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제13편 기사의 검 (1)
뜻밖의 결과로 호위 기사 대전이 끝났다.
제2 왕자의 호위 기사가 여자라는 것도 뜻밖의 일이었고, 염력으로 기사 이상의 실력을 발휘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역시, 사람들의 관심은 뜻밖의 승자로 쏠렸다.
알렉스 데 그레시아.
그레시아 공작의 셋째 아들.
그리고 서자.
지금은 왕립 아카데미 2학년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던 사람들은 그의 왕립 아카데미 추천인이 공주의 어머니인 왕비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국, 왕비가 공주를 지키는 호위 기사로 미리부터 선점해 버린 건가."
제1 왕자가 조사해 온 내용을 듣고 혀를 찼다.
"그런 것 같습니다. 실력은 좋지만, 서자이니 그레시아 공작도 가문을 위해 금방 내놓았던 모양입니다."
"하기야, 실력 좋은 서자는 나름 가문에 골칫덩이일 테니."
공작의 결정을 이해하면서도 제1 왕자는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실력이 있으면 차라리 내 쪽으로 보내지. 왜, 꼬맹이 호위 기사로 보냈는지……."
"서자이지 않습니까. 다른 기사들에게 치일 게 뻔하니, 눈에 안 띄는 호위 기사로 보낸 거겠죠. 아카데미를 같이 다니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요."
부하의 말을 들으니, 이것도 이해가 되었다.
물론, 사실과는 꽤 다른 추리였지만, 다른 이들이 결과만 놓고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안 띄기는 무슨……."
"입학 때부터 빠르게 강해졌다고 합니다. 공작도 이건 예상을 못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아직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않은 기사 훈련생이었다. 여기서 더 얼마나 강해질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인재를 끌어들여야 동생과의 싸움을 편히 이길 수 있을 터인데…….
"끼어들어서 낚아채기는 어렵겠지."
"융화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어쨌거나 서자니까요."
왕세자인 자신의 주위로 몰려든 귀족들은 전부 뿌리가 깊은 전통 귀족들이었다.
서자가 끼어들어 한 자리를 차지하기는 어려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제1 왕자는 혀를 차고는 조사해온 서류를 벽난로에 던져넣었다.
같은 시각, 제2 왕자도 제1 왕자와 비슷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어차피 졸업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이 기사 후보생은 졸업 때까지 두고 보는 것으로 하자고."
왕자는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솔직히, 제2 왕자는 기사 대전으로 벌어진 다른 일 때문에, 공주의 호위 기사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호위 기사가 사직서를 던져놓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왕자의 생각보다 이네스의 충격이 더 컸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잘못했으면 왕족을 다치게 할 기술을 쓸 때부터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도대체 싸우는 도중에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왕족들을 향해 검 파편을 날려버렸으니, 그녀의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다행히, 상대가 잘 막아주어서 아무 피해도 없었고, 대전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네스는 그렇게 끝내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그녀는 대전이 끝난 뒤에 왕자에게 죄를 청했다.
대련에 지고, 왕족들에게 위험을 가했던 죄로 벌을 내려달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제2 왕자는 그런 일로 이네스에게 죄를 묻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이기면 좋았겠지만, 져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었다.
아마도, 왕자 자신이 이네스에게 별로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일 듯했다.
왕족들의 위험도 상대가 잘 막아주었으니, 문제없었고.
제2 왕자에게는 기사 대전이 끝난 순간부터 그때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었다.
실패한 이벤트였지만, 어쨌거나 이벤트가 끝났으니, 관심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런 제2 왕자에게는 죄를 청하는 이네스가 한심해 보일 뿐이었다.
왕자는 대충 용서한다는 말로 죄를 청하는 이네스를 내보냈고, 이네스는 그길로 사직서만 남기고 사라진 것이었다.
제2 왕자는 이네스가 진 것은 화가 나지 않았지만, 이네스가 사라진 것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라 보기도 좋았고, 다른 사람은 가지지 못한 특이한 호위 기사를 가진 것에 뿌듯하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도망쳐버리다니.
호위 기사 자랑을 하려다가, 오히려 소중한 장난감만 도망치게 만든 꼴이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제2 왕자에게 수도 방위대 소속의 장군이 말했다.
"군에서 호위를 맡을 만한 사람을 뽑겠습니다."
원래는 왕실 기사단에서 뽑아야 했지만, 제1 왕자의 입김도 들어가 있고, 다른 이유로도 왕실 기사단에서는 뽑을 수 없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장군의 말에 제2 왕자는 감사를 표했다.
자신의 부하를 호위로 넣고, 영향력을 키울 생각이라는 것이 빤히 보였지만, 다른 사람을 세울 수도 없었다.
물론, 이네스를 이긴, 공주의 호위 기사도 괜찮아 보이긴 했다.
하지만, 졸업 후에 생각하기로 했으니, 구차하게 다시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왕자는 왕실 기사를 호위로 세우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시커먼 남자 놈을 호위 기사로 세우기는 싫었다.
"이네스를 찾아보세요. 그녀의 집에도 확인해보고."
충격을 받아 떠났으니, 정신을 차리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었다.
장군이 취향에 맞는 여자 능력자를 데려오지 못한다면 왕자는 이네스를 끝까지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 뒤로 왕궁과 귀족들 사이에, 아이샤 공주의 호위 기사가 대단한 실력자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이고, 알려지지 않았던 기사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는 했지만,
서자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그 소문이 다시 가라앉았다.
서자라는 것을 알게 된 귀족들이 억지로 소문을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보다 빨리 소문이 가라앉아서 시끄러워지지는 않았지만, 왕족과 몇몇 귀족들의 머릿속에는 공주의 호위 기사가 남게 되었다.
* *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로, 나는 왕궁에 갇혀서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았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 재개를 하고,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신관의 축사도 미리 받아야 했고, 옷과 갑옷도 제사용으로 새로 준비해야 했다.
대련 전에는 이렇게 바로 붙잡히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아카데미에 결석계를 내기는 했지만, 대련만 생각해서 하루만 적어냈었다.
이렇게 되면 무단결석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출석 일수도 걱정될 지경이었다.
왕궁에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대공녀는 물론, 공주도 볼 수 없었다.
이 왕국은 그래도 교단과 거리를 두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왕궁 안에서도 교단의 힘이 작용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거리가 먼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당일 아침, 기사단장을 보게 되었다.
그는 전에 보았던 왕실의 총집사와 같이 나를 찾아왔다.
이 거인은 전과 달리, 깔끔한 기사 정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복장이 어떻든 그는 내가 알던 기사단장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기사단장은 나를 보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기사의 검을 가지러 가는 자리라서……. 형식적이지만, 내가 나서게 되었지."
기사의 검.
초대 왕인 카를로스가 평생을 사용한 검으로, 마왕을 봉인했을 때도, 이 왕국을 세웠을 때도 항상 손에 쥐고 있었던 왕국의 신물이었다.
역대 왕은 왕위에 오를 때 그 검을 들고, 선언했고, 군을 일으킬 때도, 작위를 내릴 때도, 기사의 검을 사용했다.
그런 중요한 신물을 가지러 가는 길이니, 왕실 기사단장이 옆에서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총집사와 기사단장을 따라, 복도를 걸어갔다.
내가 가는 길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제사에 피해를 줄까 봐 일부러 피한 모양이었다.
묘하게 전생의 풍습과 비슷한 모습에 얼핏 웃음이 나올뻔했다.
그렇게 한참을 따라가니,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왕의 집무실이 나왔다.
왕이 아픈 뒤에는 쓰지 않게 된 집무실이었지만, 기사들은 계속 지키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제사를 위해 기사의 검을 가지러 왔다."
"총집사와 기사단장, 그리고 아이샤 공주의 호위 기사. 확인했습니다."
문답을 한 뒤에 문을 가로막고 섰던, 기사가 옆으로 비켜섰다.
기사단장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총집사와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왕의 집무실이라서 그런지 문도 컸다.
기사단장도 들어가는데 머리를 숙이지 않아도 되었고, 뒤따라가는 나는 커다란 홀에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왕의 집무실에 들어오게 될 줄이야.
지금은 쓰지 않는 곳이라지만, 내가 이런 곳에 들어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눈이 바쁘게 움직이려고 하는 것을 열심히 막았다. 지금은 왕의 집무실을 구경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도, 곁눈질과 내 감각만으로 집무실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책과 서류, 화려한 그림과 장식. 그리고, 갑옷과 검들.
왕의 집무실답게 무척이나 크고 화려한 집무실이었다.
서류와 책들을 보니, 왕이 일하는 곳이 맞는 것 같았고, 화려한 그림과 장식을 보니, 이 왕국의 왕의 집무실이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거기다, 기사 왕이라서 그런지, 갑옷과 검도 장식되어 있었다.
크고 화려한 집무실이었지만, 예상과 다른 모습에 조금 실망했다.
많은 왕이 거쳐 간 덕분인지, 방의 장식은 일관성이 없었다.
책들도 중구난방이었고, 그림도, 다른 장식들도, 화려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더구나, 기사 왕의 집무실치고는 기사의 물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갑옷 장식과 벽에 걸린 검 몇 자루가 다였다.
총집사와 기사단장은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중앙에 놓여 있는 소파와 테이블을 지나서 안쪽에 놓인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왕이 업무를 보았었던 책상이었다.
지금도 매일 청소하는지, 책상은 반짝거렸다.
책상 주변에도 검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책상 뒤쪽 선반에 길쭉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무척이나 오래된 금속 상자였다.
‘이것도 유물일까?’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총집사와 기사단장은 책상 앞에 서서, 뒤쪽에 놓인 금속 상자를 보며 차례로 입을 열었다.
"왕실 총집사가 기사 왕을 대신해서 검을 찾습니다. 아픈 왕의 제사를 위해 검을 내어놓기를 바랍니다."
"왕실 기사단장이 검을 찾는다. 아픈 왕의 제사를 위해 검을 내놓도록."
차례로 말을 마치자, 유물로 보이는 금속 상자가 반응을 보였다.
딸깍.
무언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금속 상자의 뚜껑이 열린 것이다.
내 생각대로 유물이 맞았다.
말로 여는 것을 보니, 일종의 음성 자물쇠가 걸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총집사가 상자 앞으로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총집사는 열린 상자 앞에 서서, 상자 안에 두 손을 넣었다.
잠시 뒤, 그가 꺼낸 손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평범한 장검처럼 보이는 검이었다.
하지만, 이 검이 카를로스 왕의 검. 기사의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