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제23편 추살대 (1)
검을 다시 배낭에 넣고 건물을 살펴보았다.
나무와 넝쿨로 뒤덮인 계곡 속에 홀로 남아 있는 무너진 건물.
넝쿨에 뒤덮인 건물은 무너지기 전이었으면 무척이나 웅장했을 것 같았다.
"왜 이런 곳이 안 알려졌을까요?"
대공녀가 유적을 보며 물었다.
"봉인지라고 하지만, 중심지도 아니고, 수백 년 동안 던전이나 유물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돌아다녔을 텐데……."
다른 조원들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대공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위치를 알고 찾아오는 것과 무턱대고 수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거기다, 지금도 이 계곡 주변은 마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마물들의 경계로 움직이지 않았으면, 근처에 오기도 전에 싸우다 지쳐서 돌아갔을 터였다.
그리고, 주변을 지키던 마물들이 얼마 전부터 줄어든 것 같았다.
아마도 둥지에 있는 마물들을 죽인 자들이 먼저 오면서 숫자를 줄인 듯했다.
이런 모든 이유가 더해져서 쉽게 올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다만, 그런 이유로 바로 들어가기가 곤란해져 버렸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건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들의 흔적이 늘어났다.
칼로 잘려 나간 넝쿨과 발자국들. 먼지가 쓸려나간 돌까지.
흔적을 보니, 얼마 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유적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마물 둥지에 남아 있던 신전 기사의 동료들일 가능성이 컸다.
다른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이길 바랐는데, 안 좋은 결과가 나와버렸다.
"마물 둥지에서 보았던 신전 기사와 같이 움직이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유적에서 마주치면 곤란하겠죠."
나처럼 마물 경계로 움직이지 않고, 그들은 곧장 이곳을 향해 움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보다 이동 속도가 느렸던 것 같았다.
마물 둥지에 남아 있는 흔적보다 이곳에 남아 있는 흔적이 훨씬 생생했다.
앞서 지나간 시간이 훨씬 가까워졌다는 이야기였다.
마물과 싸우며 왔을 테니, 시간이 더 걸린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거리도 좁혀졌으니, 혼자였으면 지금이 기회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나 혼자였으면, 몰래 들어가 보기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난감한 얼굴로 조원들에게 묻자,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먼저 왔다고 선점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유적에서는 먼저 잡는 게 임자 아닌가요?"
발레아의 말에 대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와서, 누가 먼저 온 것 같다고 발을 뺄 수는 없잖아요. 어떤 유물이 있는지 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생각과 다른 말에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에게 공주가 강하게 말했다.
"우리도 자신의 몫은 할 수 있어요. 너무 우리 걱정을 안 하셔도 돼요."
공주의 말에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호위 기사라는 이름으로 그녀들을 과보호했다는 사실을.
그녀들을 떼어놓은 것도, 지금도 유적에 들어가기를 머뭇거리는 것도, 결국은 모두 그런 같은 이유였다.
하지만, 내가 성장한 만큼 그녀들도 성장했다.
평범한 기사들 정도는 그녀들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속으로 고개를 젓고는 마지막 확인을 위해 통솔 교사인 카트린을 쳐다보았다.
"들어가야지. 유적이잖아. 이런 모험을 그만둘 생각이었어?"
말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카트린은 혼자서 유물을 찾아 돌아다녔던 사람이었다. 이런 유적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두 기사는 조원들이 마물과 싸우는 것을 본 이후로 우리 일에 반대할 생각을 못 했다.
결국, 우리는 유적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우리는 무너진 계단을 올라가, 허물어진 문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도 엉망으로 부서져 있었다.
내부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이 이 유적을 종교시설로 여기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깨진 색유리와 색바랜 벽화, 박살 난 수많은 촛대까지.
그리스 신전과 닮은 교단의 신전과 달리, 이 유적은 마치 거대한 성당 같았다.
교단의 신전만 보아온 이들에게는 이 유적이 생소하기만 할 뿐이었다.
천장과 벽이 무너져서 반쯤 하늘이 보이는 홀을 걷다가, 나는 일행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멈춰요."
그리고, 검을 들어, 잔해가 쌓여있는 안쪽 구석을 가리켰다.
"숨어있지 말고 나오시죠."
내 말에 일행은 무기를 치켜들고 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몸을 숨겼지만, 내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유적 입구에 남긴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카를로스 왕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당신들이 먼저 도착한 것을 알고 있고, 우리가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검을 위로 세웠다.
입구를 지키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오지 않고, 숨어있는 것이 특이하긴 했다.
더구나, 신전 기사가 포함된 사람들일 텐데…….
하지만,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이야기를 나눠서 합의점을 찾…….
"죽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안쪽에서 고함과 함께 갑옷을 입은 기사가 튀어나왔다.
잔해를 박차고, 한걸음에 달려 나온 기사는 우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대공녀가 방어벽을 펼치기 전에 카트린이 나섰다.
그녀가 방패를 들어 올리자, 방패에서 보이지 않는 마나가 크게 펼쳐졌다.
내가 쓰는 ‘마나 유형화’의 원조. 내가 대검으로 시전하는 마나 방패의 진정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콰앙!
방패에 닿지도 않았지만, 기사의 검은 뒤로 튕겨 나갔다.
이어서, 공주와 아카데미 기사들이 우리를 습격한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컥!"
하늘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놀란, 대공녀와 발레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사가 피를 뿌리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쿵.
대공녀가 서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기사가 떨어졌다.
"왜, 죽은 거죠?"
발레아가 죽은 기사를 보며 물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새로 얻은 능력으로 원거리에서 저격한 것이었지만, 그걸 알려줄 수는 없었다.
기사는 부서진 천장 한쪽에 숨어있다가, 동료가 시선을 끌 때, 위에서 공격하겠다는 작전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괜히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새로 얻은 능력을 사용해 기사를 쓰러뜨린 것이었다.
이쪽으로 떨어질 줄은 몰랐지만, 싸우는 중이니 언제나처럼 대충 얼버무릴 생각이었다.
곧이어, 먼저 공격했던 기사도 공주와 기사들의 합격을 받아 피를 뿌리며 땅에 쓰러졌다.
상처가 컸지만, 그 기사는 죽지 않았다.
"또, 신전 기사인가……."
일행은 모두 바닥에 누워있는 기사들을 보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를 공격한 기사들 갑옷에는 교단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물 둥지에서 죽어 있던 기사처럼 유적 입구를 지키던 자들도 모두 신전 기사였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신전 기사가 한 명 포함된 탐사대가 아니었다.
신전 기사들이 있는 탐사대였다.
"신전 기사들이 유적을 직접 탐사하기도 하는 건가?"
카트린이 누워있는 신전 기사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신전 기사, 아니 교단이 직접 유적을 탐사한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유물을 모으는 것은 알고, 보기도 했지만, 교단이 유적을 직접 뒤지기도 하는 건가?
"그보다 왜 우리를 공격했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공녀가 아직 살아있는 기사를 가리켰다.
그녀 말대로 다른 것보다, 그걸 먼저 물어봐야 했다.
"그래야겠지? 신전 기사에게도 포션이 먹힐까 모르겠네."
카트린은 가지고 있던 포션을 꺼내 신음하는 기사에게 다가갔다.
신전 기사는 카트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신의 사명을 위해!"
말과 함께 그의 몸에서 마나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놀라 달려 나가기도 전에 기사의 몸이 변했다.
몸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한순간에 수십 개의 병마가 그를 좀먹는 것 같았다.
얼굴이 뭉개지고, 근육이 터져나갔다.
일행은 모두 놀라, 뒤로 물러섰다.
가까이 다가갔던 카트린은 질겁을 하며 뒤로 몸을 날렸다.
크득, 크득. 크르륵.
기사는 금방 숨이 끊어졌다.
썩어들어가던 몸도 기사가 숨을 멈추자 진행이 멈추었다.
역시, 병이나 바이러스 같은 게 아니었다. 기사의 능력이었다.
일행은 갑작스러운 변고에 다들 놀라버렸다.
교단은 이 대륙의 유일한 종교였고, 이 대륙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교단의 신자였다.
우리 일행도 어쨌거나 모두 교단의 신자였다.
그런데, 신전 기사에게 공격을 받고, 그 기사가 끔찍한 모습으로 자결한 모습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신전 기사를 흉내 내는 게 아닐까요?"
대공녀가 희망 섞인 이야기를 해 보았지만, 어두워진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먼저 들어간 사람들과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를 이렇게 적대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더구나 모두 신전 기사일 줄이야.
모두 말을 꺼내지 못하자, 내가 입을 열었다.
"아마,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일 겁니다. 누구도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겠죠."
교단이 비밀로 하려는 일이라……. 제단에서 일어났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버리고, 말을 계속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전 기사와 싸우게 될 줄은 몰랐으니, 이대로 물러서는 방법도 있습니다."
나는 대공녀와 공주를 보며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공주가 나를 보며 대답했다.
"공격받은 것은 우리인데 물러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찾아가서 물어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또박또박 대답하는 말에 모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신전과 교단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대공녀와 공주가 있었다.
대공녀와 공주를 먼저 공격했으니, 교단이라도 충분히 죄를 물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 가겠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멍석을 피기는 했지만, 공주도 물러서지 않고, 제대로 결정을 내렸다.
아직 어렸지만, 공주는 얼마 전과 다른 사람이었다.
홀을 가로지르니, 무너진 제단 뒤에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보였다.
옆에 치워진 잔해를 보니, 먼저 온 자들이 잔해를 치우고, 지하로 향한 것 같았다.
우리도 지하로 향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인지 아래로 향하는 계단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횃불을 꺼내 기사들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흑백이나마 사물을 볼 수 있었지만, 모두 그 정도로 눈이 좋지는 않았다.
횃불에 불을 붙이고,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니, 계단이 끝나고, 통로가 등장했다.
시작부터 두 개로 갈라진 통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