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제6편 성기사 (1)
메시지창을 보고 바로 정보창을 확인했다.
-사자 회귀: 레벨 3
메시지창에 적혀 있는 대로 사자 회귀의 레벨이 올라가 있었다.
레벨이 오르긴 했는데, 뭐가 바뀌었는지는 이번에도 알려 주지 않았다.
빨리, 구슬을 고쳐야 할 텐데.
그래도, 뜬금없이 ‘저장 시점’을 설정하라는 말이 나와서 추측은 가능했다.
이번에만 ‘저장 시점’이 생긴 게 아니라면, 큰 사건이 끝난 뒤에 ‘저장 시점’을 설정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1레벨 때처럼 자동 저장되는 방식이었으면,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가부간에 결정할 수 있는 지금은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도움이 되었다.
나는 바로 ‘네’라고 말했다.
원하던 검도 얻었고, 마물 왕과 다시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나중에 더 강해진 뒤에 싸우면 모를까, 지금은 다 살아남은 게 기적같이 여겨질 정도였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 * *
2학년 실전 수업이 끝나고, 다시 아카데미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실전 수업의 여파인지, 그동안 열심히 만들어 두었던 학생들의 호감이 처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특혜를 받아 실전 수업을 빠졌으니, 뒷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나 대공녀, 두루 인맥이 넓은 발레아에게는 뭐라 하기 어려우니, 결국, 모든 불만은 내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처음으로 돌아간 것 이상일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다 무시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싫어하는 사람도 많으니, 더 나빠졌다고 할까.
하지만, 대놓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제일 강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난 덕분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사귄 몇몇 사람들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직도 이렇게 혼자 먹고 있는 거냐?”
점심시간, 한가롭게 식사하는 도중이었다.
3학년 선배가 앞에 식판을 올리며 물었다.
하비에르 선배가 졸업한 덕분에,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친한 선배였다.
3학년 행정학부 수석, 벤자민 선배였다.
선배는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당은 언제나처럼 번잡했지만, 내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학생들이 내 옆에 앉는 것을 꺼린 탓이었다.
실전 수업 이후 꽤 시간이 지났지만, 벤자민 선배의 말대로 아직도 이 상태였다.
물론 언제나 이런 것은 아니었다. 공주나 조원들과 같이 있을 때는 북적거리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항상 조원들과 같이 다닐 수는 없었다.
거기다, 공주의 호위 기사이기도 했지만, 아카데미 안에서는 따로 다니는 일도 많았다.
발레아는 친구들이 많아 바빴고.
결국 이렇게 혼자 먹는 일이 생기곤 했다.
“선배가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이긴, 슬슬 여름 파견 수업을 할 때가 다가오잖아.”
그러고 보니, 2학년 1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실전 수업이 끝난 뒤에도, 무척이나 바빴다.
세우타 공작과의 훈련과 신검에 익숙해지는 훈련. 그리고, 왕실 기사단장과의 대련까지.
솔직히, 다른 학생들의 따돌림은 신경 쓰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벌써 여름 파견 수업. 1학기의 끝이라니.
“어디로 가게 될지 정했어?”
벤자민 선배는 자신 앞에 있는 빵을 집어 들며 물었다.
파견 수업이라.
그러고 보니, 작년 파견 수업은 공국을 다녀왔었다.
분명, 시작은 대공녀를 보기 위한 평범한 여행이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활극이 되어버리다니.
지금 생각해도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작년 파견 수업을 떠올리며, 선배의 물음에 대답했다.
“저야 어찌 되었건 공주님의 호위 기사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작년처럼 공주님이 가시는 곳을 따라갈 것 같습니다.”
그동안 조별 과제에서 대공녀와 내 뜻을 따라 목적지를 정했었다.
이번 파견 수업은 호위 기사 위치에 맞게 공주를 따라다닐 생각이었다.
선배의 질문을 계속 들으니,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공주님은 소로카 요새를 가실 생각인 것 같습니다.”
“소로카 요새?”
벤자민은 눈썹을 오므렸다. 뜻밖의 장소였던 것 같았다.
소로카 요새.
왕국의 북동쪽 끝에 있는 왕국 제일의 요새이자, 요새를 포함한 요새 도시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소로카 요새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북부 산맥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북부 산맥은 봉인지에서 출발해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이었다.
그 험난한 산맥 덕분에 우리 왕국은 그동안 제국의 야욕을 쉽게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북부 산맥이 모두 이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두 곳, 홀리안 공국과 소로카 요새가 있는 곳은 산맥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홀리안 공국은 침식 작용으로 꽤 넓은 평야가 왕국과 제국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소로카 요새가 있는 곳은 좁은 계곡이 제국과 우리 왕국을 연결하고 있었다.
옛날, 분노한 신이 산맥을 갈라 만들었다는 거대한 계곡으로, 소로카 요새의 목적은 계곡의 끝에서 차르 제국의 침공을 막아 내는 것이었다.
물론, 왕국 동쪽 끝에 있는 요새이니, 왕국 동쪽에 있는 나라, 이피로스 왕국과 맞닿아 있기도 했다.
제국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피로스 왕국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도 소로카 요새에는 왕국 최고의 병사들이 머물고 있었다.
공주는 전부터 이 요새에 가려고 했다.
다른 여러 이유를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장군과 장교들의 안면을 익히는 게 목적 같았다.
파벌을 만드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는 사람을 늘일 생각일 터였다.
11살짜리 소녀가 할 만한 정치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런 시절에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소로카 요새라……. 지금 시기라면 공주님이 가야 할 곳일지도…….”
벤자민은 식사를 하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벤자민도 행정학부 수석의 재원이었으니, 내 말을 듣고 공주가 요새를 가는 이유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을 터였다.
“아직 멤버가 다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벤자민 선배가 같이 가신다면 대환영이고요.”
“들킨 건가.”
벤자민 선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질문을 듣고, 못 알아차릴 리가 없죠.”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괜히 외면을 받는 나에게 찾아올 리가 없었다.
벤자민은 공주의 파견 수업에 같이 가겠다고 말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공주님께 말씀드릴게요. 공주님과 같이 움직이시면 선배에게도 도움이 꽤 될 거예요.”
내 말에 벤자민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벤자민을 보며, 나도 궁금해졌다.
“그런데 왜 우리와 같이 가시려는 건가요?”
내 말에 벤자민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창피한 얼굴이랄까.
“내가 아는 제일 높은 줄이니까. 지금 같은 때에 아무 생각 없이 왕실이나 행정부에 들어갔다가는 목이 달아나기 딱 좋아서.”
확실히, 사람들은 외면하고 있지만, 내전이 코 앞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왕실 내관이나 행정부 직원으로 들어갔다가는 내전에 휩쓸려 죽기 딱 좋았다.
내가 그 줄에 포함되어 있지만, 내가 봐도, 벤자민이 잡은 줄이 조금 애매해 보였다.
“하지만, 공주님이신데요?”
벤자민이라면, 차라리 두 왕자 쪽에 줄을 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 말에 벤자민은 씩 웃었다.
“최악이라도 공주님이 결혼하시는 곳의 서기관으로 가면 그만이고, 잘되면 또 알아? 저기 높은 곳까지 올라갈지.”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과연 높은 곳이라는 곳이 어디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모험하기로 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 두 기사와 벤자민 선배까지.
사람들은 하나둘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슬슬 나도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왕이 죽으면 어떻게 할지.
지금 가장 고민되는 일이었다.
“좋아. 그럼 파견 수업 때 보자고.”
벤자민은 먹다 만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같이 식사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실전 수업 이후로 계속 훈련만 한다며. 파견 수업 때까지 훈련만 할 거야?”
내 소문이 거기까지 나 있는 건지, 아니면 따로 내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벤자민 선배도 내 생활을 알고 있었다.
“훈련은 계속하겠지만…….”
벤자민 선배 이야기를 듣고 할 일이 생각이 났다.
“파견 수업을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신검 추적자’, 경매장 주인이기도 한 그를 만나야 했다.
그동안, 만나야 하는지 계속 고민했었는데, 이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파견 수업’에 대한 정보도 얻어야 했다.
이제는 만나볼 시간이었다.
* * *
암시장이 있는 상업지구 안쪽은 처음 이곳을 왔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건물은 그대로이고, 건물에 있는 사람들도 그대로였지만, 전처럼 한가롭지 않았다.
거친 사람들이 무리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고,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도둑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경기가 안 좋아진 만큼, 일이 많아진 모양이었다.
귀찮아질까 봐, 로브를 눌러쓰고, 주변에 마나를 퍼트렸다. 주변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슬쩍 다가오려던 도둑이 움찔 걸음을 멈추고, 시비를 걸려던 자들도 뒤로 물러섰다.
마나를 이용해 살기를 느끼게 하는 것은, 이제 쉬운 축에 들었다.
과하게 쓰면 나도 평범한 상대라면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피하는 사람들을 지나, 건물에 들어서니, 앞을 막는 덩치들이 있었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전에는 3층까지 보내줬었는데, 험악해진 거리 때문에 검문이 강화된 것 같았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반지를 보여주니 바로 통과시켜주었다.
고개를 90도로 숙이는 모습이 전생의 건달들 같아서 기분이 묘해졌다.
3층에 올라오니, 1년 전처럼 단정한 얼굴의 여성이 나를 반겼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전과 똑같은 말. 그때는 전생의 은행원 말투 같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반지를 보여 주는 대신에 로브를 뒤로 넘겼다.
내 모습을 보고, 여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찾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매장 주인에게만 얼굴을 보여 주었지만, 역시 여자도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어린 얼굴은 한 명밖에 없어서 알아차린 걸까?
어쨌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언제나처럼 1번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1번 방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다.
“저……. 이제, 안 숨기셔도 되나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여자가 물었다.
“네, 여기 주인하고 같이 여행도 했는데요. 얼굴을 가릴 이유가 없죠.”
다른 이유도 있지만, 나는 손을 흔든 뒤에, 제일 안쪽 방으로 걸어갔다.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에는 평범해 보이는 남자, 경매장 주인이자, ‘신검 추적자’가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