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제9편 소로카 요새 (2)
갑작스러운 이웃 나라 왕자의 등장에 어리둥절했지만, 우리도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아이샤 데 카를로스입니다. 처음 뵙습니다. 바도르 백작님.”
“벤자민입니다.”
“알렉스입니다.”
공주부터 시작된 평범한 자기소개는 글란 앞에서 뚝 끊어졌다.
“…….”
결국,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자기 인사를 끝내 버렸다.
모두 황당한 눈으로 글란을 바라보았지만, 글란은 바닥을 보며 다른 이의 시선을 외면했다.
어이없는 광경이었지만, 그 모습은 전생에 보았던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10대 소년의 모습이기도 했다.
다들 황당해했지만, 나는 이쪽 세상에서 처음 보는 모습에 뭔가 그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무뚝뚝해 보이던 백작이 아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 높은 장군도 결국, 아버지였다.
백작의 한숨으로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덕분에 서로를 살피던 날카로운 긴장이 사라져버렸고, 조금 난감해하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막스 왕자님과의 이야기를 먼저 끝내야 해서…….”
조금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백작은 공주에게 양해를 부탁했다.
“그럼, 나가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저기 자리에 앉아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공주의 말에 백작은 집무실 한쪽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일종의 대기석이었지만, 구석이라도 소파는 집무실 안에 있었다.
백작의 말은 우리도 같이 들으라는 이야기였다.
이웃 나라 왕자가 왔는데, 우리를 집무실로 불러들인 이유가 뭔가 했더니, 백작은 공주에게 대화를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귀는 바짝 세웠지만, 이야기를 듣지 않는 척했다. 뻔한 행동이긴 했지만, 귀족의 예의이기도 했다.
미리 이야기가 되었었는지, 막스 왕자도 우리가 듣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얼마 전, 봉인지에 큰 혼란이 있었습니다.”
봉인지라는 말에 나와 공주는 움찔 놀랐다.
봉인지라는 말이 이웃 나라 왕자 입에서 왜 나오는 것인지.
“왕급 마물이 난동을 부려 마물들의 경계가 허물어졌습니다.”
설마? 공주가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무척 찔렸지만, 왕급 마물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마물 왕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물들이 봉인지를 빠져나오고, 대다수가 북부 산맥을 통해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벌써, 저희 왕국 산맥 근처의 영지들은 심하게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아닐 거다. 아닐 거다.
계속 주문을 외워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저건 분명 그 누더기 마물 왕이 벌인 짓일 터였다.
마물 왕과의 싸움이 봉인지 옆 나라에 피해를 주게 된다니,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내가 직접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매번 일의 여파를 걱정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니, 다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영지들이 피해를 본 것과 왕자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내 의문은 이어진 왕자의 말에 바로 풀렸다.
“이제 곧 마물들이 이곳 소로타 요새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마물들은 요새 앞 계곡을 지나서 계속 서쪽으로 가려 하겠죠.”
벤자민 선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랄맞은 때에 와버렸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것도 자업자득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지 않은 시기에 이 요새를 찾은 것 같았다.
“최대한 마물들을 막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곳에서 마물들을 막아서면 마물들이 우리 왕국으로 넘어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놀라 왕자를 쳐다보았다.
소로타 요새가 있는 곳은 북부 산맥을 가로지른 좁고 긴 계곡의 남쪽 입구였다.
그리고, 반대쪽 입구에는 제국 요새가 자리하고 있었다.
두 요새는 그동안 계곡을 순찰하면서 봉인지에서 넘어온 마물들이 더 서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런데, 마물들이 계곡을 넘어가도록 놔두라고?
계곡의 서쪽이라면 당연히 우리 왕국이 있는 곳이었다.
왕자의 말처럼, 이 계곡에서 마물들을 막아선다면, 더 이동하지 못한 마물들이 이피로스 왕국의 영지들로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냥 놔둔다면 왕국 영지가 피해를 볼 텐데?
카를로스 왕국의 요새인 소로카 요새가 그걸 방치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벤자민 선배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아직, 대화가 끝난 게 아니었다.
공주도 그냥 듣고 있는데, 먼저 나설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나라 꼴이 엉망이긴 했지만, 백작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백작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그렇게 하죠. 하지만, 제국도 보고 있고, 여기 공주님도 계시니, 완전히 열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이건 반역과 다를 바 없는 대답이었다.
왕자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처럼 식량과 다른 물품으로 보상을 하겠습니다.”
설마, 처음도 아니었던 건가?
다른 나라에서 보상을 받고, 왕국으로 향하는 마물을 지나가게 해주다니.
당장,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을 짓이었다.
나는 바로 감각과 마나를 퍼트려보았다.
하지만, 마나와 감각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무기를 든 기사도,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들도 없었다.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꺼내놓고 무방비하게 있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벤자민은 물론이고, 공주의 표정도 심각했다.
공주는 당장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공주는 끝까지 말이 없었다.
옆에 앉은 글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놀란 얼굴도 아니었다.
전부터 이 일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반항적이었던 건가?
반항하는 십 대를 생각한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던 왕자는 우리 표정을 보고는 백작에게 말했다.
백작은 고개를 저었고, 왕자는 우리에게 인사를 한 뒤에 방을 나갔다.
한바탕 코미디를 본 느낌이었다. 그것도, 뭔가 기분 나쁜 코미디였다.
왕자가 나간 뒤, 아이샤 공주가 입을 열었다.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어린 목소리였지만, 쉽게 받아넘기기 어려운 목소리이기도 했다.
백작도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백작은 자신 앞으로 우리를 불렀다.
담담한 그 모습에 끌어올리던 마나를 다시 가라앉혔다.
듣던 것보다 백작의 실력이 대단해 보였지만, 지원 병력이 없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놀라게 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따로 구질구질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모셨습니다.”
백작의 사과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설명할 차례군요.”
“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백작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오랫동안, 소로카 요새는 카를로스 왕국의 수문장으로 왕국을 지켜왔습니다. 저도 수십 년 동안 이곳에서 왕국을 지켜왔습니다.”
백작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마물과 싸우고, 제국과 싸워서 왕국을 지켜왔다.
많은 사람이 그의 행적을 존경했고, 왕국의 누구도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문제는 왕께서 쓰러진 다음부터였습니다.”
백작의 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이번 일도 쓰러진 왕 때문이었다.
이건, 전생의 영국도 아니고,
이러다가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은 쓰러진 왕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았다.
“왕이 쓰러진 뒤에 이 요새로 오는 지원이 점점 줄어들더니, 지금은 완전히 멈췄습니다.”
“네? 그럴 리가요?”
벤자민이 입을 딱 벌렸다.
“행정부가 미치지 않았다면 지원을 끊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제1 왕자님이 하신 일인지, 아니면 제2 왕자님이 하신 일인지, 그것도 아니면 두 분이 합의한 일인진 모르겠지만, 지원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백작의 말에 공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떤 이유로든, 공주에게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공주는 말없이 백작의 말을 계속 들었다.
백작은 공주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요새는 적을 막기 위한 곳입니다.”
원래 요새만 덜렁 있던 곳에 사람들이 모여 요새 도시로 커졌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주변에는 농사할 곳도 없습니다. 거기다, 저 산맥은 마물들 때문에 나무를 자르지도, 광석을 캘 수도 없습니다.”
백작의 담담했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동안의 고생이 생각난 것 같았다.
“마물의 시체를 팔고, 이피로스 왕국과의 거래를 늘려보기도 했지만, 영지민을 다 먹이고, 병사들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의 말에도 지친 기색이 묻어나왔다.
“네, 그래서 거래했습니다. 이미, 병력은 반 이상 줄어든 상황입니다. 가지고 있는 병력 전체를 쏟아부어도 이번에 마물들이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두 왕자의 갈등이 나라 전체를 망치고 있었다.
다니는 곳마다 이 꼴이니, 내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나라가 망할 것 같았다.
“남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마물을 지나가게 놔둘 수밖에 없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지만, 결국, 왕자의 말대로 마물들을 지나가게 놔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길었던 백작의 설명이 끝났다.
다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공주도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생각한 뒤에, 고개를 들고 백작에게 물었다.
“지금 말하신 내용을 이피로스의 왕자도 알고 있나요?”
공주의 말은 좀 전과 달리 조심스러웠다.
“막스 왕자도 알고 있습니다. 그도 왕세자에게 밀려 이 일을 맡게 된 것이라,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만 그쪽 왕실에 보여주면 될 뿐입니다.”
우리나라만 개판인 줄 알았는데, 이피로스 왕국도 만만치 않았다.
이웃 나라 왕자와 소로카 요새의 백작은 살아남기 위해 손을 잡은 것이었다.
실제로는 달라진 것이 없지만, 한쪽은 식량과 물자를 얻고, 다른 쪽은 왕실이 내린 임무를 수행했다는 결과를 얻게 되는 훌륭한 거래.
물론, 이 거래는 아무도 몰라야 했다.
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에게 알려주신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증언을 해줄 왕족이 필요하셨던 건가요?”
“글쎄요.”
공주의 말에 백작은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게 아니면, 저와 손을 잡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이건 어리고 가진 것 없는 제게는 무리한 이야기겠네요.”
공주가 고개를 흔들자, 백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듣던 것 이상으로 총명하시군요.”
백작의 표정을 보고, 나는 백작이 공주에게 이 사실을 알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공주를 시험하고 있었다.
과연 어린 공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얼마나 믿어야 할지, 그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말씀의 중간 어디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테스트 결과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을 믿고 공주를 테스트한 걸까?
똑똑하다는 소문이 났다고 해도 아직 어린 공주인데.
“그리고, 자네가 그레시아 공작님의 아들, 알렉스겠군.”
백작은 나도 알고 있었다.
백작의 몸에서 마나가 피어올라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마나를 숨겨 실력을 감추었지만, 백작의 말을 들으니, 소용없는 짓을 한 것 같았다.
“보기에는 약해 보이는데, 들은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라는 건가?”
백작은 나를 알고 있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정확하게.
나는 출발하기 전 수도에서 본 총집사가 생각이 났다.
그는 왕비를 만난다고 했었다.
총집사가 하는 일은 그레시아 공작이 하는 일이었다.
결국, 왕비와 그레시아 공작이 손을 잡은 것으로 봐도 되려나?
그리고, 공주가 변한 것까지.
뭔가, 공주 쪽도 움직이고 있는 걸까?
거기에 그레시아 공작가도 발을 담그고 있는 것 같고.
공주도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왕비가 벌인 일일 텐데.
이래서야, 셀린 교단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을 듯했다.
출발할 때 부탁했으니, 돌아갈 때 받을 수 있으려나.
생각을 이어가다가, 아까 궁금했던 점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백작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백작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승낙이라고 생각하고, 질문을 했다.
“왜, 북부 산맥 남쪽 나라들만 피해를 보는 겁니까? 제국이 피해를 보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건, 이피로스 왕국이 우리 요새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과 같은 이유이네. 결국, 제국이 강하기 때문이지.”
제국 군대와 기사가 더 강해서 약한 남쪽, 왕국들 쪽으로 마물이 내려온다는 이야기였다.
“우리 요새가 약해진 지금은 더 피해가 크고…….”
계곡을 틀어막은 요새 간에 격차가 커져서 남쪽, 카를로스 왕국의 피해가 더 커졌다는 말이었다.
백작의 말에 나는 슬쩍 가슴을 쓰다듬었다.
검들이 들어있는 유물 주머니가 느껴졌다.
“그럼, 제국이 약해지면, 마물들이 북쪽으로 간다는 말이군요. 북쪽 요새에 구멍을 뚫으면 마물들이 그쪽으로 몰려간다는 말이고요.”
백작은 내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물들이 몰려오긴 전에, 해놓아야 할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