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제22편 무너진 신전 (2)
봉인지라고 해도, 처음부터 마물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아니었다.
숲은 조용했다.
벌레들이 귀찮게 하고, 울창한 넝쿨과 나무가 길을 막기는 했지만, 속도를 지체할 정도는 아니었다.
각성한 귀족들과 기사들이라, 아직은 이동하는 데 힘들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여기는 제가 듣던 봉인지와는 다르네요."
대공녀가 무심코 꺼낸 말에 다들 난감한 얼굴로 웃을 정도였다.
생각보다 편한 이동에 다들 긴장이 조금은 풀어졌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긴장을 하게 되었다.
봉인지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반복된 삶 동안, 봉인지에서 꽤 시간을 보냈었다.
이렇게 조용할 때면, 분명 이유가 있었다.
강대한 마물이 지나가고 있어, 다른 마물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대단한 마물들이 싸우는 바람에 다른 마물들은 도망갔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긴장한 채로, 사방에 마나를 펼쳐 놓았다.
이렇게 하면 빨리 피곤해질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기습은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원인을 알아낸 것은 내 감각도, 뿌려놓은 마나도 아니었다.
마나 덕분에 냄새를 잘 맡게 된 내 코였다.
숲을 걸어가던 나는 엄청나게 강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손을 들어 올려 일행을 멈춰 세웠다.
그다음에 미리 약속해 놓은 수신호로 앞을 정찰하겠다고 일행에게 알렸다.
신호를 보내니, 카트린과 공주가 앞으로 나오고, 두 기사가 일행의 뒤를 지켰다.
미리 약속해 놓은 진형이었다.
진형이 바뀐 것을 확인하고 피비린내가 나는 전방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나무를 타지도, 발소리를 줄이지도 않았다.
피비린내는 가득 느껴졌지만, 그곳에서는 마나도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빠르게 달려가니, 금방 피 냄새가 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넓은 공터였다. 마물들이 둥지를 만들면서 생겨난 공터.
그곳에는 마물들이 시체가 되어 공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역시,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시체가 된 마물들을 살피며 공터를 가로질렀다.
껍질을 두른 곤충 같은 마물들이었다.
양팔에 낫 비슷한 칼날까지 달려 있어서 사람만 한 사마귀처럼 보였다.
수북이 껍질이 쌓여 있는 공터 한가운데, 다른 시체가 보였다. 나는 시체 옆으로 다가갔다.
"헉! 이게 다 뭐죠?"
뒤에서 대공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녀는 마물을 처음 보는 거였나?’
병이 나은 뒤에 공국을 떠나 아카데미로 오게 되었으니, 마물을 볼 시간이 없었을 터였다.
걱정되어서 대공녀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마물들을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시체이긴 했지만, 이렇게나 많은 마물이었다.
이런 숫자의 마물들을 봐도 괜찮으니, 앞으로도 짐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행은 공터와 죽은 마물들을 살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어떤 마물들이 둥지를 부신 걸까요?"
발레아의 물음에 앞에 있는 시체를 가리켰다.
"둥지를 부순 것은 마물이 아니라 사람, 기사입니다."
모두 내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잠시 뒤, 내 옆에 선 일행은 내 앞에 있는 시체를 보고 내 말을 이해했다.
기사 갑옷을 입은 남자가 두 손을 모은 채 누워 있었다.
남자의 길게 갈라진 상처를 보니, 사마귀를 닮은 마물에게 죽은 게 분명했다.
시체가 혼자 움직여서 자세를 잡은 게 아니라면, 같이 온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몇 명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크기의 둥지를 쓸어버린 것을 보니, 대단한 실력이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떠난 사람들의 실력을 가늠하는 동안, 공주와 대공녀는 갑옷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금방 문양을 알아보았다.
"교단이 왜 여기에……."
두 사람의 말에 나도 문양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말대로, 판금 갑옷에 새겨져 있는 것은 교단의 문양이었다.
‘신전 기사가 이곳에 오다니.’
신전 문양을 새긴 기사라면 신전 기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전 기사가 이곳에서 죽어 있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평범한(?) 신관이나 사제라면 모험가나 다른 탐사대와 같이 왔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신전 기사는 신전의 일만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봉인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교단의 일로 움직인 것일 텐데…….
교단이 봉인지에서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슬금슬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봉인지에서는 걱정도 오래 할 수 없었다.
드디어 마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카아아아악!
철을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내 감각에 여러 개의 마나가 걸려들었다.
모두, 변형된 마나. 마물들이었다.
"모두, 전투 준비! 마물들입니다."
소리가 들린 덕분에 사람들은 빠르게 진형을 갖추었다.
대공녀와 발레아를 뒤에 두고, 기사와 육체 강화 능력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다들 긴장한 얼굴로 공터 너머의 숲을 바라보았다.
괴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캬아아악. 캬악.
결국, 바로 앞까지 괴성이 들려왔고,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숲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마물들은 사마귀를 닮아 있었다. 바닥에 깔린 시체들과 똑같았다.
같은 모습에 더 큰 몸집을 보니, 지금 도착한 마물들은 둥지 밖에서 식량을 모으는 마물 같았다.
마물들은 우리를 보고, 괴성을 질렀다.
"오해한 것 같은데요."
대공녀의 말대로였다.
둥지로 돌아온 마물들은 우리가 다른 마물들을 죽였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큰 오해였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오해를 안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싸워야 할 상대였다.
* * *
기사 악셀은 이번에 맡겨진 일에 불만이 많았다.
공주와 대공녀의 호위를 하라니. 이야기를 듣자마자 욕이 나올 뻔했다.
그것도 다른 학생들과 떨어져, 봉인지를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에 두손 두발을 다 들고 말았다.
그가 학장이나 높은 사람이라면 절대 들어주지 않았을 일이었다.
실력자인 카트린 교수가 같이 가고, 작년에 보고, 감탄한 알렉스 학생이 같이 가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알렉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걱정이 되는 학생들이었다.
아이샤 공주는 너무 어렸다. 기사 학부이긴 했지만, 이제 겨우 11살이었다.
키도 그의 가슴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작년에 그런 작은 키로 마물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감탄하긴 했지만, 이렇게 따로 돌아다니는 것을 인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다, 대공녀는 무슨 생각으로 봉인지에 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공녀의 능력이 유물을 분석하는 능력이라는 소리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공격 능력도 아니고,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었다.
그런데, 봉인지를 올 생각을 했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남은 예쁜 여학생은 작년에 잘 싸우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물이 몰려드는 지금, 그는 멍하니 학생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물들이 달려오자,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대공녀였다.
그녀 손을 뻗으니, 일행 주변에 반투명한 막이 펼쳐졌다.
하나가 펼쳐진 게 아니었다.
두 겹, 세 겹 펼쳐진 마나 벽은 돌진하는 마물들을 막아 냈다.
쿵, 쿠웅.
마나벽에 부딪쳐서 바닥에 나뒹군 마물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이 몸을 움직여 쓰러진 마물들을 감싸 안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발레아가 능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마물들도 공포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시체들에 감싸인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꼬았다.
그렇게 바닥을 구르는 마물들을 공주가 나서서 검으로 찔렀다.
피가 튀고, 마물들이 발버둥을 쳐도 공주는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카트린도 공주를 도왔고, 멍하니 학생들을 바라보던 기사들도 공주를 도와 마물들을 정리했다.
마물들이 휘두른 칼날에 미로 기사가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그렇게 공터에 나타난 마물들이 모두 쓰러지는 동안 알렉스는 보이지 않았다.
싸움이 시작되자, 일행을 확인한 그가 숲으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마물을 죽인 뒤, 알렉스가 돌아왔다.
마물의 피가 가득 묻은 검을 들고.
* * *
숲에 있는 마물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돌아오니, 선발대로 나선 마물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있었다.
충분히 막아 낼 것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싸운 흔적을 보니, 생각보다 다들 강해져 있었다.
발레아는 영역 선포는 이제 이동하면서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오래 머물지 않고도 이 정도라면 제대로 시간을 들이면 어떻게 될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공주도 이제 제대로 된 기사, 한 사람 몫을 하고 있었다.
정말,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숨기고 있는, ‘마나 감응력’을 제대로 쓴다면 이제 기사학부에서는 나를 제외하고 이길 사람이 없을 듯했다.
마지막으로 대공녀가 가지고 있는 유물들은 사기에 가까웠다.
비싼 돈 주고 산 내 반지가 평범한 반지로 보일 정도였다.
마물들을 쓰러뜨린 뒤, 기사들이 달라졌다.
그전까지는 기사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싸움 이후로는 표정도 밝아지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인지, 일행은 어렵지 않게 숲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마물들의 경계로 일행을 이끌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런 것을 표 낼 생각은 없었다.
그날 저녁, 언덕 아래 작은 동굴을 발견한 우리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내 배낭에서 숙식과 식사를 위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고, 기사들은 황당한 얼굴로 내 배낭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생각한 것보다 많은 양이 나온 모양이었다.
그날 밤은 모두 편히 쉴 수 있었다.
봉인지에 어울리지 않는 맛있는 식사와 편한 잠자리 덕분이었다.
대공녀가 깔아놓은 알람 유물도 밤새 조용했다.
다음 날, 가뿐하게 일어난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무가 가득한 계곡.
그 중앙에 반쯤 무너진 건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대 제국 때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신전인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무너진 부분이 많았지만, 나머지 부분만 봐도 건물의 목적이 느껴졌다.
"모양이 다른데요?"
내 말에 공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주가 의아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 유적은 수도에 있는 신전과는 닮지 않았다.
아니, 대륙에 있는 어떤 신전과도 닮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유적에서 전생에 보았던 신전과 교회, 성당과 사원을 느낄 수 있었다.
건물의 형식에서, 깨진 조각에서, 흩어진 벽화까지.
전부 신을 찬양하고 있었다.
교단의 신전은 아니었지만, 이 건물은 신을 섬기는 신전이었다.
확인을 위해, 배낭에서 검을 꺼냈다.
스위치를 올릴 필요도 없었다.
우우우우웅.
건물을 보고, 검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