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236화 (236/563)

제236화

제11편 협곡 전투 (2)

백작은 협곡을 정찰하겠다는 말에 자기 아들을 안내로 붙여주었다.

반항하는 아들의 버릇을 고쳐주려는 생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협곡 안내역으로 글란보다 더 좋은 사람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협곡이 제 놀이터여서 모르는 곳이 없습니다.”

글란의 상속능력인, 일종의 투명화 능력 덕분에, 글란은 이 위험한 협곡을 마음대로 돌아다녔던 것이다.

다만, 그 능력은 정찰과 침투에는 좋지만 싸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능력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인 백작과 티격태격하는 모양이었고.

그래도, 백작에게 안내하라는 말을 듣고 무척이나 신나 보였던 글란이었다.

그랬던 글란이 지금은 겁에 질린 얼굴로 지름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는 등에 진 배낭이 무거운지 자꾸 배낭을 추슬렀다.

그동안, 제국 기사들에게 들키지 않고, 두 숙영지를 몰살시킨 것도 글란의 길 안내 덕분이었다.

나 혼자 움직였으면, 분명 들켰을 게 분명했다.

도움에 감사하는 의미로 긴장도 풀어줄 겸 글란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시체를 본 게 처음이야?”

“아, 아닙니다. 마물 사체도 보았고, 죽은 사람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는 소리였다. 무서워하는 게 당연했다.

아무래도 질문을 잘못한 모양이었다.

더 긴장하는 것을 보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데리고 다니기에는 이쪽이 더 편한 것 같았다.

그래도, 내 질문 덕분인지, 글란이 입을 열었다.

“선배에 대한 소문은 듣기는 했는데, 이 정도라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무슨 소문이었는데?”

“희대의 카사노바라는 소리도 있고. 마검의 소유자라는 말도 있는…….”

괜히 물어봤다. 뒤로 갈수록 어처구니없는 유언비어가 튀어나왔다.

나는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다.

“앗, 죄송합니다.”

글란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내게 사과했다.

소문이 그렇게 났으니, 할 말이 없었다.

다시, 말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글란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숨은 제가 보이시는 건가요?”

글란이 몸을 숨겼을 때마다, 내가 매번 찾아냈으니, 궁금한 게 당연했다.

나는 글란이 보여준 투명화 능력의 약점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전부 숨기지는 못하던데? 바람도 돌아가고, 바닥에 흔적도 남고.”

눈에 안 보이는 것처럼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것도 힌트가 될 수 있었다.

“바람 소리나 다른 소리들이 네가 있는 곳을 지날 때는 소리가 줄어들어.”

물론, 그렇게 찾기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지금 같은 밤이면 나도 찾기 어려웠다.

실제로, 내가 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마나 때문이었다.

마나를 보고 느낄 수 있는 나에게 투명화 능력은 은신 능력과 다르지 않았다.

마나가 뻔히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건 말해줄 수 없었다.

글란은 내 설명에 나를 더 괴물처럼 쳐다보았다.

글란의 시선은 이상할 게 없었다.

나 같아도 그런 정보만으로 이런 밤에 글란을 찾아낼 수 있다면 괴물처럼 바라볼 자신이 있었다.

그제야, 조금 무서운 게 덜해졌는지, 글란이 다시 물어봤다.

“그런데, 이렇게 다 죽여도 되나요? 아니, 제국 기사들을 죽이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고요. 하지만, 이렇게 죽였다가는 국제관계가…….”

글란은 중간에 논리가 꼬이는지 말이 이리저리 어긋나 버렸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제국은 이 대륙의 최강자.

이 일을 빌미로 어떤 일을 벌이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글란은 질풍노도 시기의 소년이었지만, 귀족답게 정치와 국제관계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글란 말대로 제국이 이 일을 알아차린다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 왕국에서 납치에 살인, 실험과 폭탄 테러까지 벌이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제국이었지만,

자기들 기사단이 왕국 기사 손에 전멸한 것을 알게 된다면 병력을 이끌고 왕국으로 밀고 들어올 수도 있었다.

‘기사단을 죽인 자의 목을 내놓아라!’

라는 구호를 외치겠지.

전형적인 내로남불, 아전인수였지만, 전생을 떠올려보아도, 최강국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면 그렇겠지. 하지만, 모르면 그만이잖아.”

의심만 들어도 난리를 칠 제국이었지만, 의심도 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배낭을 가리켰고, 글란은 등에 진 배낭을 흘낏 쳐다보고는 다시 공포에 질려버렸다.

배낭 안에는 내가 여태 죽인 기사의 시체들이 전부 들어 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숙영지에서 죽인 기사 전부와 경계를 서던 수련 기사, 그리고 전령과 레인저들까지. 모두 저 배낭에 담겨있었다.

이제 이 협곡에는 내가 죽인 시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시체가 없고, 내일 마물들이 협곡을 쓸고 지나가면, 사람들은 기사들을 죽인 게 마물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온 파견 수업 학생이 기사단을 몰살시켰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평범한 적이었으면 이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차르 제국이었다.

차르 제국에게는 갚을 빚이 무척이나 많았다.

내 고생의 상당 부분은 차르 제국 때문이었고, 제국 때문에 죽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회가 왔으니 제대로 갚아줄 생각이었다.

멀리, 마지막 남은 기사단의 숙영지가 보였다.

천천히 걸어와서인지, 슬슬 어둠이 물러가는 중이었다.

협곡 안은 아직 어두웠지만, 멀리 산맥 위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기사단은 모두 무장을 한 채로 주변을 경계했다.

기사단은 제대로 무장을 갖추었지만, 주변은 그렇지 않았다.

천막들은 부서져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말들은 풀어놓았는지,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주변 모습은 기사단이 얼마나 급하게 움직였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기사단은 지금도 열심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지만, 긴장이 풀리고 있는 게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마나를 가진 기사라도, 밤새 경계를 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보이지 않는 습격자가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믿게 된다면,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을 확인하고, 글란에게 지시를 내렸다.

“부를 때까지 숨어있어.”

“알겠습니다.”

내 말에 배낭을 등에 멘 채로 글란이 사라졌다. 허공에 녹아 없어지는 듯한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마나로 아직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나 이외에는 글란을 찾을 수 없었다.

오면서 몇 마디 해준 것을 벌써 보완한 모양이었다.

글란이 숨고, 나는 내 장비를 확인했다.

손에는 대검을 쥐고 있었고, 허리에는 신검을 차고 있었다.

손가락에는 유물 반지, 목에는 유물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앞의 두 숙영지에서처럼 기습은 아니었지만, 지금 가진 무기만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두 숙영지를 기습하면서 실력에 자신이 생겼다.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매번 왕국의 순위권 강자들과 싸워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객관적으로 봐도 무척이나 강한 기사이자 상속능력자였다.

평범한 기사들은 나를 막을 수 없었다.

저벅, 저벅.

나는 대검을 들고, 진형을 갖춘 기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허리에 차고 있는 신검이 더 뛰어난 유물이었지만, 난 이 대검이 더 좋았다.

아무 능력 없이 단단하기만 한 대검이었지만, 내 검술을 발휘하기에는 이 대검이 훨씬 더 좋게 느껴졌다.

“누구냐!”

뭉쳐있는 기사단 중앙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억양이 다른 목소리였다. 전생이었으면 사투리라고 했을 법한 목소리였다.

고대 제국어에서 시작되어 몇백 년 동안 갈려져 있었으니, 억양이 다들 수밖에 없었다.

아마, 더 시간이 지나면 전생의 유럽처럼 서로 다른 언어가 될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알아들을 수 있으니, 훨씬 편했다.

“알아서 뭐 하게.”

나도 고함을 질렀다.

조금 전 들은 소리와 조금 다른 억양.

카를로스 왕국의 표준어와는 또 다른 이피로스 왕국의 억양이었다.

나도 나름 천재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옆 나라 억양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혹시 기사단 중에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죄를 뒤집어씌울 나라가 있는 편이 좋았다.

내 말에 뭔가 느꼈을까?

처음 외쳤던 기사가 기사단에게 지시를 내렸다.

“강적이라고 생각하고 포위망을 만들어라! 놓치면 안 된다!”

상대는 뭔가를 느끼긴 한 것 같은데, 결론이 내 생각과 달랐다.

아무래도 내 실력을 오판한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었다.

저벅, 저벅.

나는 계속 같은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상대는 명령에 따라 진형을 확 펼쳤다. 반 원형으로 변형된 진형.

나는 그 진형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순순히 안으로 들어가자, 기사들은 나를 둘러쌌다. 기사단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고함을 질렀던, 중년의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그가 내게 물었다.

“나는 이 기사단의 단장인 롤프 자작이다. 네놈이 밤에 우리 기사단을 해친 놈이냐?”

상대의 말에 한숨이 나왔다.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적이 아니라고 하면 수긍할 것도 아닐 거면서, 거기다, 적이라면 질문 자체가 의미도 없었다.

지친 기사단원들의 기운을 북돋고 싶어서 꺼낸 말 같은데, 내가 어울려 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대검을 들고, 크게 원을 그렸다.

적에게 닿지 않는 검으로 그린 원.

다들 어리둥절했지만, 한 사람은 알아차렸다.

“피, 피해!”

단장이 바닥을 구르며 외쳤지만, 다른 기사들은 피할 수 없었다.

피가 튀고, 앞 열이 붕괴했다.

“공격! 공격해!”

쏟아지는 피를 맞으며 단장이 외치고, 뒷줄에 있던 기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선공은 내가 먼저였다.

나도 앞으로 몸을 날렸다. 검이 움직이고 또 한 명의 목이 날아갔다.

* * *

글란은 멍하니 싸움을 구경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능력이 풀려 모습이 보이는 중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수십 명대 한 명의 싸움이었다.

그것도 한 명이 수십 명을 압도하고 있는 싸움이었다.

저기 목이 잘려 나가고 있는 자들은 평범한 용병이나 병사들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항상 힘겨워하던 제국 기사들이었다.

다른 두 숙영지를 몰살시킨 것도 기겁할 정도로 놀랐지만, 그건 그래도 현실감이 있었다.

한밤중의 기습이었고, 암살 능력 같은 것이 있다면, 가능해 보이기도 하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습도 아니었고, 포위망 안에 자진해서 들어간 싸움이었다.

그런데 저런 광경이라니.

전열이 붕괴하고, 기사들은 한명 한명 목숨이 달아나고 있었다.

검을 맞댄 기사는 몇 없었다.

다들 너무 늦게 검을 휘두르고, 선배가 지나간 길에 검을 찔러댔다.

당연히 늦은 공격은 목숨으로 값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검을 맞댄 기사들도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무릎을 꿇었다.

검이 딸려가는 기사도 있고, 덩치에 안 맞게 찍어누르는 대검에 검과 함께 반으로 갈라진 기사도 있었다.

그렇게 몇 번 눈을 깜짝이니, 이미 기사단의 포위진은 붕괴되어 있었다.

“멈춰!”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중년의 기사가 몸을 날렸다.

기사단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아버지와 여러 번 싸웠던 그 자작인 건가?

하지만, 그는 아버지, 백작이 말하던 대단한 기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네놈은 악마냐!”

몇 차례 검을 버티지 못하고, 저런 말을 남기며 죽는 모습을 보면, 다른 기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가 남긴 말은 하늘을 가르는 단검을 보고, 글란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진형이 붕괴하고, 기사단장이 죽어버리자, 뒤에 있던 수련 기사들이 버티지 못하고 등을 보이며 달아났다.

기사 중에 도망치는 사람은 없었지만, 수련 기사들은 죽음의 공포를 아직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수련 기사는 한 명도 벗어날 수 없었다.

도망치는 수련 기사에게 단도가 날아갔다.

선배의 품속에는 몇 개의 단도가 있는 건지.

단도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도망치던 수련 기사가 쓰러지자, 서 있는 것은 알렉스 선배밖에 없었다.

글란은 몸을 떨었다.

몸이 떨리는 이유가 공포인지 전율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체가 가득한 협곡에 검을 든 기사가 떠오르는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모습은 충분히 사람을 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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