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
제8편 소로카 요새 (1)
공작가의 총집사가 왕비를 만나러 온 이유도, 또, 그것을 왜 내게 알려 주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레시아 공작과 왕비 사이에 뭔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면, 공주와 연관된 이야기일 테고…….
그러면…….
아니, 정보가 부족했다. 그 뒤로는 망상이 될 뿐이었다.
총집사가 알려 줄 것 같지도 않으니, 따로 정보를 모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추측하는 것을 멈추고, 내 방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총집사가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 파견 수업이 출발하는 곳도 왕궁 앞이었다. 공주가 포함된 일행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왕궁에 도착하니, 이미 일행은 모두 도착해 있었다.
벤자민 선배도, 공주도 미리 나와 있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신입생까지.
대공녀와 발레아는 같이 갈 수 없었다.
대공녀는 일이 생겨서 공국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2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발레아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남작 대리가 열심히 수습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영지가 어수선한 모양이었다.
엄마가 아니었으면 가지 않았을 거라며 투덜거렸지만, 어쨌거나 그녀도 파견 수업에 같이 가지 못했다.
그래도, 1학년 때는 형식적이나마 다들 파견 수업에 참여했는데, 이제는 영지로 돌아갈 핑계가 되어 버렸다.
학년이 올라가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그만큼 왕국이 어지러워서일 지도 몰랐다.
같은 조원인 미리사에게도 권유해 보았지만, 그녀는 사촌인 피아르와 먼저 선약이 되었다며 사과했다.
내가 보기에는 일부러 선약을 만든 것 같았다.
하기야, 조별 과제에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같이 다니고 싶지 않을 만했다.
그들 대신, 같이 가게 된 1학년생은 조용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상속 능력 학부 학생으로 신기하게도 우리와 같이 가겠다고 지원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반쯤 겁먹은 얼굴로 내게 자신을 소개했다.
“1학년 글란 디 페이데이입니다.”
성을 들으니, 왜 우리와 같이 가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알렉스입니다. 그런데, 페이데이라면 바도르 장군과는 어떻게 됩니까?”
바도르 장군, 바도르 백작은 지금 소로카 요새를 지키고 있는 귀족이었다.
백작으로 요새 도시를 다스릴 뿐 아니라, 오랜 시간 요새를 지켜온 이름 높은 명장이었다.
지금도 파벌에 속하지 않고, 왕국을 지키는 데만 최선을 다하고 있어, 부평초처럼 살길을 찾아 나서는 다른 귀족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고 있었다.
“아버님이십니다.”
예상은 했지만, 이쪽도 편법으로 집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에 안 드는 멤버는 아니었다.
바도르 백작의 아들이면, 백작에게 다가가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인맥이었다.
공주가 왜 이 소년을 일행에 포함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그리고 존댓말을 안 하셔도 됩니다.”
차이가 나 봐야 한두 살 차이라, 실례가 될까 봐 존댓말을 해준 것인데,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말을 놓으면 그만이었다.
“그럼, 그렇게 해.”
백작의 아들은 서자인 나를 깔보는 대신에 무서워했다.
아무래도 소문이 이상하게 난 모양이었다.
공주와 나, 벤자민 선배와 1학년 후배까지.
이렇게 네 명이 이번 파견 수업의 같은 조원이었다.
그렇지만, 공주가 움직이는데, 우리만 갈 리가 없었다.
마차 둘에 하녀 두 명, 그리고, 기사 둘이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두 명의 기사는 왕실 기사가 아니었다.
미로 기사와 악셀 기사. 두 아카데미 기사가 처음으로 공주를 수행하게 되었다.
아직 퇴직 전이라, 같이 가게 된 게 신기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별거 없었다.
요새나 외지로 파견 수업을 하러 가게 될 때는 아카데미 기사들도 따라가는 모양이었다.
다들 짐을 싣고, 나도 마차에 올라타려 할 때, 하녀 한 명이 다가와 내 배낭을 달라고 했다.
“제가 싣겠습니다.”
짐을 따로 싣는 게 당연했지만, 내 배낭은 평범한 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주와 같이 다녔던 하녀들은 내가 배낭을 지니고 다닌다는 것을 알 텐데?
의아해서 하녀를 바라보니, 하녀가 손을 들어, 가슴에 반달 모양으로 선을 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고 했는데, 결국 따라온 모양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검, ‘성기사의 신검’을 성물로 삼고 있던 종교는 달과 밤의 여신 ‘셀린’을 믿는 종교였다.
당연히 경매장 주인, ‘신검 추적자’가 믿는 신도 셀린이었다.
수백 년 동안 교단을 피해 종교를 지켜온 그들이었고, 그들은 교단에게 들키지 않고, 서로를 알아볼 방법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방금 하녀가 손으로 그은 반달 표식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신도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들었지만, 왕실 하녀 중에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왕실 하녀 정도라면 귀족도 많고, 귀족이 아니더라도 있는 집 자식일 터였다.
‘신검 추적자’도 귀족이고, 교인 중에 왕실 하녀도 있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훨씬 교세가 대단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곳에서 일하던 아이라 사정을 몰랐습니다.”
내가 하녀를 보고 있자, 다른 하녀가 와서 내게 사과를 했다.
공주의 전속 하녀였다. 매번 같이 다녀서 그녀는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알렉스 공자님은 직접 배낭을 챙기십니다. 사과하고 뒤쪽 마차로 오세요.”
배낭을 달라고 했던 하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거나, 궁금한 게 있으시면 다른 때라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사죄에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녀를 용서한다는 뜻으로 보였겠지만, 사실은 그녀의 마지막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게 있었다.
나는 방음벽을 펼치고, 몸을 돌리는 하녀에게 말했다.
“그레시아 공작가의 총집사가 왕비님을 보러 왔다는데, 무슨 일인지 알았으면 합니다.”
하녀는 마차로 돌아가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다시 방음벽을 걷었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만남도 끝이 나고, 우리는 요새를 향해 출발했다.
수도에서 소로카 요새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그레시아 공작령보다 먼 거리라, 마차는 쉴 틈 없이 계속 달렸다.
지나가면서 본 영지들은 작년과 달리, 무척이나 조용했다.
강도와 도둑도 보이지 않았고, 길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대신, 훈련이 끝나서인지 병사와 기사들이 떼지어 돌아다녔다.
지나가는 영지들마다 긴장감이 가득했다.
누군가 건드리면 빵하고 터질 것 같은 그런 느낌,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 왕실 마차가 지나가도 저택으로 초대하는 영주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왕실 문양이 새겨진 마차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없었다.
영지들을 지나갈수록 공주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나이답지 않게 똑똑한 공주였다.
공주는 분위기를 느낀 것만으로도 상황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이상 영지들을 가로질러, 왕국의 동북쪽 끝, 소로카 요새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맥 아래에 자리 잡은 거대한 요새 도시.
요새 도시를 향해 달리는 마차의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멀리, 북쪽 하늘 아래 동서로 끊임없이 이어진 긴 산맥이 보였다.
수천 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고 험한 산맥이었다.
저 산맥이 바로 대륙을 가로지르는 북부 산맥이었다.
차르 제국이 다른 왕국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방파제 역할을 하는 고마운 산맥이기도 했지만, 봉인지 마물들이 왕국들로 넘어오게 하는 길이기도 했다.
저 북부 산맥의 지류에 불과한 작은 산맥 때문에, 우리 영지도 겨울에 무척이나 고생했었다.
마차가 요새로 다가갈수록 길은 더 험해졌다.
구릉이 이어지고, 앞을 가로막은 언덕과 절벽 때문에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이렇게 험난한 길 덕분에 소로카 요새가 수백 년 동안 점령되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요새라고 했지만, 소로카 요새는 거대한 성이었다.
공국에서 보았던 곳곳이 무너진 성이 아니라, 제대로 관리된 튼튼하고 높은 성이었다.
성은 절벽에 가까운 바위산들 옆에 붙어 있었다.
마차에서 보니, 산맥으로 이어진 바위산 중간 빈 곳에 성이 끼어있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차는 철저한 검문을 받은 뒤,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영지와 달리, 이곳은 아직도 군령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었다.
* * *
도시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레시아 공작령은 물론, 피센 후작의 광산 도시보다 작아 보였다.
하지만, 고급 주택가를 제외하면 오밀조밀하게 있을 것은 다 있는 것 같았다.
마차는 도시 중앙에 있는 내성으로 향했다.
요새로 만들어진 도시였기에, 영주의 저택 대신에 튼튼한 내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요새 도시를 가로지른 마차는 내성 앞에 멈춰 섰다.
외성에서 연락했는지, 기사가 나와 있었다.
“공주님과 일행 3명, 파견 수업을 오신 분들이 맞습니까?”
마차에서 내린 우리가 기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장군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십시오.”
기사는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걸어갔고, 우리는 짐을 하녀와 기사들에게 맡기고 뒤를 따라가야 했다.
“저는 안 봬도 될 것 같은데요…….”
그때, 같이 움직이던 백작 아들, 글란이 기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글란과는 오랫동안 말을 나눈 끝에 어느 정도 친해질 수 있었다.
글란은 첫인상과 달리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신입생이었다.
조용한 성격에, 기사를 조금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건 아버지와 답답한 요새 생활의 반감인 모양이었다.
아직, 정신적으로 조금 어린 것 같았지만, 아직 10대 중반, 어린 게 당연했다.
거기다, 성격도 나쁘지 않아, 벤자민 선배와도 꽤 친해졌다.
문제는 글란이 생각보다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
이번에도 기사의 말에 그가 제일 먼저 물어보았다.
“안 됩니다. 전부 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바로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도 백작의 아들인데 저렇게 한 방에 거절하다니.
역시 군기가 칼같이 살아 있었다. 물론, 다르게 보면, 무척이나 고지식했다.
우리는 내성의 홀을 지나 복도를 걸었다.
성 내부는 무척이나 살벌하고 황량했다.
중앙 홀도, 복도에도 그림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조각이 몇 군데 세워져 있었지만, 그것도 살벌한 마물을 조각한 것이었다.
중요한 요새이긴 했지만, 내성도 이렇게 살벌하다니.
화려하고 낭비가 심한 저택도 보기에 안 좋았지만, 이렇게 황량한 것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곧 만나게 될 백작이 다른 의미로 무척이나 걱정되었다.
집무실은 따로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기사는 문을 두드린 뒤에 집무실 문을 열었고, 집무실 안에는 두 남자가 보였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남자와 젊은 남자였다.
젊은 남자가 백작일 리가 없으니, 저 중년의 남자가 백작일 터였다.
백작은 아들과 달리, 무척이나 무뚝뚝해 보이는 귀족이었다.
다른 기사들처럼 큰 덩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안은 전부 단단한 근육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제가 바도르 백작입니다.”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에 들어온 공주에게 인사를 했다.
공주가 대표로 답례를 했다.
그리고, 백작은 이야기를 나누던 젊은 남자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갑작스러운 소개에 의아해했지만, 소개를 들으니, 그가 소개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이피로스 왕국의 왕자이십니다.”
“이피로스 왕가의 둘째, 막스 이피로스입니다.”
잘생긴 왕자가 우리에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