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제18편 검의 주인
갑작스럽게 들린 음성에 머릿속으로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이건 또 뭐지? 누가 말한 거고?
항상 보아왔던 ‘사자 회귀’의 메시지창과는 상관없는 음성이었다.
단검의 음성도 아니었고, 설마, 기사의 검도 에고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 말 뒤로는 아무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 내용이 더 황당했다.
기사의 검이 주인의 정신공격을 막았다고 했는데…….
설마, 내가 기사의 검 주인이 된 건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분명 방금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지하에서 검에서 느낀 묘한 감각이 주인이 되는 느낌이었을까?
하지만, 검이 마나가 가득 든 검을 잘라내고, 거대한 마나를 정면으로 받아낸 것밖에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둘 다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왕국의 보물이 내 것이 되었다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용사의 검을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나는 용사가 쓰던 검을 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뒤에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우선 이 일은 제쳐두고,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
신관을 보니, 아직도 미안한 얼굴이었다. 계약이 막힌 것을 신관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에게 몰려들었던 마나만 흩어졌으니, 신관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감사합니다. 거절하실까 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거절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거절한 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신관은 문을 지키던 두 신관 기사를 밖으로 내보냈다.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으니까요. 계약하셨으니,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신관 기사들이 나가자, 베네틱토 신관이 설명을 시작했다.
"알려드리겠다고 약속을 한 것도 있고, 알렉스 경이 괜한 오해를 하게 되는 것도 교단이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요."
하기야, 나는 어찌 되었건 공주의 호위 기사였다. 내가 색안경을 끼고 교단을 보는 것을 원할 리가 없었다.
"오늘 우리가 제사를 드린 제단은 신께 제사를 드리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일에 쓰여집니다."
베네틱토 신관은 편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도 있고, 대규모 치유를 받을 때도 제단을 이용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신관은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신께서 신관과 사제를 각성시키는 곳이기도 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모르는 것을 보면 이것도 교단의 비밀이 분명했다.
신관은 신이 각성시킨다고 했지만, 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단에 있는 어떤 능력이 신관과 사제를 각성시키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하에 있는 제단은 그 각성을 도와주는 곳입니다."
도와준다?
그동안의 일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지하 제단에 꽂혀 있던 검. 그리고 검에 담긴 거대한 마나.
검의 폭주로 신관과 사제들이 병에 걸린 것까지.
베네틱토 신관의 설명 속에서 그 광경들이 차례로 조립되어갔다.
"보지는 못하셨겠지만, 제사를 드릴 때는 신께 올라가지 못한 여분의 마나가 홀에 흐르게 됩니다."
미안하지만 잘 보고 있었다.
마나를 움직이기 위해 당신이 진땀을 흘리는 것까지 전부 볼 수 있었다.
"그 마나를 지하에 있는 제단에 모아두었다가, 신께서 신관과 사제의 능력을 각성시키실 때, 작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저 말속에서 신을 빼버리니, 점차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오래되었는지, 촉매로 쓰인 유물이 폭주를 일으킨 겁니다."
아무래도 오래돼서가 아닌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마나 선을 연결한 내 탓이 분명했다.
다만, 전처럼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오히려 통쾌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피해가 크네요.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한동안, 축복을 받을 신관과 사제는 다른 왕국으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마무리하며 신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나올만했다.
유물의 폭주이긴 했지만, 그가 책임자였으니, 문책이 안 갈 리가 없었다.
"이야기가 끝난 것 같은데,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아, 제가 계속 붙잡고 있었군요. 네, 끝났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급하게 말했다.
"아, 맞다. 일도 해결해주시고, 계약도 해주셨는데, 교단 차원에서 감사 인사가 갈 겁니다. 보상도 있으니, 이번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맨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보상이라는 말에, 마음속에 담겨있던 화가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유물이라도 주면, 더 풀릴지도 몰랐다.
신관에게 인사를 하고, 문밖으로 나가며 한가지 확인을 해보았다.
"무슨 일 있었나? 왜 검을 들고 있어?"
밖에서 기다리던 기사단장이 내가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왕가의 보물을 언제 또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번 꺼내 봤습니다."
대충 대답하며 다시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야기는 잘 되었어?"
"계약했습니다."
"휴우……. 그럴 것 같더라니. 잘했다."
기사단장은 고개를 흔들더니, 내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나는 몸을 휘청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환에 성공했다.
허리에 차고 있던 기사의 검이 손으로 소환된 것이다.
왕가의 보물인 기사의 검이 내 검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기사의 검은 왕국의 보물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내 검이라고 말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무기 소환 능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과 달리, 주인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물론, 소환했다가는 수련 검 이상으로 난리가 나겠지만…….’
공주에게 들으니, 지금도 왕실에서는 비밀리에 창고에 있던 수련 검을 찾는 모양이었다.
창고에 봉인했던 검도 이렇게 찾아다니는데, 왕국의 보물인 기사의 검이 없어지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어쨌거나 머릿속을 울리던 목소리가 다 사실이라면, 신검의 능력으로 계약을 막았다는 소리가 되는데…….
그렇다면 신전의 계약은 일종의 정신공격이라는 이야기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기사의 검이 가진 능력은 정신공격을 막는 능력인 거고.
역대 왕이 기사의 검에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 것은 정신공격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일지.
아니면,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뭔가 알아갈수록 의문은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그래도, 이번 일은 의문이 많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름 없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관의 설명에 집어넣으면 지금 상황 자체는 설명이 되었다.
신에게 드리는 제사는 실제로는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유물과 신관들에게서 뽑아낸 마나를 지하에 있는 검에 모으는 시간일 뿐이었다.
그렇게 모은 마나는 검 안에서 변형이 되어, 신관과 사제들에게 각성을 시켜주는 원료가 되었던 것이었다.
‘검은 각성을 지원하는 촉매가 아니라, 신관을 각성하게 해주는 유물 그 자체일 테고.’
생각해 보니, 유물로 능력을 각성하는 것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였다.
아니, 들어본 게 아니라,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저런 평범한(?) 유물 검이 아니라 용사의 무기로 능력을 얻은 것이었지만, 기본은 다르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유물의 숫자와 마나의 양으로 때운 것일까? 지하 광장 천장에 그려진 마법진 비슷한 것은 각성을 일으키게 하는 문양이고?’
머릿속에서 추리가 이어졌다.
부족한 내용은 상상으로 채워가며 그럴듯한 내용이 만들어졌다.
다만, 그렇게 만든 추리에는 한가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었다.
주머니 속에 있는 부러진 검은 ‘피센의 신검’의 형제 검이었다.
피센의 신검은 방어 무시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검이었고, 신관들의 치유 능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우선 검을 수리해서 능력부터 확인해 봐야겠어.’
제사 과정에 큰 소란이 벌어졌지만, 신전 밖에서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신관과 사제들 이외에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나와 기사단장뿐이었고, 우리는 이번 일을 비밀로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제사가 엉망이 되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어떤 소리를 들을지 뻔한데, 그걸 말할 리가 없지."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갈 때, 기사단장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기사단장의 말대로였다.
교단이 먼저 욕을 먹겠지만, 검을 가지고 간 기사단장과 나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나 때문에 제사를 망쳤다는 말이 돌 게 분명했다.
나는 서자에, 아직 정식 기사도 아니고, 공주의 호위 기사였다.
공격받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나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왕궁에 도착한 뒤에, 기사단장이 보는 앞에서 나는 집사장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이로써, 내 할 일은 끝이 났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소득이 있던 제사였다.
나는 홀가분하게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은 휴일이었다.
나는 약속도 없이 대공녀의 집을 쳐들어갔다.
다행히 대공녀는 저택에 있었고,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내 방문을 받아주었다.
"약속도 없이 숙녀의 집을 찾아오는 예의 없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이시죠?"
나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제 일로 너무 흥분한 모양이었다.
나는 작년에 대공녀에게 귀족 여성에 대한 예절을 배웠었다.
그런 내가, 이렇게 예의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진짜 화를 내기 전에 먼저 부러진 검을 보여주었다.
검을 보고, 대공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검을 보고 진짜 화가 난 것 같았다.
"고친 검을 또 부러뜨린 건가요?"
다행히, 고칠 것을 가져와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닙니다. 다른 검입니다. 다시 보세요."
나는 급하게 오해를 바로잡았고, 그녀는 화를 풀고, 검을 살폈다.
"정말이네요. 근데, 이건 저번에 수리한 검하고 많이 비슷한데……."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저번에 저에게 조별 과제를 신전으로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기사 대결에서 이겨서 어제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고. 그런데, 오늘 이 검을 가져오셨네요."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라는 대공녀의 압박에 나는 진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죄송합니다. 신전에서 비밀을 지키는 계약을 했습니다."
물론, 그 계약은 내게 소용없는 계약이었지만, 대공녀에게, 아니 다른 사람에게도 지금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대공녀는 고개를 젓고는 검에 손을 올렸다.
다행히 부러진 검도 수리가 가능한 것 같았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 검은 힘들어요. 나중에 내 부탁도 들어줘야 해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녀가 고쳐준 유물이 몇 개인지, 앞으로를 생각해도 그녀의 부탁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진땀을 흘리며 검을 잡고 있던 대공녀가 한참 뒤에 지친 얼굴로 검을 놓았다.
테이블에 내려놓은 검은 부러지기 전의 검과 다르지 않았다.
"전 잠깐 쉬고 있을……."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대공녀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다행히 몸은 이상이 없어 보였고, 나는 사람을 부르기 전에 우선 검을 잡아보았다.
검을 잡아보니, 이 검의 능력을 알 것 같았다.
‘역시 치유 능력이었어.’
형제 검이었지만, 능력은 달랐다.
교단의 성검이었으니, 치유의 검이 있는 것도 이해가 되긴 했다.
검을 잡은 김에, 주머니 속에 있던 검도 꺼내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머니 속에서 꺼낸 검을 잡고, 스위치를 올렸다.
검에서 마나로 만들어진 선이 쭉 뻗어 나갔다.
동시에 부러졌던 검에서도 마나 선이 생겨났다.
그런데 마나 선 방향이 이상했다.
"왜 이러지?"
두 검을 이어야 할 마나 선이 하늘로 뻗어가고 있었다.
나는 창문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방을 빠져나간 두 선이 수도 밖으로 길게 뻗어가고 있었다.
거기다, 선 하나가 더 보였다.
세 가닥의 선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 방에서 출발하는 두 선과, 멀리 피센 후작령이 있는 쪽에서 시작한 마나 선이 수도를 지나, 같은 방향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음 조별 과제 목적지도 내가 정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