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제15편 제사 (1)
그그그긍.
커다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열리는 문 사이로 멀리 제단이 보였다.
문 안은 안쪽에 큰 제단이 있는 커다란 홀이었다.
천장도 높고, 공간도 넓은 중간에 기둥이 세워져 있는 그리스 신전과 비슷한 홀이었다.
홀에는 신관과 여사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역시, 수도의 신전이었다.
이렇게 많은 신관과 사제를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능력을 얻어서 좋았던 기분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조금 긴장이 되었다.
초대 왕의 기억을 봤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제사를 지내러 온 것이 아니라, 적진에 들어온 기분이 되어버렸다.
투구의 바이저가 내려가 있어, 사람들이 내 표정을 볼 수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잘못했으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여줬을지도 몰랐다.
표정은 어쨌건 간에, 나는 식순에 맞춰서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제단 앞에는 기사 대전을 진행했던 젊은 신관이 서 있었다.
기사 대전 때와는 달리, 신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물을."
다른 신관이 다가와, 두 손을 들었다.
그의 손 위에는 낡은 향로가 들려 있었다.
마나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유물이 분명했다. 이 제사를 위해서 왕실이 준비한 유물인 듯했다.
제사를 위해 왕실의 보물인 기사의 검을 가져왔지만, 기사의 검을 진짜 바칠 수는 없었다.
저 향로는 기사의 검 대신, 교단에 바칠 유물이었다.
신관은 향로를 제단 한쪽에 올려놓았다.
"왕의 충성된 기사여, 검을 들도록."
왕에게 충성하는 기사는 아니었지만, 나는 검을 뽑아 양손으로 잡고 눈앞에 세웠다.
그리고, 제단 앞에 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께 기도드립니다. 카를로스 왕국의 왕이……."
내가 고개를 숙이자, 내 옆에 서 있던 젊은 신관이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마나를 실어서인지 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왕의 병을 치유하기……."
"……왕의 병을 치유……."
"……왕의……."
동시에, 홀에 있던 모든 신관과 여사제가 같은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다들 열심히 외웠던 모양이었다.
박자도 호흡도 딱 맞았다.
더구나, 그들이 일으키는 마나가 서로 호응을 일으키며 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이었다.
여기 있는 신관과 사제들은 각성한 귀족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사들처럼 훈련으로 마나를 습득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 교단의 신관과 사제가 되는 것만으로도 계약과 치유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교단은 이것을 신을 믿는 믿음의 증거로 이야기했고, 이 세상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었다.
나도, 초대 왕의 기억을 보기 전까지는 조금은 믿고 있었다.
아직도 어떻게 신관과 사제들이 마나를 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들이 뿜어내는 마나는 각성한 귀족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일으킨 마나가 홀 전체와 내 육체도 두들기고 있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공기를 울리는 소리.
소리와 함께 벽과 홀 곳곳에서 다시 마나가 치솟아 올랐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눈만 굴려 마나가 치솟는 벽을 살펴보았다.
벽에는 낡은 물건들이 걸려있었다.
헤진 벽화, 낡은 액세서리, 찢어진 깃발까지.
이 멋진 홀과 전혀 안 어울리는 물건들이었다.
그 물건들에서 마나가 치솟고 있었다.
벽만이 아니었다.
홀 주변에 세워진 갑옷과 그 갑옷이 든 무기들에서도, 석상과 조각에서도 마나가 솟구치고 있었다.
모두 유물이었다.
생각보다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이제야 홀 안에 있는 유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홀 안에는 많은 유물이 있었다. 종류도 다양하고, 특이한 모양의 유물도 보였다.
생각 같았으면 하나하나 살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당장은 신검을 찾기는 어렵겠어.’
곁눈질로 볼 수 있는 유물은 많지 않았다.
몇몇 갑옷이 들고 있는 검이 보이긴 했지만, 신검은 아니었다.
아쉬웠지만, 꾹 참고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제 의식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신관과 사제가 일으키는 마나와 유물들이 뿜어내는 마나가 홀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이 정도면 기적이 일어날 만도 한데…….’
그 정도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그 힘이 모이는 제단은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내 옆에 있는 젊은 신관은 땀을 뚝뚝 흘리며 날뛰는 마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나 초고위 성법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런 마나를 조정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저건 상속능력 같은데…….’
저렇게 마나를 조율하는 능력은 신관과 사제의 능력이 아니었다.
저 젊은 신관은 초대 왕의 기억에서 보았던 신관 비오의 후예일지도 몰랐다.
이 정도 마나라면 당장 죽을 사람, 머리만 남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이런 대단한 제사로도 왕을 낫게 하기는 어려웠다.
왕은 다친 것도 아니었고, 장기나 다른 부분이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수명이 빠르게 닳아서 죽을 때가 된 것일 뿐이었다.
신관도, 연금술사도, 능력으로 확인했을 때도, 모두 그렇게 결론을 내렸었다.
전생의 빨간약보다 수십 배 효과가 좋은 포션도 있고, 의사들보다 더 사람을 잘 살리는 신관과 사제들이 있지만, 수명이 다된 사람을 살릴 수는 없었다.
수명을 되돌리려면, 신의 기적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런 제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하는 제사가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자세만 갖춘 채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홀을 가득 메웠던 마나가 젊은 신관의 지휘로 점차 제단에 흡수되었다.
제단은 더욱더 환하게 빛났다.
그렇게 계속 제단으로 마나가 밀려들었고, 결국, 홀을 가득 메우던 마나가 다 사라졌다.
기도 소리도 잠잠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복귀하시면 됩니다."
"휴우……."
젊은 신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관과 사제들이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들 땀으로 샤워를 한 듯한 모습이었다.
거기다, 창백한 얼굴을 보니, 가지고 있는 마나를 다 뽑아낸 모양이었다.
마나 고갈이었다.
홀을 메우던 마나를 생각하면 마나가 고갈될 만했다.
하지만, 이렇게 뽑아낸 마나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나를 다 흡수한 제단은 지금은 평범한 돌 제단일 뿐이었다.
신관들이 주저앉자, 젊은 신관이 나를 향해 말했다.
"이제, 검을 넣으셔도 됩니다."
정말, 제사가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한참을 무릎 꿇고 앉아 있었는데도, 몸이 가뿐했다.
각성한 육체라 무릎 꿇고 있는 것 정도는 문제가 없긴 했지만, 더 좋아질 리가 없었다.
몸을 살피니, 이건 마치, 마나로 온몸을 마사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나는 정보창을 확인했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육체 최적화 : 레벨 22
- 마나 회로 구축법 : 레벨 2
- 마나 감응력 : 레벨 1
- 장비 소환 : 레벨 1
- 마나 방출 : 레벨 1
< 비인가 능력 >
- 마나 유형화 : 레벨 2
- 사자 회귀 : 레벨 2
육체 최적화가 두 단계나 올라 있었다.
몸이 가뿐할 수밖에 없었다.
"성과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자질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사람들의 말과 달리, 최고의 성법을 하는 자리에 있더라도 효과를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젊은 신관이 축하해 주었다.
축하받을 만했다.
육체 최적화 능력만 올라갔지만, 저 2레벨이 작은 게 아니었다.
거의 1년은 걸려야 올라가는 양이었다.
거기다, 몸이 느끼는 차이는 그 이상이었다.
물론, 새로운 능력을 얻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건 몸이 달라진 것은 확실했다.
당장 밖에 나가서 검을 휘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아직 할 일이 있었다.
"예식이 끝났으니 먼저 나가셔도 됩니다."
"저도 잠시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대신 움직이거나, 함부로 유물을 건드리면 안 됩니다."
다행히 젊은 신관은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한시름 돌린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개를 숙여서 보지 못한 많은 유물이 눈에 들어왔다.
피센 후작가에서 본 유물들보다 많은 유물이었다.
방금, 마나를 뿜어냈기 때문인지, 유물들은 전보다 더 낡아 보였고, 뭔가 힘이 없어 보였다.
‘없나?’
계속 둘러보았지만, 신검 같은 검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대단해 보이는 유물들도 몇 점 보였지만, 신검과는 관련이 없었다.
단검이라도 꺼내 놓았으면, 다른 유물 중에 용사들과 관련이 있는 유물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이물을 착용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젊은 신관마저 주저앉아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가슴에 집어넣었다.
손끝에 주머니가 만져졌다.
다행히, 기사의 검도, 유물 주머니도 신관들의 기도에 반응하지 않았다.
유물 주머니가 마나를 빼앗기기라도 했으면, 열어보지도 못했을 뻔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후작령 대장간에서 찾은 신검의 형제 검을 떠올렸다.
손에 검 손잡이가 잡혔다.
유물 주머니와 유물 가방의 내부는 밖의 세상과 분리된 일종의 아공간이었다.
안과 밖은 입구를 경계로 분리되어 있고, 마나도 능력도 양쪽을 오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물 주머니에 든 물건은 밖에서 찾을 수 없었고, 유물 주머니 안에 유물을 집어넣으면 그 유물의 능력이 봉인되는 것이었다.
피센 후작의 신검도 마찬가지였다.
이 유물 주머니 안에 있으면, 다른 검과 마나 선이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손에 쥔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가상의 회로를 찾아, 스위치를 올렸다.
딸깍.
검이 아직 주머니 안에 있으니, 마나 선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검을 꺼냈다.
검이 옷 밖으로 나오지 않게, 주머니에서만 빠져나오도록.
검 손잡이를 끄집어냈다.
살짝 손잡이가 옷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순간.
팟!
손잡이에서 마나로 만들어진 선이 쭉 그어졌다.
나는 제단을 쳐다보았다.
마나로 만들어진 선은 다른 곳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선은 제단 안, 아니 제단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이 검과 이어진 검은 제단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설마, 다른 종교의 성물이라고 숨긴 건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그럴듯했다.
성기사의 신검은 지금은 사라진 종교의 성물이었다. 교단이 다른 사람이 보도록 놔둘 리가 없었다.
이해가 되긴 했지만, 이건 문제였다.
제단 아래에 숨겨놓았으니, 찾아볼 방법이 없었다.
보기라도 해야지 다음 방법을 찾을 텐데…….
난감한 얼굴로 제단을 보고 있는 사이, 신관과 사제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회복하려면 멀었을 텐데, 숨만 가다듬고 움직일 모양이었다.
젊은 신관도 일어났고, 나도 홀을 나설 시간이 되었다.
안타깝지만 당장, 여기서 난동을 부릴 수는 없었다. 입구도 모르는데, 죽음을 각오하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포기하고, 살짝 꺼냈던 검을 다시 집어넣으려 했다.
그 순간.
드드드드드.
제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