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제17편 제단 위의 검
마나를 품은 강한 빛이 지하 광장을 휩쓸었다.
크윽!
억지로 버티고 있기 어려울 정도의 마나 폭풍이었다. 나도 마나에 휩쓸려 뒤로 날아가 버렸다.
십 미터 넘게 날아갔을까.
벽에 충돌하기 전에 겨우 검을 땅에 박아넣고, 멈출 수 있었다.
크윽.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강펀치로 전신을 흠뻑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지상에서 느꼈던 마나가 촉촉이 몸을 적시는 샤워였다면, 지금 느낀 마나는 소방관 호수로 뿜어져 나오는 격류 같았다.
욱신거리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몸에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다만, 들고 있던 검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았다. 기사의 검이 묘한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설마, 검이 망가진 것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냉큼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제단도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쑤시는 몸을 움직여 부서진 제단으로 걸어갔다.
산산조각이 난 제단 파편 사이에 두 조각으로 부러진 검이 보였다. 검은 검날이 깔끔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혹시나 해서 기사의 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내 손에 들린 검은 멀쩡했다. 상처 난 곳도 보이지 않았고, 검날도 깨끗했다.
확실히 용사가 쓰던 검은 달랐다.
마나가 가득 찬 유물 검을 잘라냈는데도, 날도 상하지 않는다니.
괜히 왕국의 보물이 아니었다.
나는 돌무더기가 된 제단 위를 움직여 부러진 검을 주웠다.
2개로 나뉘어진 검 말고는 다른 파편은 보이지 않았다.
검의 단면을 맞대 보니, 딱 맞았다. 이 두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렇게 망가져 버렸으니, 이제 유물로서의 가치는 없을 터였다.
"대공녀가 없다면 말이지."
대공녀가 있으니, 부러졌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부러진 검도 고칠 수 있으려나?"
우그러진 검도 능력으로 살려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러진 검을 유물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검을 집어넣고, 제단에서 내려와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다시 올라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빛이 사라져서 마나를 품은 내 눈에도 지하 광장은 흑백으로 보일 뿐이었다.
흑백으로 보는 광장의 모습은 처참했다.
제단만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지하 광장 전체가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변해 있었다.
날아가는 순간, 기사의 검으로 마나를 뿜어내서 방패를 펼치지 않았으면 나도 다쳤을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묘한 느낌을 주던 기사의 검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다행이었다. 잘못했다가는 돌려줄 때 문제가 될뻔했다.
알아차리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기사단장이라면 알아챌지도 몰랐다.
멀쩡해진 것을 보니, 강대한 마나와 충돌하면서 잠깐 이상이 생긴 것일 가능성이 컸다.
지금은 괜찮았지만, 어쨌거나 최대한 빨리 돌려줘야 했다.
"그러고 보니, 이 검은 능력 같은 게 안 붙어 있는 건가?"
용사의 검이 아닌 ‘피센의 신검’도 방어 무시 능력이 붙어 있는데, 이 검은 초대 왕의 무기에다가 왕가의 보물이라는 점 말고는 특이한 부분이 없었다.
검은 검. 수련 검도 정신세계에서 카를로스와 싸우게 해 주는 대단한 기능이 달려있는데, 이 검은 무척이나 튼튼한 검일 뿐이었다.
"뭔가 기능이 있는데, 써먹지 못하는 걸까?"
초대 왕의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고, 다른 왕들은 행사용으로 써먹었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도 튼튼한 검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두 무기를 부딪쳐보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머리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렸다.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단검을 다시 유물 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올라갔다.
부서진 장치들을 지나, 계단을 모두 올라가니,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기사단장이었다.
"못 오시는 줄 알았는데, 와 계셨네요."
젊은 신관에게 말했지만, 솔직히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는 내 예상보다 더 열심히 움직여 준 것 같았다.
하지만, 기사단장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의아했다.
기사단장이라면 못 참고 아래로 내려올 거로 생각했는데.
이제야 도착한 걸까?
"잘 된 모양이군. 나도 내려가려고 했는데, 영 좁아서……."
계단을 보고, 기사단장의 덩치를 보니, 그의 말이 이해되었다.
기사단장은 상체를 굽혀야 겨우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폭도 좁아서 검도 휘두르기 어려워 보였다.
내려오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다들 괜찮습니까?"
"직접 봐."
기사단장이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완전히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관과 사제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리고, 괜찮아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있고.
자기 자신을 능력으로 치료하는 모습이 신기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다들 괜찮아 보였다.
괜찮아 보이지만 황당해 보이는 광경이기도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혹시 뭔가 아시는 게 있나요?"
내 물음에 기사단장은 입을 열었다.
"글쎄……."
기사단장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성질을 냈다.
"정말, 지질맞은 계약이네. 미안하지만, 나도 아는 것은 별로 없어. 말해줄 수도 없고."
비밀 계약을 한 건가? 그렇다면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기사단장에게 들을 수 없으니, 이야기해준다던 젊은 신관에게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신관도 양반은 못 되는 것 같았다.
내가 떠올리기 무섭게 젊은 신관이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제단에서 마나가 나오지 않게 된 것을 보고 내가 일을 처리한 것을 안 모양이었다.
"혹시, 아래쪽 제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검을 부시자, 다 박살이 났습니다. 제단도 부서지고, 지하 광장도 엉망이 되고요."
신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천장에 그려져 있는 진도 망가졌나요?"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기억이 났다. 천장의 마법진 비슷한 것도 다 망가져 있었다.
"네."
내 말에 젊은 신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를 흡수하고 전달하는 신기한 문양이던데.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었나보다.
그리고, 지나가듯이 신관이 물었다.
"다 망가졌으면 큰일이네요. 부서진 검은 그곳에 있나요?"
드디어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다.
"잘게 부서지고, 마나 폭풍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잔해를 찾지 못했습니다."
과장이 섞인 이야기인데. 통할까?
"아, 기사의 검을 쓰셨군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통했다.
기사의 검 덕분이었다.
"원상태로 돌리려면 고생을 많이 해야겠네요."
그 원상태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일까? 점점 더 궁금해졌다.
"아, 맞다. 제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드리기로 했죠? 저를 따라오세요."
오, 이제 들을 수 있는 걸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지만, 같이 걸어가는 기사단장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아까부터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젊은 신관의 뒤를 따라가다가 입을 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아, 제 이름도 말씀 안 드렸었군요."
나도 스쳐 가는 인연일 것 같아서 지금까지 묻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한 번만 볼 것 같지 않았다.
"베네틱토입니다."
그의 이름을 입안에서 되뇌어 보았다.
베네틱토 신관은 나를 외진 방으로 데려갔다.
문 앞에서 신관이 따라오는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단장님은 밖에서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지."
기사단장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따랐다.
나는 눈을 또르르 굴렀다.
영 분위기가 이상했다.
검에 손을 올리고, 마나를 슬쩍 풀어보았다.
하나, 둘,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마나에 제대로 걸리는 것을 보면 실력자들이었다.
의아한 상황에 단장을 쳐다보았지만, 단장은 어서 다녀오라고 할 뿐이었다.
위험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껄끄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뒤로 빼기도 애매했다. 나는 결국 신관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텅 빈 방 중앙에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테이블 앞뒤에는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거기다, 검을 찬 신관 둘이 내가 들어간 문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중세풍 가구에 신관 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전생의 심문실이었다.
검에 올린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신관 기사들을 처음 보았다.
신관 기사는 육체 각성자 중에 신관이 되어, 신전의 무력적인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귀족 지위를 포기하고 신관이 된 것이어서 칭송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지만, 귀족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신관이 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문을 지키는 두 신관 기사도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가득 끌어올렸던 긴장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방이 좀 살벌하죠? 죄송합니다.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는 일이라…….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 방을 찾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뭐라 해도 의심만 들 뿐이었다.
그래도, 담담하게 의자에 앉았다.
"이거, 교단에 큰 도움을 주신 분에게 이런 대접을 하는 것은 곤란하긴 한데……. 규칙이라서요. 죄송합니다."
그는 다시 한번 나에게 사과했다. 사과가 쉽게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 뒤에 신관은 옆에 놓인 종이를 내 앞에 끌어다 놓았다.
몇 번 본적이 있는 서류. 계약서였다.
"이곳에 있던 일과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입니다."
내용을 보니,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제 이런 것을 준비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외부에 알려지면, 교단과 왕국,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큰 피해가 끼칠 것입니다. 계약서를 써 주시기 부탁드리겠습니다."
교단은 그렇다고 해도, 왕국과 세상에 피해가 온다니……. 과장하는 수준이 만만치 않았다.
계약서 자체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면 교단에서 알게 되는 계약일 뿐이었다.
다만, 이런 계약을 강제로 적게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슬쩍 딴지를 걸어봤다.
"다른 사람에게 알릴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계약서를 강제로 써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신관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으셨죠. 곤란한데……."
졸업하면 또 뭔가가 있는 걸까?
이건 인형 속에서 계속 인형이 나오는 마트료시카도 아니고, 도대체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얼마나 더 튀어나오는 건지…….
이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쓰지 않으시면 파문이 내려질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누군가에게 실수로 말씀하게 되면 추살대가 파견될 수도 있고요. 그런 위험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속 내용은 협박에 가까웠다.
거기다, 이 협박은 꽤 무서웠다.
교단의 추살대는 어린아이들을 혼낼 때 쓰는 용도로 제일 많이 등장하는 무서운 집단이었다.
추살대는 제국 수도에 있는 본단에 있는데, 이 추살대가 움직여서 해결하지 못한 일이 없다고 들었다.
영지에 있는 신전과 신관, 사제를 모두 죽였던 악독한 대영주와 영지군이 이 추살대에 몰살을 당했다는 말도 있었고.
배교를 하려던 왕이 추살대에 포위당해서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주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추살대와 싸울 수도 없었고, 어떻게 된 일인지 이유도 듣고 싶었다.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 순간, 허리에 찬 검이 떨렸다.
[기사의 검이 주인의 정신공격을 방어합니다. 계약이 무효화 되었습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또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