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227화 (227/563)

제227화

제2편 마물 왕 (1)

쿵.

소리가 들리는 방향은 우리가 왔던 방향이고, 이제 돌아가야 할 방향이었다.

쿵.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이제는 다른 사람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무슨 소리 안 들리세요?"

예상대로 공주가 먼저 알아차렸다.

쿵.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소리를 들었다.

쿵.

콰직,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도 자그마하게 들려왔다.

쿵.

다들 긴장한 얼굴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뒷머리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소리만이 아니었다. 이질적인 마나가 주변을 휩쓸었다.

처음 느끼는 무시무시한 기운.

정말 오랜만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나는 억지로 마나를 끌어올렸다.

뚜둑.

굳은 몸이 풀려나갔다. 몸을 묶고 있던 줄이 끊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쿵.

나는 입을 열었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세요."

다가오는 속도를 보니,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면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내가 없으면 마물들을 피해서 무사히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대항하기도 힘든 상대였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쥐었다.

다만, 공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공주의 등에 손을 올리고, 마나를 흘려주었다.

공주의 몸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 허억. 헉."

잠시 뒤, 공주가 움직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몸만 굳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남들보다 마나를 잘 느낄 수 있었던 만큼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나도 겨우 벗어났는데, 공주가 혼자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이건 이길 수 없어요……. 달아나야 해요."

공주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길 수 없다고, 그냥 달아나면 안 됩니다. 마냥 달아난다고 살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요."

전투에서도 진영이 무너진 채로 달아날 때, 제일 피해가 큰 법이었다.

최대한 많이 살기 위해서는 달아나는 것도 질서정연하게 해야 했다.

도망칠 수 없어, 싸워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안 맞는 말이었지만, 공포에 질린 공주를 일깨우기는 충분한 말이었다.

"아……. 네. 맞아요. 제가 정신을 차려야……."

아이샤 공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아직 창백해진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배낭에서 검을 꺼내 공주에게 건네주었다.

피센 후작령의 대장간에서 찾아낸 유물 신검.

방어 무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검이자, 이곳까지 우리를 안내한 검이었다.

"선물입니다. 피센 후작령 방문 때 공주님과 대공녀님 대신에 제가 선물을 받아서 따로 선물을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대공녀님은 벌써 받으셨습니다."

무척이나 비싼 검이었지만, 공주의 선물로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성기사의 신검을 얻은 나에게는 필요 없는 유물이었고, 당장 그녀에게 필요한 물건이었다.

공주의 검도 훌륭한 검이었지만, 신검이라고 불리는 검과 같은 능력을 가진 이 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와 검을 번갈아 가며 보는 공주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기사는 벌써 자리를 잡고, 적을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실력에 상관없이 훌륭한 기사들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기사들.

발레아는 어느새 폐허가 되어버린 유적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양손을 펼쳤다. 발레아의 마나가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녀의 영역이 점점 넓어졌다.

대공녀도 가지고 있는 유물들을 확인하고 있었고, 카트린은 방패와 검을 들고,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마지막으로 장비를 확인했다.

반지도 잘 있었고, 목걸이도 문제없었다.

나는 배낭에서 대검을 꺼내 바닥에 꽂고, 단검을 허리에 꽂아 넣었다.

마지막으로 성기사의 신검을 손에 쥐었다.

다가오는 마물을 상대하려면 최고의 무기를 써야 했다.

신검을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검을 쥐고, 크게 심호흡을 하자, 옆에서 대공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무서우세요?"

고개를 돌리니, 창백한 대공녀의 얼굴이 보였다.

싸움을 겪지 못한 사람치고 잘 버틴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은 버티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담담해 보이는 나에게 위안을 얻으려는 것일 터였다.

나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무섭죠. 조금 다른 이유긴 하지만, 저도 무섭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느끼지 않지만, 그 와중에 느끼는 고통은 견디기 쉬운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단절도, 반복되는 시간도 무서웠다.

나는 성기사의 외로움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 번 죽는다고 태연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좀 더 견딜 수 있게 된 것일 뿐이었다.

쿠우우웅.

콰직, 콰지직.

땅이 흔들리고, 나무들이 쓰러졌다.

드디어 바로 앞까지 온 것이었다.

모두 긴장한 얼굴로 나무들이 쓰러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나무들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좀 전까지 나무가 많은 곳으로 피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나무 같은 것으로 막을 상대가 아니었다.

꿀꺽.

어디선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고,

크르르릉.

드디어 마물이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악셀 기사가 탄식을 토해냈다.

다른 이들도 얼굴들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만큼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덜렁거리는 내장들과 줄줄 흐르는 피, 그리고 벗겨져 천막처럼 늘어진 피부와 진물이 흐르는 근육들.

거대한 마물은 마치 수술실에서 탈출해서 하수구에서 몇 바퀴 구른 좀비 거인처럼 보였다.

거기다, 낡은 투구까지 쓰고 있으니, 괴기함이 더 커졌다.

모습도 충격적이지만, 거대한 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은 더 무시무시했다.

"드디어 괴수 물인가……."

이렇게 거대한 마물을 처음 봐서인지, 나도 잠시 얼이 빠졌었다.

하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정신 차려요!"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 자신에게 외치는 소리였다.

눈앞에서 보니 더 절망적이었다. 사방에서 마나가 들끓고 있었다.

누더기가 된 몸에서 어처구니없는 양의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기기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래서는 살아남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모두 살아나갈 수 없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약속했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기로.

나는 멈출 수 없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마물의 약점을 알아내야 했다.

남겨지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 회차를 위해.

그래도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젠장, 승낙하는 게 아니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봉인지에 도착했을 때, ‘자동 시점’을 저장하는 게 아니었다.

"저, 저희가 틈을 만들겠습니다. 상황을 봐서 도망치십시오."

미로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저 괴물의 살기는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다.

미로 기사의 말은 자신들의 수준을 생각 못 한 말이었지만,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쿠웅.

괴물이 숲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기운을 차린, 두 기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보니, 커다란 쥐에게 개미가 달려드는 것 같았지만, 어차피 나도 마찬가지로 보일 터였다.

달려가기 전, 발레아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틈을 봐서, 두 공주를 데리고 피하라는 눈짓이었다.

하지만, 발레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내 눈을 외면했다.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갑작스러운 거절에 난감해졌지만, 지금은 더 그녀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나는 다가오는 괴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괴물이 쑥쑥 다가왔다.

악셀과 미로 기사가 마주 달려가고 있었지만,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는 것은 괴물의 걸음 때문이었다.

악셀 기사는 눈앞을 가득 채우는 괴물을 보고, 속에 있는 말을 토해냈다.

"미로 기사님! 우리는 여기서 죽는 거겠죠?"

옆에서 미로 기사가 같이 달리지 않았다면 그냥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무서웠다.

"정, 정신 차려! 어린 학생들도 싸우려 하고 있잖아! 우리는 공주님을 무사히 돌려보내야 해!"

악셀의 말에 미로 기사가 호통을 쳤다. 하지만 미로 기사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떨리고 있는 목소리와 달리, 미로 기사의 달리기는 느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미 미로 기사는 죽음을 각오한 것 같았다.

악셀은 미로 기사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검에 마나를 밀어 넣고, 땅을 박찼다.

크아아앙!

하지만, 인간의 다리는 너무 짧았다.

두 사람은 괴물의 발 앞에도 도착할 수 없었다.

그들이 다가가기 전, 힘줄이 보이는 거대한 주먹이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린 것이다.

부우우웅.

놀란 그들이 위를 올려보자, 하늘대신 피고름이 가득한 주먹이 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거대한 주먹에는 마나가 가득 담겨 있었다.

덩치도 큰데, 마나 마저 상상을 초월했다.

평범한 기사는 뚫을 수 없어 보이는 마나였다.

"죽어!!!"

옆에서 미로 선임의 고함이 들려왔지만, 악셀은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자신의 마나로는 저 마나를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귀족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웬만한 귀족도 뚫지 못할 마나막이었지만, 악셀은 다가오는 주먹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아쉬움을 남기는 순간.

콰아아앙!

눈앞에서 괴물의 주먹이 터져나갔다.

악셀은 쏟아지는 살점들과 폭음과 함께 밀려온 충격파에 옆으로 나뒹굴었다.

놀라 고개를 드니, 하늘을 나는, 아니, 뒤로 튕겨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빛나는 검을 든 남학생, 알렉스였다.

"정면은 제가 맡겠습니다! 기사님들은 견제를 부탁합니다!"

* * *

뒤로 튕겨 나가면서 나는 손에 든 검을 확인했다.

아직도 빛이 사라지지 않은 검. 신검은 멀쩡했다.

저렇게 두꺼운 마나를 뚫고, 내부를 부숴버리다니, 역시, 신검이었다.

마물의 마나막을 뚫고, 내부를 공격하는 ‘방어 무시’의 위력을 처음으로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기사들도 구할 수 있었고,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도 생겼다.

다만, 들어가는 마나가 장난이 아니었다.

저런 무시무시한 괴물의 마나막을 뚫으려면 어쩔 수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가 떨어질 게 뻔했다.

터억.

한참을 날아 겨우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었다.

괴물은 걸음을 멈추고 박살 난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행도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놀랄 시간이 없었다.

"지금이에요! 공격해요!"

내 말에 일행은 정신을 차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화염이 날아가고, 보이지 않는 검기가 괴물의 몸에 박혔다.

그리고, 나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