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제14편 기사의 검 (2)
검을 꺼낸 총집사가 내게 검을 가져왔다.
그동안, 식순에 대해 여러 번 들어왔기에, 들은 대로 양손을 들어 건네준 검을 받쳤다.
내가 검을 받쳐 드는 것을 보고, 기사단장이 말했다.
"이렇게 평범해 보여도, 카를로스 초대 왕이 쓸 때는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다는 검이지. 그 뒤의 왕들도 검의 능력을 썼다고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험, 에헴."
한참, 기사단장이 말하는 중에 총집사가 헛기침했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왕에 대한 험담이 될 게 분명했다. 총집사가 말을 막은 게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막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기사단장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든 순간, 나는 세상과 단절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 * *
세상이 어두워지고, 잠시 뒤에 다시 밝아졌다.
죽을 때마다 느꼈던 변화였고, 수련 검을 잡을 때도 지금과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지만,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눈을 뜨니, 나는 땅이 뒤집히고, 산이 무너진 황폐한 땅 위에 서 있었다.
거기다, 몸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눈높이도 이상했다. 훨씬 키가 큰 것 같았다.
그래도 그동안의 경험 덕분에 침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눈앞에 얼굴을 들이댄 여성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아요?"
아름다운 여성이 나를 보며 묻고 있었다.
처음 보는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인세에 없을 대단한 미모였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본적이 있었던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실물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여성은 내 기억에 남아있었다.
"아, 괜찮아. 조금 생각에 잠겼을 뿐이야."
어라,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 정도가 아니었다.
입도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어디 안 좋은 줄 알았어요."
여성은 조심스럽게 볼을 쓰다듬었다.
"내 몸이 어떤지 잘 알잖아. 저 녀석이 치유까지 해 주었는데, 안 좋을 리가 없잖아."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나는 드디어 지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다른 사람 몸에 빙의한 것이었다.
아니, 여성을 보니, 빙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억을 보는 중이었다.
나를, 아니 내가 빙의한 남자를 걱정하는 여성은 영지의 집, 서재에 걸려 있는 그림에서 보았었다.
그리고, 왕궁의 복도에 걸려 있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었다.
좀 더 늙은 모습이긴 했지만, 그 미모는 그림에도 잘 표현되어 있었다.
그 그림의 여성이 맞다면, 눈앞의 여성은 초대 왕의 왕비이자, 왕국의 국모, 초대 왕을 대신해서 왕국의 기초를 세운 여걸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빙의한 남자는 초대 왕일 수밖에 없었다.
수련 검을 잡으니, 초대 왕과 싸우게 하더니, 기사의 검은 초대 왕의 기억을 보여주는 건가.
어떻게 된 건지 알게 되었으니, 나는 마음 편히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설마, 죽을 때까지 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
……아니겠지?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내가, 아니 초대 왕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몸을 두드리자,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돌리니, 신관 복장을 한 남자가 한심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몸이 반이나 날아가 버렸던 놈이 잘도 떠드네. 내가 아니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맞는 말이었는지, 초대 왕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딴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빌은 갔나?"
더 추궁할 생각은 없었는지 신관은 대답해주었다.
"그렇지 뭐, 멸망한 제국을 되살리겠다고 애들을 데리고, 휭하니 가버렸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설마, 빌이라면 차르 제국을 세웠다는 빌헬름 황제를 말하는 걸까?
"다른 녀석들도 떠났고, 너희들이 마지막이야."
대화를 들으니, 폐허만 남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이곳은 마왕이 봉인되었다는 바로 그 봉인지였다.
마왕과의 싸움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고대 제국의 수도. 지금은 숲과 밀림으로 뒤덮인 봉인지였다.
"우리도 이제 가야지."
"너희도 정말 나라를 세울 거야?"
"나를 따라온 병사 중에 살아남은 이들도 꽤 있고, 건사할 가족도 많아. 성을 쌓고 이리저리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으면 나라 비슷하게 되겠지."
"잘도 되겠다."
"당연히, 나 혼자야 무리지. 나야 레오노르만 믿으니까."
눈이 옆에 서 있는 왕비에게로 향했다.
"하기야, 레오노르랑 같이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네. 그런데 같이 가는 거 맞아?"
"아, 그렇네. 레오노르! 나를 따라와도 괜찮겠어? 내가 싸움박질밖에 몰라서 고생을 많이 할 거야."
왕비는 카를로스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다가,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노려보았다.
"내가 당신을 두고 어디를 갈 거로 생각해요. 아니, 잠깐, 그 말 청혼인 거예요? 안 돼요. 안 돼. 이런 말로 때울 수는 없어요!"
"나중에 욕먹어, 하려면 제대로 청혼해야지."
"맞아요. 나라 세우고, 제.대.로 청혼해야 해요!. 안 그러면 안 받아 줄 거예요!"
음, 내가 본 역사책들에는 나중에 따로 청혼했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정말 여기서 청혼한 것이 끝이었을 지도 몰랐다.
나는 왕비에게 애도를 보냈다.
"비오, 정말 교단을 세울 거야?"
"다들 합의했잖아. 테오도라같이 반대하고 떠난 이들도 있지만, 그들도 막지 않은 것을 보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니까."
"나는 잘 모르겠다. 다들 필요하다고 말하니 같이 동참하기는 하지만…….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어."
"옳은 일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일이야. 네가 만들 나라를 위해서도 이건 꼭 필요한 일이야."
사제는 슬픈 표정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대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왕비가 걱정되는 얼굴로 사제에게 물었다.
사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에요. 미래를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면 과거를 정리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요."
화아아악!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세상이 다시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죽을 때까지 보는 것은 아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나는 세상에 빛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 * *
세상이 다시 환해지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검을 들고 있었고, 총집사는 헛기침하고 있었다.
기억을 보기 전과 다르지 않은 광경이었다.
무척이나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는 한순간일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경험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수많은 회귀 경험 덕분에 겉으로는 침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검을 조심스럽게 들어, 허리에 걸었다.
번쩍이는 왕실 기사단의 판금 갑옷과 기사의 검을 허리에 차니, 조금 전 본 광경이 다시 떠올랐다.
단검을 쥐고 새로운 능력을 얻은 것처럼 기사의 검을 잡게 되면 뭔가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초대 왕과 레오노르 왕비를 직접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둘을 보게 된 것은 이 왕국의 국민으로 꽤 흥분되는 일이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흥분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이 대륙에 홀로 남은 유일한 종교인 교단이 용사 중 한 명이 세운 것이라니.
그것도 신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세운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 안다면 난리가 날법한 이야기였지만, 이건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웠다.
다른 사람도 내가 본 기억을 볼 수 있다면 모를까, 나 혼자 떠들어서는 배교자로 몰릴 뿐이었다.
더구나, 역대 왕이 아무 말이 없었던 것을 봐서는 이 기억은 나만 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역시, 지금은 입 닥치고 모른 척하자.’
별거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었다.
왕실 총집사와 기사단장, 나는 왕의 집무실에서 나와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기사단장은 총집사에게 주의를 받은 뒤에는 말이 없었고, 나도 말없이 두 사람 뒤를 따라갔다.
복도를 지나, 홀을 거쳐, 우리는 왕궁의 정문으로 나왔다.
정문 앞에는 신전에서 온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흰색의 수수해 보이는 마차였다.
마중을 나온 신관은 기사 대전 때 보았던 젊은 신관이 아니었다.
하기야, 그 신관은 지금쯤 제사를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중년의 신관은 무뚝뚝한 얼굴로 우리를 마차에 태웠다.
마차의 내부는 겉보기와 달랐다.
겉에서 봤을 때는 수수해 보이는 마차였지만, 안쪽은 왕실 마차와 걸맞을 정도로 화려했다.
왕실 인사와 대귀족들을 상대하는 수도의 신전이라면 이런 마차를 타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와 기사단장을 태운 마차는 천천히 왕궁을 빠져나갔다.
신전은 왕궁에서 멀지 않았다.
왕궁 안에서 신전의 첨탑이 보일 정도였다.
천천히 움직였지만, 왕궁을 나간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신전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추자, 예민한 내 귀에 찬양이 들려왔다.
이름 없는 신을 찬양하는 성가대의 노랫소리였다.
조금 전 훔쳐보게 된 기억 덕분에 성가대의 찬양도 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생을 기억하는 덕분에 따로 신앙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번 죽고 회귀하는 내 능력과 치유 능력을 펼치는 신전을 보고 반쯤은 이름 없는 신을 믿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방금 본 기억이 나에게도 꽤나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왕의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하는 기사가 기사의 검을 잡고, 이런 꼴이 되어버린 게 우스웠지만, 나는 표정을 가다듬고, 신전의 높은 첨탑 안으로 들어갔다.
신관들이 복도에 늘어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신관 사이를 지나,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신의 축복이 새겨진 커다란 문.
영지의 신전에서도 이것보다 작지만 같은 문을 보았었다.
이 문 안에는 제단이 있었다.
신께 제물을 드리고 축복을 기원하는 제단.
이 안에 찾고 있던 유물이 있을 게 분명했다.
기대되는 순간이었지만, 나는 다른 것을 보느라, 유물에 대해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검을 잡고, 기억을 보고 온 뒤에도 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 기사의 검은 기억을 보는 게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쉬웠지만, 용사의 유물을 잡는다고 매번 새로운 능력을 얻으라는 보장이 없었으니, 기억을 본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신전 복도를 걷고, 이 문 앞에 서게 된 순간, 나는 몸 안의 마나가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단검에서 능력을 얻을 때처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제단을 앞에 둔 상황이었지만, 나는 확인하기 위해 정보창을 열었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육체 최적화 : 레벨 20
- 마나 회로 구축법 : 레벨 2
- 마나 감응력 : 레벨 1
- 장비 소환 : 레벨 1
- 마나 방출 : 레벨 1
< 비인가 능력 >
- 마나 유형화 : 레벨 2
- 사자 회귀 : 레벨 2
심법들을 보고 배워 하나로 모은 덕분에 ‘마나 회로 구축법’이 한 단계 상승했다.
마나 감응력도 봉인이 완전히 풀렸고,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왕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달라진 것은 마지막 능력이었다.
봉인 중이었던 능력이 드디어 열린 것이었다.
다른 능력들처럼 봉인 해제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바로 레벨 1이 되어 있었다.
이름만으로는 별로 대단한 능력이 아닌 것 같지만, 나는 이 능력을 알고 있었다.
수련 검 속에서 20살 용사에게 접근하지도 못하고 졌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 능력 때문이었다.
나도 드디어, 기사에게 필요한 원거리 능력을 얻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