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제15편 내전의 전야 (1)
소로카 요새에는 오래 있지 못했다. 수도까지의 길이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공주는 목적을 이루고, 다들 나쁘지 않은 경험을 한 덕분에, 돌아올 때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오면서 보게 된 영지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소로카 요새로 향할 때도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함이 느껴졌었지만, 이제는 그 정도를 넘어선 것 같았다.
먼저, 영지를 넘어갈 때마다 검문이 이루어졌다.
왕실 마차에 기사까지 대동한 일행이었지만, 마차 내부를 꼭 확인해야만 길을 통과시켜주었다.
거기다, 하루에 한 번 이상 길을 질주하는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영지의 경계로 군들도 움직이고 있다는 말도 들려왔고, 이제는 다들 싸울 작정으로 부대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면 왕께서 괜찮으셔도 내전은 결국 벌어지겠군.”
옆을 지나가는 징집병들을 보며 벤자민 선배가 중얼거렸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징집병들은 대부분 굳은살이 가득한 손으로 쇠스랑을 든 농사꾼들이었다.
가을이 오지 않았건만, 추수를 해야 할 농사꾼들을 징집한 것이다.
이건, 누가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임계점이 지난 상황. 누군가 불만 붙이면 터질 것 같았다.
왕실 마차를 보는 시선도 전과 달랐다.
경외는 물론이고 두려움도 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왕실의 위엄이 먹히지 않는 시절이 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공주와 왕비께서 뭔가 준비하는 것 같아서, 걱정은 덜 수 있었다.
단지, 그 협력자가 그레시아 공작가인 것 같아서 난감하긴 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손을 잡는 것을 뭐라 할 수 없었다.
내가 뭐라 할 처지도 아니었고.
다행히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마차는 수도를 향해 계속 달려갔다.
한 주가 넘게 걸려 수도에 도착해보니, 이제는 수도에도 어수선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수도에서는 소로카 요새의 승리를 알지 못했다.
아니, 다들 코앞에 닥친 일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일행과 헤어져 저택에 돌아온 뒤에도, 고용인들이 나누는 흉흉한 소문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귀족 간에 결투로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나, 누가 밤에 습격을 당해 죽었다는 등, 평상시 같으면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거기다, 영지 순례를 떠났던 둘째 형 마누엘도 좋지 못한 얼굴로 돌아와서, 저택의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혔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시간은 똑같이 흘러갔고, 아카데미 2학기가 시작되었다.
다만, 아카데미도 세상의 파도를 피해갈 수 없었다.
학생들 자리가 여러 군데 비어있었다.
여름 동안 집에 내려갔던 학생들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 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있었다.
대공녀가 보이지 않았다.
공국으로 돌아갔던 프리다 대공녀가 아카데미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안 좋은 일들은 계속 이어졌다.
첫 개인 훈련 시간에 세우타 공작에게서 훈련을 더 진행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너도 느꼈겠지만, 지금 왕국이 엉망이야. 적어도 몇 년은 버틸 줄 알았는데, 이래서야 내년에 당장 내전이 벌어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지.”
노인은 지팡이로 애꿎은 땅을 두들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왕실 기사단도 단장 놈이 열심히 추스르고 있지만, 쉽지 않아. 중립은커녕 이러다가는 갈가리 찢어질 것 같아.”
제1 왕자가 거의 차지했던 왕실 기사단은 중립인 기사단장이 오는 바람에 애매하게 되어버렸다.
거기다, 내가 퍼트린 소문은 신기하게도 계속 덩치를 불려서 왕실 기사단과 수도의 귀족들을 더 흔들어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수도의 정계는 혼란 그 자체였다.
“단장 놈이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뒷방 늙은이지만 나도 이것저것 해봐야겠지. 네놈이 올 곳은 남아 있어야 할 테니까.”
역시, 세우타 공작은 나를 기사단장 후보로 보고 있었다.
“뭐, 생각보다 가르칠 내용도 많지를 않으니, 지금 그만둬도 별 상관없을 것 같고.”
나도 아쉽긴 했지만, 세우타 공작의 말대로, 이제 배우기보다는 배운 것을 내 것으로 만들 때였다.
그렇게 마지막 훈련을 끝낸 주말 전날.
조별 과제 모임을 하기 위해 나는 항상 모이던 응접실에 와 있었다.
가장 먼저 오던 대공녀가 없으니, 응접실에는 아직 나밖에 없었다.
마나를 퍼트려 복도에서 훔쳐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제복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조금 전,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교직원 한 명이 슬쩍 넣어준 쪽지였다.
쪽지를 펼치자, 누가 보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문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 성기사님께.
언제나 여신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원하시던 정보를 전해드립니다.
그레시아 공작의 총집사와 왕비가 만난 것은 확인했습니다.
아쉽게도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 뒤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그레시아 공작과 왕비가 정략적인 협력을 하기로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왕비의 친정인 라텐하마르 백작가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공작가의 총집사도 수도의 여러 귀족 가문에 들린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왕비와 그레시아 공작이 손을 잡고, 내전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을 생각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왕비도 그레시아 공작도 왜 서로 손을 잡았는지는 의문입니다.
공주님이 왕실의 상속능력인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그녀는 왕비의 능력을 물려받았습니다.
아쉽게도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는 공주를 중심으로 모이기에는 구심점이 너무 약해 보입니다.
신관 레스티아도.
추신 1: 성기사님의 가문과 공주님에 대한 이야기라, 뒤에 저희가 분석한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면, 다음에는 넣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추신 2: 편지는 다 읽고 없애주시기를 바랍니다. ]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더니, 다 들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동안, 경매장 주인에게 들었던 정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이건, 경매장에 오는 귀족들의 말을 귀동냥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곳곳에 숨어있는 신도들의 이야기를 모아 정보를 합쳐서 분석과 가공까지 할 수 있는 엄청난 정보집단이었다.
공주가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 완전히 분석에는 실패했지만, 조금 더 파고들면 공주가 ‘마나 감응력’을 알고 있다는 것까지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셀렌교의 대단함에 감탄을 하고, 나는 편지의 내용을 다시 살폈다.
그레시아 공작과 왕비가 손을 잡았다는 내용.
쪽지는 내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렇다면 공주가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공작도 알게 되었다는 말인데…….’
그렇지 않으면 그 공작이 왕비와 손을 잡았을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공작이 손을 잡은 것이라면, 공작은 아이샤 공주를 왕위에 올려놓을 생각일지도 몰랐다.
내전에 승리해 두 왕자를 쓰러뜨리면, 공작 중 하나가 아니라 왕국의 실세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아니면, 한발 더 나아가서 외척이 되어 왕국을 좌지우지할 생각일지도 몰랐다.
첫째 시몬은 결혼했으니, 둘째 마누엘과 공주를 결혼시키면, 어린 공주의 후견인이 되어 카를로스 왕국을 손에 쥘 수도 있을 터였다.
공작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레시아 공작이 가담했다면, 사돈인 이에로 후작가도 참가했을 테고, 거기다, 왕비 가문인 라텐하마르 백작가도 움직이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쪽도 작지 않은 세력이었다.
삼파전인가?
아니, 사파전이었다.
공국에서 돌아오지 못한 대공녀를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주의 호위 기사지만, 대공녀를 아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아직 구슬을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 공국으로 쳐들어가서 대공녀만 둘러업고 나와야 할 것 같았다.
이리저리 방법을 고민하는 동안, 퍼트린 감각에 사람이 느껴졌다.
발레아였다.
나는 쪽지를 움켜쥐고 마나를 집중했다.
화르르르.
쪽지가 손안에서 불타올랐다.
그동안 훈련으로 가능해진 조잡한 기술이었다.
처음 성공했을 때, 전생에 무협지에서 보았던 ‘삼매 진화’와 비슷해서 혼자 기뻐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는 이런 불꽃을 수십 배 크고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물을 쓰면 평범한 사람도 이런 불꽃을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전생에 라이터 대신에 손가락에서 불꽃을 피울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발레아가 들어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자세요? 프리다 대공녀님은 어디에…….”
말을 하다 말고, 혀를 내밀었다.
“아, 안 오셨지.”
귀족이 혀를 내밀다니.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나와 있을 때만 하는 행동이라, 주의를 시키기도 어려웠다.
발레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손을 모으고 나를 쳐다봤다.
그동안 서로 바빠서 따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2학기에 둘만 처음 만나는 시간. 나는 발레아가 무슨 말을 꺼낼지 무서워졌다.
발레아가 입을 열었다.
“소로카 요새 이야기는 들었어요. 거기서도 대 활약을 했다면서요.”
또, 뉘앙스가 묘했다. 나는 바로 대답했다.
“정찰만 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발레아는 내 말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에, 그럴 리가요. 정찰만 했다면, 글란 공자가 비밀 계약을 할 리가 없잖아요?”
정말 깜짝 놀라버렸다. 이건 정말 회심의 일격을 맞은 기분이었다.
“설마, 글란에게 들었습니까?”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반쯤 수긍하는 대답을 해버렸다.
다행히도 발레아는 내 대답을 꼬집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들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리저리 질문하면 대답 못 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대충 어느 부분에서 막히는지, 표정이 어떤지 보면 감이 오는걸요.”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질문으로 그걸 알아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거기다, 그만큼 집요하게 후배에게 물어보다니.
나는 마음속으로 글란에게 위로를 보냈다.
다행히 발레아는 내 놀란 얼굴에 만족한 것 같았다.
설마, 내 놀란 얼굴을 보려고 글란에게 질문을 해댄 걸까?
발레아는 영지에 갔었던 일을 열심히 떠들었다.
“우리 남작 대리님이 조금 성장하신 것 같단 말이에요. 그럭저럭 영지도 괜찮아진 것 같고. 다음에는 내려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요. 거기다, 엄마는…….”
다행히, 영지에 갔던 일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발레아가 떠드는 말을 듣고 있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폭이 좁은, 하지만, 서두르는 발소리였다.
공주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왜 서두르는 걸까?
벌컥.
문이 활짝 열리고, 공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공주님.”
발레아도 놀라, 말을 멈추었다.
공주는 내가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지금, 왕궁으로 가야 해요.”
여기에 와서 저 말을 했다는 것은, 나도 같이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왕궁으로 나와 같이 가야 할 일이 무엇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바로 풀렸다.
공주가 왜 가야 하는지 바로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왕, 아버지가 위독하시데요…….”
“헉…….”
발레아가 놀라, 입을 막았다.
나도 놀랐다.
왕이 위독하다니, 너무 빨랐다.
아직 결정도, 준비도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가슴에 손을 넣어, 대검을 뽑아냈다.
공주와 발레아의 눈이 커졌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숨길 때가 아니었다.
공주가 제일 위험한 시기.
이제, 호위 기사 임무를 수행할 때였다.
나는 검을 들고, 공주에게 말했다.
“제가 왕궁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