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제4편 신검 (1)
땅 위에 올라온 골렘 군단이 진군을 시작했다.
목표는 마물 왕.
바위 주먹을 흔들며 수십, 수백의 골렘들이 괴수를 향해 움직였다.
크아아아앙!
골렘들을 보고 누더기 괴수가 포효를 터트렸다.
공기가 떨릴 정도의 포효였다.
하지만 골렘들은 멈추지 않았다.
마물 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쿵.
거대한 발이 다가오는 골렘들을 밟았다.
골렘들은 허무하게 박살 났다.
마치, 인간에게 짓밟히는 개미 같았다.
그래도 골렘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말벌에게 덤벼드는 꿀벌들처럼.
부서져도, 부서져도 끊임없이 마물 왕에게 다가갔다.
결국, 마물 왕 아래에 도착한 골렘들이 괴수의 다리를 잡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떤 골렘은 드러난 근육을 내리치고, 다른 골렘은 발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다리를 흔들고, 주먹을 내리쳐 골렘들을 부숴보았지만, 골렘들은 점점 괴수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마물 왕의 몸은 단단한 마나막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골렘들의 끝없는 공격은 괴수의 마나막을 뚫어버렸다.
푸학!
구멍이 뚫리고, 근육이 끊어졌다. 내장이 다시 쏟아지고, 피부가 뜯겨나갔다.
하지만, 역시 그것으로 끝을 낼 수는 없었다.
부서지고, 뜯겨나가는 이상으로 괴수의 몸은 회복되었다.
골렘들에게 뒤덮여 몸이 뜯겨나가는 괴수와 계속해서 부서져 나가는 골렘들.
끝없는 싸움이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골렘이 영원히 계속 튀어나올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니, 땅 위로 튀어나오는 골렘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쓰러뜨리는 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쫓아버릴 수는 있겠지."
물러서서 마나를 회복하던 나는 다시 움직였다.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번에는 혼자 튀어 나가지 않고, 골렘들과 발을 맞췄다.
나는 진군하는 골렘 군단에 몸을 숨긴 채로 마물 왕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들키지 않고 마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드니, 몸에 붙은 골렘을 떼어내는 거대한 괴수가 보였다.
골렘들에게 덮인 몸을 보며, 원래 멀쩡했을 괴수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곰을 닮은 몸과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투구를 쓴 머리. 그리고, 강력한 회복력.
이 괴수가 멀쩡했을 때는 얼마나 강했을지 상상이 안 될 정도였다.
마왕의 직속 부하들이자, 마물들을 이끌던 마물 왕들.
지금도 봉인된 마왕을 지키기 위해 이 봉인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 괴물을 죽이려면 회복력보다 강한 공격을 해야 하겠지."
머리가 보였으면, 머리를 박살 내보는 시도를 해볼 수 있겠지만, 머리는 낡았지만 단단해 보이는 거대한 투구에 감싸여 있었다.
약점을 알고 미리 막은 것일 터였다.
죽이는 게 아니라면 해볼 만한 방법이 있었다.
매달린 골렘들을 잡고, 위로 솟구쳤다.
다리를 지나 허리를 거쳐, 가슴까지.
쿵. 쿵. 쿵.
안쪽에서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가슴에 검을 꽂았다.
‘방어 무시’ 능력이 다시 발휘되었다.
마나벽이 순식간에 뚫리고, 괴수의 가슴에 검이 박혔다.
그 순간, 마나를 변형했다.
‘마나 유형화’ 능력으로 변형된 마나가 신검에 밀려들었다.
보이지 않는 검기가 길게 늘어나 심장을 뚫었다.
크르르릉.
괴수가 우뚝 멈췄다.
심장에 검이 박힌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괴수의 팔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는 심법을 바꾸었다. 변형된 마나를 검에 밀어 넣었다.
피센 후작가에서 훔쳐 배운 심법이었다.
‘방어 무시’를 인간에게 사용하기 위해 개조한 능력.
마나로 상대의 내부를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변형한 능력이었지만, 그걸 다시 마물에 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마나가 검을 지나, 검기를 타고 심장에 파고들었다.
나는 그 마나를 터트렸다.
쿠우웅.
가슴이 불쑥 튀어나왔다.
뒤이어, 말도 안 되게 튀어나오던 가슴은 결국, 터지고 말았다.
내부의 압력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구멍이 뚫린 곳에서 피가 쏟아졌다.
크아아앙!
괴수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흔들었다.
끊임없이 회복하는 괴수도 고통은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가오는 손을 피해 아래로 뛰어내렸다.
겨우 모은 마나를 다 써버려서 더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가슴에 뚫린 구멍 안에 구멍이 뚫린 심장이 보였다.
심장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는데도 멀쩡하게 움직이다니, 이 정도면 무적의 괴물이라고 불릴만했다.
하지만, 나도 심장에 구멍 하나 뚫는 것으로 끝낼 생각은 아니었다.
"자, 들어가라!"
특별히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었다.
내 고함이 끝나기도 전에 가슴에 매달려 있던 골렘들이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
골렘들은 쏟아지는 피를 거슬러, 뚫린 가슴의 구멍을 통해, 심장 안까지 파고들었다.
괴수가 급하게 손으로 가슴을 훑었지만, 늦어버렸다.
이미, 가슴에 난 구멍은 반쯤 메워져 있었다.
구멍이 점점 메워지고 있었지만, 마물 왕은 계속 고통스러워했다.
심장 안으로 들어간 골렘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몸속에 벌레가 들어왔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괴수는 미친 듯이 가슴을 두들기다가, 내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투구 안에 있는 눈이 나를 정확하게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혹시나 공격할까 봐 바닥에 남은 마나를 긁어모았지만, 괴수는 그냥 몸을 돌렸다.
쿵.
가슴을 치면서, 괴수는 걸음을 옮겼다.
괴수가 점점 멀어졌다.
가로막은 나무들을 박살 내고는 괴수가 숲 안으로 들어갔다.
쿵.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작아지는 소리를 듣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물 왕이 물러갔다.
쓰러뜨리지는 못했지만, 마물 왕이 먼저 피하게 만든 것이다.
"하하, 죽지 않았네."
긴장이 풀리자,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십중팔구 죽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동안 죽고 다시 반복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나를 죽였던 상대 중에 방금 겪은 괴수같이 강한 상대는 없었다.
골렘들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었다.
내가 그만큼 성장한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덕분일까.
무슨 이유든, 해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마물 왕은 물러갔지만, 이렇게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쿵. 쿵. 쿵.
검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골렘들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괴수에 달라붙어 있던 골렘들도, 공터를 돌아다니며 싸웠던 골렘들도, 모두 폐허로 돌아오고 있었다.
돌아오는 골렘들은 많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골렘의 십 분의 일도 남지 않았다.
거기다 돌아오는 골렘들도 멀쩡한 골렘은 많지 않았다.
깨지고 부서진 골렘들. 한쪽 다리로 기어 오는 골렘도 보일 정도였다.
골렘들은 나를 지나쳐서, 폐허가 된 유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터가 보이는 숲의 외곽, 수풀로 가려진 곳에 일행들이 누워 있었다.
두 공주, 아이샤 공주와 프리다 대공녀만이 멀쩡하게 서서 일행을 돌보고 있었다.
공주는 괜찮은 것을 보았지만, 대공녀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유물을 써서 막았던 덕분인지, 마나가 부족한 것 이외에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내가 다가가자, 두 공주는 반색했다.
"우리가 이겼어요!"
"고생하셨어요."
공주는 마물 왕을 이긴 것을 기뻐했고, 대공녀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다만 대공녀는 말을 하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공주님도 대단했어요.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다니. 무척이나 감탄했습니다."
나는 공주에게 칭찬해준 뒤, 대공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공주가 내 말에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대공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럴 때 물어볼 일이 아니긴 하지만……. 골렘들이 왜 나타난 거죠?"
여태 다 봤는데, 더는 숨길 수 없었다.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해 줄 생각이었다.
"이 검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주인을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 검이 골렘들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아니, 움직인 것 같은 게 아니라, 움직였다고 확신했다.
주인이 되어서인지, 이 검이 행하는 것은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고렘을 움직이는 능력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겠죠."
그녀는 줄어드는 골렘을 보며 다시 물었다.
"수리하기 위해 복귀하는 건가요? 수리가 끝나면 다시 나오고요?"
아쉽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골렘들은 집에 돌아가서 잠들 겁니다."
내 위기를 보고, 달려 나오기는 했지만, 골렘들은 더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성기사의 말대로 마나가 바닥을 치던 유적이었다.
바닥을 치던 마나를 대신해서 이 검의 마나로 버티던 유적이었으니, 내가 검을 가져가는 이상, 골렘들은 더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설명을 하자 대공녀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언젠가 다시 깨울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성기사와 함께 오랜 시간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다들 괜찮나요?"
다행히 모두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공주와 대공녀가 포션들을 먹인 모양이었다.
발레아는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다.
그냥 잠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도 충격이 만만치 않을 터였다.
그런 나무들을 움직이는 것은 그녀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거기다, 괴수에게 나무들이 박살이나, 충격을 받았을 테니, 속은 엉망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카트린과 두 기사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상처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거대한 괴수에게 검을 휘둘렀던 사람들이었다.
괴수의 공격에 스치기만 했어도 크게 다칠 수밖에 없었다.
팔다리가 멀쩡하게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카트린 덕분에 모두 살 수 있었어요. 카트린이 마물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모두 죽었을 거예요."
내가 누워 있는 카트린을 보고 있자, 공주가 다가와 말했다.
공주 말에 따르면, 공주가 나서기 전에 카트린이 먼저 괴수를 끌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카트린이 쓰러지고, 공주가 이어서 시선을 끌 때 내가 본 것이었고.
공주는 자신만 칭찬을 받은 게 미안했던 것 같았다.
"공주도 카트린도 고생했습니다."
내 말에 공주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쑥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죠? 다들, 포션을 먹였지만,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대공녀가 누워 있는 일행을 보며 말했다.
그녀 말대로 포션으로는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들이었다.
배낭에 많이 담아오기는 했지만, 여기서 마냥 회복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 맞다. 공격을 받아서 숲으로 날아가 버렸을 때는 죽은 줄 알았어요."
대공녀의 말에 공주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멀쩡할 수 있었던 거예요?"
대공녀의 물음에 검을 보여 주었다.
"성기사의 검 덕분입니다. 주인을 회복시켜 줄 수 있더군요."
아니, 잠깐, 주인만 회복시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검을 뽑아, 카트린 얼굴에 가져다 댔다.
공주들은 깜짝 놀랐지만, 나는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검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