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제3편 마물 왕 (2)
화염도, 검기도 괴수에게 피해를 주긴 했지만, 제일 치명적인 공격은 발레아의 공격이었다.
숲을 반쯤 빠져나온 괴물의 몸에 나무가 감기기 시작했다.
나무들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괴물의 다리를 감았다.
양쪽 다리에 각각 나무들이 감겨나갔다. 한두 그루가 아니었다.
거기다, 뿌리들이 튀어나와 괴물의 다리와 발을 찔렀다.
푸학!
발등으로 뿌리가 솟구치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엄청난 공격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발레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땅에 두 손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두 손이 덜덜 떨리고, 목에는 핏줄이 가득 솟아 있었다.
무리하고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내 부탁을 거절한 게 이해가 되었다. 저렇게 무리를 하는데 달아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신검도 있고, 발레아도 생각 이상으로 힘을 쓰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승산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몸을 날렸다.
괴물의 발 쪽에 두 기사와 함께 공주의 모습도 보였다.
어린 몸으로 내가 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도끼를 휘두르듯이 힘껏 괴수의 발목 뒤쪽을 후려쳤다.
두 기사의 검은 마나막을 뚫지 못했지만, 공주가 휘두른 검은 마나막을 뚫고, 괴물의 몸에 상처를 주고 있었다.
괴수는 발목 뒤쪽, 아킬레스건이 하나둘 잘려 나가고 있었다.
기회였다.
나는 반쯤 쓰러진 나무를 박차고, 괴물의 허리까지 솟구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신검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신검은 형제 검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회복 능력과 방어 무시 능력.
가지고 있는 두 능력은 형제 검들보다 훨씬 강력했다.
아직 신검에 대해 전부 알아낸 것은 아니었지만, 이 두 능력만은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하앗!"
나는 고함을 지르며 허리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푸악!
다시 한번, 마나를 무시하고 검이 괴수의 허리를 박살 냈다.
무식하게 힘으로 휘두른 검.
이런 괴수를 상대할 때는 인간을 상대로 한 검술을 쓰기는 어려웠다.
이런 큰 괴수와 싸울 때는 힘과 속도, 파괴력만으로 승부가 나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기사, 아니 육체 능력자보다 다른 상속능력자들이 훨씬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지금, 괴수를 붙잡고 있는 발레아처럼.
괴수의 허리를 터트리고, 나는 반쯤 부러진 나무 위에 올라섰다.
공주도 늦지 않게 아킬레스건을 끊을 수 있었다.
쿠우웅.
괴수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킬레스건이 잘리고, 허리에 큰 구멍이 뚫렸다.
거기다, 다리를 감은 나무들이 당기고, 뿌리가 발을 뚫고 있는데, 괴수라고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괴수가 무릎을 꿇자, 허리에서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콰아아아아.
놀란 공주와 기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괴수는 고개를 숙였다.
설마 여기서 끝은 아니겠지?
몸이 망가져서인지, 생각보다 괴수는 강하지 않았다.
‘겉보기만 강한 놈이었나?’
이 정도면 살아나가는 게 아니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뚝.
쏟아지던 내장이 멈췄다.
이어서 공주가 외치는 게 들려왔다.
"근육이, 근육이 다시 이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괴수가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으드드득.
나무들이 힘껏 당기고 뿌리가 괴수의 발을 헤집었지만, 괴수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콰지지직.
나무들이 으스러지며 뽑혀 나왔다.
뿌리들이 박살 나고, 괴수가 몸을 일으켰다.
"꺄아악!"
뒤에서 발레아의 비명이 들려왔다.
젠장, 너무 쉽더라니.
일어서는 괴수의 허리는 벌써 메꿔지고 있었다.
누더기 같은 몸을 하고도 버티는 것을 보고 알아차려야 했다.
저런 몸을 유지하려면 얼마나 회복력이 좋을지, 예상을 했어야 했다.
처음에 부숴버린 주먹은 뼈 위에 근육이 덮이고 있었다.
눈앞에서 뼈와 근육이 자라나는 것을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문제는 그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급하게 몸을 날렸다.
예상했지만, 관통 능력을 매번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지금도 베어내는 것 정도는 가능했지만, 저런 주먹을 베어낸다고 멈출 리도 없었고, 결국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저런 주먹에 맞으면 나도 무사할 수 없었다.
내가 몸을 날리자, 괴수는 황당한 짓을 했다.
푸아아악.
괴수는 다시 자라난 손으로 멀쩡한 팔을 뽑아버렸다.
그리고, 힘껏 던졌다.
슈아아악!
목표는 대공녀와 발레아가 있는 페허의 유적이었다.
허공에 떠 있는 나는 막을 수 없었다.
"피해!"
고함을 지르며 고개를 돌리니, 이미 잘려 나간 거대한 팔이 두 소녀를 덮치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팔이 터져나갔다. 살점이 사방으로 튀고, 피가 쏟아졌다.
말도 안 되는 공격이었다. 자신의 팔을 뜯어 던지다니.
검을 던지고, 바위를 던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괴수가 던진 팔은 마나가 가득 담긴 팔이었다.
던져진 바위와 검과 달리, 팔에 담긴 마나는 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방금 던진 팔은, 괴수가 직접 내려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부우우웅.
살점과 피가 흩어진 자리에는 반투명한 반구가 펼쳐져 있었다.
대공녀가 펼진 방어벽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만, 반구가 껌뻑거리는 것을 보니 한계를 맞은 것처럼 보였다.
대공녀의 얼굴도 하얗게 변해 있었다. 마나를 거의 다 써버린 모양이었다.
젠장.
한순간에 일행 둘이 나가떨어졌다.
이기기는 개뿔, 당장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목덜미가 쭈뼛했다.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괴수의 다리가 보였다. 거대한 다리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맙소사.
눈을 돌리는 사이, 괴수가 나를 향해 다리를 휘두른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처음에 느리게 움직인 것은 우리를 속이려 했던 것일까?
검을 들어 앞을 막았다.
동시에 반지가 자동으로 마나를 뽑아갔다.
콰아아아앙!
눈앞이 깜깜해졌다.
쿵. 쿵. 쿵.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들고, 몸이 튕기는 게 느껴졌다.
하늘을 날아 나무들에 부딪친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며, 정신이 돌아왔다. 정신이 들면서 고통이 확 올라왔다.
"크윽."
눈앞이 벌겋게 변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죽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몸에서 느끼는 통증이 죽을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눈은 터진 것 같았고, 팔다리도 부러진 모양이었다.
쿨럭.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내장도 파열되었나 보다.
어디, 잘려 나간 데는 없지만, 포션으로도 치료될 수 있을지 모르는 상처였다.
이래서는 싸우기는 불가능했다.
이번 삶은 포기할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때였다.
"알렉스 공자!"
"알렉스!"
"알렉스 경!"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부르는 소리였다.
절절한 목소리들.
‘이러면 포기할 수 없잖아.’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는 손에 힘을 주었다.
다행히 신검은 쥐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마나를 억지로 움직여 신검에 밀어 넣었다.
우우웅.
신검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능력 중에 사용하지 못한 또 다른 능력, 치유 능력을 활성화했다.
마나가 빨려 들어가며 신검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스르르르.
동시에 거리감이 느껴졌던 신검이 손에 착 감겼다. 고통이 줄어들었다.
‘몸을 치유하게 해주니 드디어 나를 주인으로 인정한 건가?’
검을 받았을 뿐, 주인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었다.
용사가 쓰던 검이라서 까탈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는데, 인정받는 방법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었다.
통증이 줄고, 숨을 쉬기가 편해졌다. 붉었던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입에서 흐르던 피가 멈추고, 내장들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팔, 다리가 움직여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는지, 검이 가벼웠다.
일어나서 보니, 폐허 너머 숲 안이었다.
주변에는 나무가 가득했지만, 정면에 괴수와 싸우던 폐허가 보였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이 전부 부러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전부 내가 날아오며 부러뜨린 나무들이었다.
저런 나무들을 부숴대며 추락했으니, 죽을 뻔한 게 당연했다.
몸을 확인했다.
멀쩡하지는 않았지만,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목숨을 구해준 반지에 입을 맞추고, 목걸이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우우웅.
고삐 풀린 마나가 몸을 질주했다.
들끓는 마나를 느끼며 전방으로 몸을 날렷다.
파앙!
순식간에 숲을 빠져나왔다.
눈앞에 괴수의 등이 보였다.
쿵, 쿵, 쿵.
괴수는 지금 마구 땅을 밟고 있었다.
놀랍게도 공주가 바닥을 구르며 괴수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다른 일행은 모두 바닥에 누워 있었다.
마나가 고갈된 사람들도, 다친 사람들도 모두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모두 살아있었다.
괴수가 공주에게 신경을 쓰느라 마무리를 안 한 것 같았다.
아니, 일부러 살려 놓은 것일 수도 있었다.
공주를 밟는 괴수의 모습이 마치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운이 좋았건, 일부러 살려 놓았건, 나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검에 마나를 밀어 넣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괴수가 눈치채기 전에, 뒤에 접근해서 발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푸욱.
신검의 관통 능력으로 마나막을 뚫고, 마나 유형화로 검날의 길이를 쭉 늘였다.
그리고,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검이 옆으로 빠져나왔고, 피가 솟구쳤다.
괴수의 발목이 잘려 나갔다.
쿠웅.
발목이 잘린 괴수가 바닥에 쓰러졌다.
"알렉스 경!"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공주가 나를 보고 크게 외쳤다.
돌아온 내가 무척이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나도 공주가 대견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대견했고,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지 않고 바닥을 구르는 모습이 멋졌다.
"일행을 옮겨주세요!"
나는 공주에게 소리쳤다.
발목이 잘린 정도로 끝날 리가 없었다.
빨리, 쓰러진 일행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네!"
공주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괴수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푹.
괴수의 살을 터트리고, 근육을 끊어 놓아도 괴수를 죽일 수 없었다.
괴수의 회복이 내 공격보다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마나 목걸이를 쓴 덕분에 괴수의 공격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마나가 너무 빨리 줄어들었다.
내가 입힌 상처는 이미 다 회복했고, 괴수는 멀쩡히 서서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쿵. 쿵.
유적 폐허는 이제 완전히 공터로 변해버렸다.
괴수가 돌아다니며 발을 굴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공주가 일행을 숲으로 옮겨 놓았기에 망정이지, 모두 괴수에게 밟혔을 게 분명했다.
이길 수 없는 상대와 싸우는 것은 무척이나 지치는 일이었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거대한 덩치와 마나에 비해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게 의아했지만, 저 괴수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끝없는 회복 능력, 그것이 저 괴수, 아니 마물 왕의 능력이었다.
싸우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저렇게 강한 마물이 평범한 마물일 리가 없었다.
봉인지의 일정 영역을 장악하게 마물들을 부리는 마물 왕일 수밖에 없었다.
왜 유적이 알려지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마물 왕이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 차례였다.
이제 마나가 떨어지기 얼마 남지 않았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것 같았다.
"모두 달아나요!"
크게 외친 뒤, 마지막 공격을 위해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웅우우웅.
마나를 밀어 넣자 신검이 울었다.
역시, 용사의 검. 내 결심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순간,
화아아악!
검이 환하게 빛이 났다.
구구구구궁.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괴수, 마물 왕이 움찔 움직임을 멈추었다.
구구구구구궁!
울림이 점점 커졌다.
황당하게도 마물 왕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푸아아악!
다져진 땅에서 흙이 하늘로 치솟았다.
흙 사이로, 단단한 바위들이 보였다.
땅속에서 들었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쿵. 쿵. 쿵.
흩날리는 먼지 사이로, 골렘들이 모습을 보였다.
끝없이 올라오는 골렘.
골렘들의 문양에서 내 검과 같은 빛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