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5화
제10편 협곡 전투 (1)
북부 산맥 중앙 요새.
차르 제국이 자랑하는 철벽 요새의 성벽 위에, 중년 기사가 서 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판금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는 멀리, 동쪽으로 이어진 산맥을 보고 있었다.
아니, 그는 산맥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맥 위의 하늘을 보고 있었다.
바위산 위로, 맑은 하늘 아래, 기사의 시력으로 겨우 보이는 먼 곳에서 실낱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기사가 연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물들은 내일쯤 도착하겠지?”
“이르면 내일, 늦으면 모래 정도일 것 같습니다.”
옆에 서 있던 장교 복장의 남자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준비는?”
“요새 기사단도 정비를 끝냈고, 장교들과 병사도 전투 준비를 끝냈습니다. 레인저들은 이미 산맥과 계곡에 진입해서 마물들을 유인할 준비를 끝냈습니다.”
“잘했어. 갑작스럽게 터진 일치고는 잘 준비했어.”
“겨우 시간을 맞췄습니다.”
장교의 말에 기사가 눈썹을 찡그렸다.
“요새는 정보가 너무 늦게 와서 문제야. 전에는 정보가 너무 빨리 와서 어리둥절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영 애매하단 말이지.”
“그쪽에 예언자나 미래 능력자가 있다는 풍문은 사실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사실인데, 지금은 써먹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들은 다시 연기가 솟아오르는 산맥을 쳐다보았다.
연기 아래 바위산과 그 너머 울창한 숲을 보던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북부 산맥이라, 나는 이 산맥을 북부 산맥으로 부르는 것이 아직도 마음에 안 들어.”
“고대 제국에서부터 내려오는 이름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제국이 고대 제국을 계승했는데, 이름을 바꿀 수는 없죠.”
장교의 말에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북부, 남부를 따지는 게 아니라, 그냥 마물 산맥으로 하는 게 어떠냐는 거지. 이 산맥의 쓸모가 마물 이동로 밖에 뭐가 있다고.”
“남쪽 왕국들은 제국의 침략을 막는 방파제라고들 합니다만.”
기사는 혀를 차며 남부 왕국들을 비웃었다.
“방파제는 무슨, 우리 대신에 마물들이 다 박살 내고 있는데.”
“정보부나 다른 이들의 노력 덕분입니다.”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사람들끼리 싸워야지, 이리저리 뒷공작으로 움직이는 꼴이라니.”
장교는 다른 생각이었지만, 기사, 사령관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럼, 우리도 슬슬 준비해 볼까?”
“기사단을 내보내실 생각입니까?”
“협곡을 들어오는 놈들을 아래쪽으로 내려보내야 하니까. 괜히 놓치는 놈들이 있으면 곤란하니 미리 가서 준비해야지.”
“출발하시면, 레인저들에게 연락해놓겠습니다.”
“소로카 요새가 영 엉망이라고 했지?”
“카를로스 왕국이 개판이니까요. 요새를 지키느라, 협곡으로 나오기도 어려울 겁니다.”
“백작과 협곡에서 몇 번 붙기도 했었는데……. 아쉽군.”
제국 중앙군 소속의 기사단장이자, 요새의 지휘관인 롤프 자작은 숙적과 싸우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부관이자, 군인들과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코프차는 사령관의 아쉬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리에 싸움만 가득 찬 육체 능력자들을 다루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롤프 자작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때, 연기가 피어오르는 서쪽 하늘에 연기가 하나 더 피어올랐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피어오른 봉화였다.
다음 봉화대까지 마물들이 다가온 것이었다.
“좋아, 내일이 맞아. 뒤를 부탁해.”
봉화가 피어오른 시간을 확인하고, 기사가 몸을 돌려,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알겠습니다. 뒤는 책임지겠습니다.”
부관이 뒤를 따르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정말 아까워. 육체 능력자로 각성했으면 우리 기사단 다음 단장감인데.”
“저는 장교 쪽이 좋습니다. 기사는 성향이 안 맞습니다.”
“아니, 그건 기사를 안 해봐서라니까.”
두 사람은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둘의 대화가 점점 작아지고, 결국 들리지 않게 되었다.
잠시 뒤, 성벽 아래 성문이 열리고, 사령관을 선두로, 제국 기사단이 말을 박차며 성문을 나섰다.
“죽이는 게 아니라, 몰아넣는 거다. 괜히 죽이겠다고 힘 빼는 놈들은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알겠냐!”
“네!”
사령관의 외침에 기사들은 힘차게 외쳤다.
기사단은 바위산 사이에 난 좁은 계곡, 마른 협곡 사이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부관과 사령관의 예상대로 기사단은 협곡을 가로지르는 동안 남쪽 요새의 기사들을 만나지 못했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롤프 자작은 텅 빈 협곡을 보고 혀를 찼다.
몇 년 전이었으면, 정찰을 나온 병사나 용병이라도 볼 수 있었는데, 부관 말대로 카를로스 왕국군은 소로카 요새를 지키기도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
기사단은 셋으로 나뉘어 각각 협곡에 자리를 잡았다.
북쪽과 중앙, 그리고 카를로스 왕국과 가까운 남쪽까지.
가파른 협곡이었지만, 바위산에서 내려오기 좋은 곳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곳들은 당연히 마물들이 지나가는 통로가 되었고, 차르 제국과 카를로스 왕국군은 그 통로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년 전까지의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에 숙영지를 만든다. 경계할 기사들을 뽑고, 레인저에게 연락해서 다른 숙영지 상황을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롤프 자작은 재미없는 대답만 하는 선임 기사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부관이 같이 왔으면 놀리는 재미가 있었을 텐데.
곧 있을 싸움은 기대되지만, 재미없는 부하들만 있는 것은 아쉬웠다.
자작은 마물하고만 싸우게 되는 것도 아쉬웠다.
마물 왕이라도 넘어왔으면 생사를 걸고 싸울 수 있었을 텐데…….
약한 마물들이면 양 떼 몰이 같은 재미없는 사냥이 될지도 몰랐다.
그런 아쉬움을 신도 알았을까.
그날 밤, 자작은 뒷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해가 지고, 달도 넘어간 한밤중.
롤프 자작이 속해 있던 기사단 중앙 분대는 황당한 소식에 모두 잠이 깨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경계 근무를 서던 수련 기사들이 사라졌다고?”
수련 기사가 달려와 하는 말에, 자작은 버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경계 근무를 교대하려고 갔는데, 모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암구호를 해봐도, 다른 신호를 보내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실종된 경계조가 섰던 방향은 어디지?”
“남쪽입니다.”
“동쪽 근무지에서도 수련 기사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두 명이 같이 왔는지 의아했는데, 서로 다른 위치에 배정된 수련 기사들이었다.
한 군데도 아니고, 네 방향 중에 두 곳의 경계조가 사라졌다고?
“비상이다! 모두 기상!”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다들 깨어난 것 같았지만, 자작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라면 모를까, 두 곳의 경계조가 사라졌다면, 이건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주 병력인 기사들을 쉬게 하려고, 수련 기사들에게 경계를 시킨 것이었는데, 이런 사태가 일어나다니.
“왕국 놈들이 망했다는 말에 너무 안일했어.”
자작은 천막에서 뛰쳐나온 선임 기사에게 명령했다.
“당장 레인저들을 불러! 레인저 놈들은 무슨 일인지 알아낼 수 있겠지.”
마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레인저가 된 자들이었지만, 이런 산과 숲에서 움직이는 것은 기사 이상이었다.
“알겠습니다.”
선임 기사가 품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 힘차게 불었다.
삐이이이익…….
피리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그 소리는 곧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고주파 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동물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은 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마나를 접한 자들은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레인저들도 들을 수 있는 소리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롤프 자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물이 벌써 들이닥친 건가?”
봉인지에는 별의별 마물이 다 있었다. 이렇게 밤에 습격하는 마물도 많았다.
하지만, 아직 올 때가 아니었다.
봉화나 레인저들의 말을 들어도, 내일 오후가 되어야 들이닥칠 터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적의 습격일까? 모르는 마물이 습격한 것일까?
머릿속에 여러 가정이 스쳐 갔지만, 자작은 우선 기사단을 수습했다.
“장비를 갖추고, 인원을 파악한다. 그리고, 다른 분대에 전령을 보내. 이곳 상황을 알리고 무슨 일이 없는지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기사단은 빠르게 움직였다. 수련 기사들과 종자들의 도움으로 갑옷을 입고, 천막을 걷고, 진형을 갖추었다.
그사이에 기사 두 명이 남쪽과 북쪽으로 달려갔다. 다른 분대로 가는 전령들이었다.
밤이라 두 발로 달려갔지만, 말로 달리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행히 더 없어진 사람은 없었다. 피해도 없어, 자작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전령으로 달려 나간 두 기사 중, 한 기사가 돌아오지 않았다.
북쪽에 있는 분대를 찾아간 기사였다.
그리고, 남쪽 분대로 갔던 기사는 더 엄청난 소식을 들고 왔다.
“분대가 전멸했습니다! 살아남은 기사가 없었습니다!”
자작은 전령의 말을 듣고, 전령이 돌아오지 못한 북쪽을 바라보았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깜깜한 밤이었다.
이 정도 빛이면 흑백이나마 주변을 볼 수 있는 기사들이었지만, 이동 중 습격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으득.
자작은 이를 갈았다.
“여기서 아침까지 기다린다. 해가 뜨면 뭐가 되었건 갈기갈기 뜯어버릴 테니, 모두 참아라!”
자작과 기사단은 마물 왕이든, 어느 왕국의 상속 능력자든 보이는 데로 박살 내기로 다짐했다.
* * *
자작이 이를 갈고 있을 때, 나는 한참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컥!”
대검을 휘두르니, 기사가 쓰러졌다.
어두운 밤.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기사들은 갑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있었다.
갑옷을 입고 있어도 베이는 것은 막지 못하겠지만, 이렇게 쉽게 쓸어버리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백작에게 이야기를 들은 뒤, 나는 단독 행동을 요청했다.
마물이 도착하기 전에 협곡을 정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었다.
호위 기사가 따로 행동한다는 말에 백작은 의아해했지만, 공주의 허락이 있자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마물이 도착하기 전날, 나는 이 협곡을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열심히 검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살아 있는 기사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남은 기사들이 한군데 모여 내게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어디 소속이냐! 감히 제국 기사들을 공격하다니!”
가운데 있는 기사가 내게 소리쳤다. 다른 기사들보다 강한 마나를 품고 있는 것을 보니 선임 기사인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 없이 반대편 손으로 투구를 두드렸다.
문양도 그려지지 않은 평범한 판금 갑옷을 입고 나온 게 전부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인데, 뻔한 질문에 알려 줄 리가 없었다.
“강한 상대다! 모두 협공이다!”
“네!”
기사들의 대화를 듣고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까지 싸운 것은 협공한 것이 아니었나?
물론, 진형을 갖추고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명이 함께 신나게 덤벼들었었다.
그런데 저런 소리라니.
하지만, 말을 하는 선임 기사의 눈을 보니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발이 빨라 보이는 기사 한 명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 이곳 소식을 다른 숙영지에 알릴 생각이겠지.
이미, 알려졌을 테니,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마음대로 하게 놔둘 생각도 없었다.
나는 대검을 들고, 앞으로 달려갔다.
저들과 나를 포위할 것처럼 반원으로 벌렸다. 기사들은 마나를 끌어올리고, 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한 걸음만 더 걸으면 기사들의 영역 안에 들어가게 되는 그 순간. 나는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대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부우우우웅.
어리둥절한 기사들의 표정. 하지만, 그 표정은 바로 경악으로 바뀌었다.
서걱.
기사들의 몸이 반으로 갈라진 것이었다.
“이게 무슨?”
선임 기사가 마지막 의문을 내뱉으며 바닥에 허물어졌다.
슈욱.
그 사이에 몸을 돌려 달아나는 기사가 있었지만, 단검이 날아가 기사의 목에 꽂혔다.
기사들이 쓰러진 것을 보고, 검을 거뒀다.
낮에도 보기 어려운 검기를 밤에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남은 숙영지는 하나.
강한 기사들이 꽤 보여서 건너뛴 숙영지만 남아 있었다.
그 숙영지를 지우면, 목적지까지 반은 온 셈이었다.
마나로 살아있는 기사가 없는지 확인한 뒤에 나는 같이 온 동료를 불렀다.
“가자.”
내 말에 허공이 일렁이며 사람이 튀어나왔다.
백작의 아들, 글란 후배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