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237화 (237/563)

제237화

제12편 마물 몰이 (1)

시체가 차례로 배낭 안으로 사라졌다.

벌써 시체 수십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배낭은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순식간에 깨끗해지는 숙영지.

근처에 아직 몇 마리 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부서진 천막까지 치워버리니, 이곳에서 기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기 어려웠다.

배낭이 가득 차자, 글란은 배낭을 짊어졌다.

이제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할 일을 잘하는 후배였다.

이제 저 후배도 단도리를 쳐놓을 때가 되었다.

이 협곡에도 슬슬 해가 비치고 있었다.

밤에 레인저들에게 듣기로는 오늘 오후 마물들이 이곳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물론, 그 레인저들은 저 배낭 속에 같이 들어가 있었다.

마물이 도착하기 전에 준비를 끝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나는 글란을 불렀다.

“네?”

글란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후배는 지난밤보다 나를 더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배낭을 받아 등에 멨다.

그리고, 후배에게 말했다.

“후배가 그동안 내가 벌인 일을 봤잖아. 얼마 전에 물어본 것처럼 내가 벌인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도 충분히 예상할 테고.”

꿀꺽.

내 말에 글란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다들 죽었으니, 이제 내가 벌인 일을 아는 사람은 나하고 후배밖에 없고.”

“……설마, 저도 죽이실 건가요?”

후배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변했다.

죽이지 않아도 겁에 질려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빨리,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안 죽여. 대신, 비밀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받아야겠어.”

“아, 그럼 돌아가면 바로 신전에서 비밀을 지키겠다는 계약을 하겠습니다.”

“그럴 것까지는 없고.”

신전도 이제는 믿기 어려웠고, 신전에서 계약하기 전에 후배가 소문을 낼 수도 있었다.

물론, 저 얼굴을 보니, 얼마 동안은 입도 꿈쩍 안 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보안은 철저하게 지키는 편이 좋았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에서 꺼내, 바닥에 거꾸로 꾹 박아넣었다.

나는 손잡이 끝에 손을 올린 채로, 글란에게 말했다.

“여기 손을 올리고 맹세해. 이곳에서 본 것을 내가 허락한 곳 이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글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검 손잡이를 잡았다.

계약도 아니고, 단지 검에 손을 올리고 맹세하라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릴 만했다.

그래도,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냉큼 내 말대로 맹세했다.

“알렉스 선배가 허락한 곳 이외에는 이곳에서 본 모든 일을 비밀로 간직하겠다고 맹세합니다.”

깔끔한 맹세.

그리고, 깔끔한 계약이었다.

검 끝에 얹은 손에서 검으로 마나가 흘러나갔다.

우우우웅.

신검이 작게 떨리고, 후배의 눈이 커졌다.

“설마……. 계약?”

글란도 느낀 모양이었다.

진동이 멈추고 나는 신검을 뽑아 다시 허리에 찼다.

성기사의 신검도 제 몫을 톡톡히 했다.

나를 보는 글란의 표정이 달라졌다.

무서워하는 표정에서 이제는 선망의 얼굴로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든 틀릴 테니, 비밀이나 잘 지켜.”

“네, 넵!”

역시 뭔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 했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계약도 했으니, 안심하고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지시를 받은 글란이 모습을 감추고 남쪽으로 달리는 것을 확인한 뒤에, 나도 배낭을 메고, 북쪽으로 향했다.

협곡으로 나온 기사들을 지워버렸으니, 이제 제국 요새를 구경할 때였다.

파박.

나는 양쪽에 바위 절벽이 높게 세워진 황량한 협곡을 달려 나갔다.

* * *

소로카 요새의 북쪽 성벽.

협곡을 틀어막는 형태로 세워진 성벽 앞에 소년이 나타났다.

허공에서 튀어나온 소년이었지만,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놀라지 않았다.

“글란 공자님이시다! 문 열어!”

그들은 바로 성문을 끌어올렸다.

그그그긍.

무거운 쇠문이 위로 들리기 시작했다.

“이랴!”

문이 다 열리기 전에 안에서 말을 탄 소녀가 달려 나왔다.

덩치 큰 말에 비해 작은 소녀였지만, 소녀의 장비와 기세는 여느 기사 못지않았다.

아이샤 공주였다.

그녀는 전날 협곡으로 나간 알렉스가 걱정되어 성벽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됐나요?”

“헉, 헉. 아. 아. 괜찮네.”

글란은 숨을 가다듬고, 공주를 보며 말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역시 공주에게는 말할 수 있었다.

공주는 알렉스 선배가 알려도 된다고 했던 사람. 계약에는 문제가 없었다.

“협곡은 비었습니다. 알렉스 선배가 싹 정리했습니다.”

글란의 말에 공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알렉스가 준 검을 뽑아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성벽 위를 향해 외쳤다.

“협곡이 빈 것을 확인했습니다. 마물이 오기 전에 미리 가 있어야 합니다!”

성벽 위에는 바도르 백작이 올라와 있었다.

그는 공주의 말을 듣고,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가 쳐다보자 아들이 고개를 움찔거렸다. 뭔가 마음대로 안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상한 행동이었지만, 아들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공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말이 사실이라는 이야기였다.

반항적인 아들이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협곡이 비다니, 설마, 제국에 내란이라도 일어났다는 걸까?

어제 그레시아 공작의 서자, 아니 아들인 알렉스 기사가 출발하기 전, 그는 한 가지 제안을 했었다.

혹시라도 협곡이 비어있다면, 요새에 있는 병력을 보내, 마물들을 북쪽, 제국 쪽으로 밀어 올리자는 이야기였다.

물론, 제국에서 협곡을 장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었다.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공주도 알렉스의 말에 찬성했고, 그도 들은 말이 있었기에, 그의 말에 동의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슨 이유건, 이런 기회가 왔는데 놓칠 수는 없었다.

그가 뒤를 향해 크게 외쳤다.

“협곡이 비었다! 요새 기사단 출동하라!”

와아!

성벽 뒤에서 함성이 일고, 잠시 뒤, 성문을 통해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모여있던 기사들이었다.

그동안 계속 방어만 했었던 설움을 터트리기라도 하듯이, 기사들은 힘차게 말을 달렸다.

“공주님보다 느린 놈들은 대련 10시간 추가다!”

선임 기사들이 고함을 질렀고, 기사들은 앞서 달려가는 공주의 뒤를 따라, 협곡을 질주했다.

* * *

글란이 소로카 요새에 도착했을 무렵, 나는 한참 제국 요새를 살피고 있었다.

절벽 중턱에 올라가 살펴본 제국 요새는, 남쪽의 요새 도시와 달리, 전형적인 성곽 요새였다.

외성과 내성, 성이 이중으로 세워진 요새이고, 외성의 남쪽 성벽이 협곡을 막아서고 있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병사들은, 마물들이 오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군기가 꽉 잡혀 있었다.

기사들은 모두 처리했지만, 상속능력을 가진 장교들은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들키지 않고, 성문을 열어놓거나 하는 짓은 어려울 것 같았다.

아쉽지만, 이대로 물러서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숨어 있던 절벽의 바위틈에서 물러서려 할 때, 성벽 위로 한 사람이 올라왔다.

제복을 입은 것을 보니, 장교가 분명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협곡을 보며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나로 귀를 강화해도 들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입 모양은 확인할 수 있었다.

‘사령관…….’

‘연락…… 없어…….’

‘정찰병을…….’

몇 마디밖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몇 마디가 사람을 고민하게 했다.

저 장교는 생각보다, 높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기사들이 없는 요새에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거기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기사단이 사라진 것을 들킬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 얻게 된 검기가 닿기에는 너무 먼 거리.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가슴에 있는 유물 주머니에서 석궁, 아니 쇠뇌를 꺼냈다.

검게 칠해진 화살과 쇠뇌.

유물 화살과 쇠뇌였다.

절대로 목표를 놓치지 않는 내 비밀 병기.

일회용이라 사용한 뒤에는 매번 대공녀에게 부탁해서 수리해야 했지만, 멀리서 사람을 죽이는 데는 이만한 게 없었다.

쇠뇌를 치켜들고, 성벽 위의 장교를 겨누었다.

장교의 가슴이 정확하게 가늠자에 들어온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풋.

쏘는 사람도 겨우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

하지만, 검은 화살은 번개처럼 성벽을 향해 날아갔다.

퍼석.

당연하게도 쇠뇌는 또 부서져 버렸다.

부서진 모양을 보니, 이제 고쳐 쓰는 것도 몇 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부서진 쇠뇌에는 신경을 끊고, 성벽 위를 노려보았다.

퍽!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마치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난간 위로 몸을 내밀고 있던 장교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아래로 떨어졌다.

퍼억.

이어서, 십여 미터 아래의 바닥에 장교가 충돌했다.

장교도 상속능력자이니, 이 정도 높이면 충분히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떨어지기 전에 이미 죽어 있었다.

성벽 위에는 소란이 일었고, 성문이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쓰러져있는 장교를 보며 속으로 말했다.

‘소환.’

내가 말하는 순간, 장교의 몸을 뚫고, 등 뒤로 빠져나와 있던 화살이 사라졌다.

팟!

동시에 내 손 위에 검은 화살이 나타났다.

여러 번 사용한 덕분인지, 얼마 전부터 이 쇠뇌와 화살도 내 소유로 인정되었다.

당연히 소환도 가능해졌고, 이렇게 증거를 없애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성벽 앞은 내 생각보다 훨씬 소란스러웠다.

병사들이 뛰쳐나와 장교를 확인하고, 성벽 위에서도 병사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역시, 높은 자리에 있는 장교가 분명했다.

거기다, 병사들이 나오느라,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지금이라면, 성문을 여닫는 장치를 부술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문제는 병사와 장교가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들킬 것 같았다.

아쉽지만,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였다.

화살과 부서진 쇠뇌를 챙겨 유물 주머니에 넣고, 등에 멘 배낭도 확인한 뒤에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 * *

시간이 흘러, 이제는 양쪽 절벽 사이로 해가 비추고 있었다.

정오였다.

나는 협곡의 중앙, 마지막에 처리한 숙영지가 있던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기사단이 남쪽 봉쇄 지역에 도착해 있습니다. 공주님도 오셨고요.”

땀을 뻘뻘 흘리며 글란이 내게 보고했다.

반나절 만에 소로카 요새를 다녀왔으니, 힘든 게 당연했다.

하지만, 글란은 쉬지도 않고 딴짓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명령에 따라 움직여주었다.

여태껏 살펴본 바로는 좋은 부하가 될 후배였다.

이렇게 착하고 성실한 학생이 왜 아버지와 싸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기사단이 있는 남쪽, 그리고 내가 있는 중앙. 마물이 몰려오는 세 지역 중에 두 곳을 막아섰다.

나머지 한 곳은 막지 못했지만, 그쪽은 어차피 북부 산맥의 북쪽 지류, 제국 방향이었다.

막을 수도, 막을 생각도 없었다.

내가 절벽을 바라보며 무기를 점검하고 있자, 글란이 물었다.

“여기는 우리 두 명밖에 없는 건가요?”

“왜 무서워?”

“아뇨. 선배님이 있는데 무섭긴요. 용이 옆에 있는데 도마뱀이 무서울까요. 무서운 것은 어젯밤에 전부 경험해봤어요.”

두 명이 마물들을 막아내야 한다는 말에도 글란은 놀라지 않았다.

밤과 달라진 글란을 보며 피식 웃고 있는데, 멀리서 마나가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우우우웅.

강하지 않지만, 수많은 변형된 마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어서, 바위산 위로 봉화가 피어올랐다.

“왔다!”

마물들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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