고 들었다. 설마, 왕을 추모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또 시험인가.
이제는 이런 시험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장례식이 끝난 뒤, 공회에 참석하시려고 오신 거겠죠.”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왕으로 공주님을 추대하시겠죠. 그럴 생각으로 왕비님과 손을 잡을 셨을 테니.”
내 말에 시몬 형이 깜짝 놀랐다. 시몬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공작이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전처럼 표정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꺼림직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얼굴이었다.
나를 쳐다보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학생 일과 호위만 하는 줄 알았는데, 여러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군.”
“좋은 소식통이 있습니다.”
나는 왕비 뒤에 서 있는 하녀를 슬쩍 쳐다보았다.
셀린 교단의 신도이자, 정보원인 그녀는 그동안 내게 외부 소식을 알려준 소식통이었다.
그레시아 공작이 오고, 먼 곳의 귀족까지 모두 도착한 뒤, 왕의 장례는 마지막 순서를 남겨두었다.
입관. 왕궁 뒤에 있는 왕실묘에 관을 모시는 것이었다.
그날, 왕실묘로 향하는 행렬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신관들의 엄숙한 의식과, 수많은 귀족의 행렬은 왕의 장례식 가운데 손을 꼽을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왕의 입관은 무척이나 쓸쓸했다.
귀족들도, 가족들도, 죽은 왕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두 며칠 뒤에 있을 공회를 생각하느라, 죽은 왕은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렇게 화려하고 쓸쓸한 입관이 끝나고,
이틀 뒤, 다시 귀족들이 왕궁으로 모여들었다.
다음 왕을 정하기 위한 공회가 열린 것이다.
며칠 전까지 왕의 유해가 머물렀던 중앙홀에 귀족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얼마 전에 이곳에 와서 왕의 죽음을 슬퍼하던 귀족들은 지금 욕심이 가득한 얼굴로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인 귀족들의 제일 상석에는 왕족과 대귀족들이 앉아 있었다.
중앙 옆에 제2 왕자도 앉아 있었고, 반대쪽에는 아이샤 공주와 그레시아 공작도 보였다.
나도, 이 거창한 자리에 와 있었다.
물론, 작위도 없고, 서자인 나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자리였다.
하지만, 공주의 호위 기사라는 위치 덕분에 공회를 지키는 기사들과 함께 홀 뒤쪽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정말, 개판이잖아.”
옆에서 투덜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기사단장이었다.
“일이 잘 안되시나 봐요?”
내 말에 기사단장은 말을 쏟아냈다.
“엉망인 정도가 아니야. 돌아오면 수습이 될 줄 알았거든? 근데, 수습은커녕 내가 더 엉망으로 만든 꼴이 되어버렸어. 기사단이, 반, 아니 세 갈래로 갈라질 것 같다니까.”
기사단장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비듬이 떨어질 것 같아, 나는 슬쩍 몸을 피했다.
“중립은 무슨, 줄을 서지 않으면 먹이가 될 뿐이더라고. 젠장, 영 답이 없으면 공주님 편에라도 서야 할 것 같아.”
기사단장은 농담처럼 꺼낸 말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 말 잊지 마세요. 꼭.”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쾅.
홀 문이 부서지듯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왕세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홀의 중앙의 빈자리, 기사의 검이 걸려 있는 앞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이 도착했다.
이제, 모든 배우가 한자리에 모였다.
제1 왕자와 제2 왕자, 공주와 그레시아 공작.
그리고, 나 알렉스까지.
이제, 막이 오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