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제9편 호위 기사 대결 (1)
평범한 2학년을 보내며 조별 과제의 다음 방문지를 고민할 동안, 내 문의는 왕실 관계자들 사이에서 문제가 되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왕비가 공주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담당자에게 말하고, 그 이야기가 다른 왕자들에게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처음 듣는 막내 공주의 의견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인지, 관심도 없던 왕자들이 대뜸 일을 키웠고, 그 결과를 내가 지금 듣고 있었다.
"호위 기사 간의 대결이라고요?"
"네……. 제일 충직한 기사를 뽑는 것이라면, 제일 강한 기사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제1 왕자께서 이야기하시고, 그걸 제2 왕자께서도 받아들이셨어요."
공주의 말에 조금 어질어질해졌다.
제단을 서기 위한 기사 전투라니.
평범한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이 나라 왕자들은 타협 대신에 뼛속까지 싸움으로 가득 차 있는 건가…….’
"알렉스 경은 참여 안 해도 괜찮아요. 두 왕자께서 제가 나선 일에 시비를 거는 것뿐이니까요."
공주는 저번 대화 이후로 나에게 공자라는 말 대신 ‘경’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고 있었다.
학생이자, 귀족 자제라는 뜻 대신에 기사라고 불러 준 것이었다.
아직 기사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나를 기사로 인정한 것이었다.
아직 어린 소녀에게 받은 호칭이었지만, 처음 듣는 호칭이라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어쨌거나, 호위 기사들끼리의 대결이라.
가볍게 말한 게 대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물론, 일을 이렇게 만든 왕자들에게는 잠시간의 여흥일 뿐이겠지만, 내게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왕자님들의 호위 기사와 싸운다면 아무 장소에서나 하지는 않겠죠?"
왕족의 호위 기사가 공식적인 대결을 펼치는데, 뒷마당 같은 데서 할 리가 없었다.
설마, 보러오는 사람도 많으려나…….
"처음에는 수도 원형 경기장에서 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었어요."
"설마, 카를로스 아레나 말인가요?"
수도에 있는 전생의 콜로세움 같은 곳이었다.
옛날에는 마물을 데려다가 싸움을 붙이기도 했었다는데……. 지금은 평범한 공연을 더 많이 하는 곳이었다.
아무튼, 객석만 만 석이 넘는 그런 공연장에서 할 생각이었다고?
그렇다면 절대 나갈 생각이 없었다.
"왕의 치유 제사를 드릴 기사를 뽑는 데 구경거리가 될 수는 없다고 해서 그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되었어요."
다행이었다. 나도 시작부터 그런 곳에서 구경거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라 여러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만, 결국, 왕궁에 있는 카를로스 연무장에서 하기로 했어요."
다행이었다. 왕궁이긴 했지만, 평범한 연무장이라면, 크게 시선을……. 어라? 카를로스 연무장?
"왕족 전용 연무장이에요. 참관인들도 많지 않을 거예요."
아니, 잠깐……. 왕족 전용 연무장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참관인이 많지 않은 게 당연했다. 왕족 전용 연무장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많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일 리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대련이라…….
그동안, 최대한 몸을 숨기던 내 입장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나는 공주를 다시 확인했다.
공주는 미안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대신 어떤 결정을 하든지, 괜찮다는 얼굴이었다.
나를 믿고, 맡긴다는 표정.
아직 어린 소녀의 표정으로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표정이었지만, 지금 공주에게는 너무 잘 어울렸다.
그녀 말대로 내가 참여 안 해도 상관없었다.
오랜 기간 신전에 있었던 유물이었다. 당장 어디로 갈 리가 없었다.
괜히 나서서 눈에 띄지 않아도, 나중에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살펴볼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신전에 있다는 유물을 꼭 찾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유물 주머니 속에 있는 검과 비슷한 검이 또 한 자루 생기는 것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결국 당장 쓰지 못할 검이 늘어날 뿐이었다.
이렇게 참가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한가득하였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계속 참가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내는 것은 결국, 내가 참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전에 있는 유물도 궁금했고, 제단에 들고 가게 되는 기사의 검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호위 기사들과 싸우고 싶었다.
공식적으로 왕자들의 부하들을 때려눕힐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저번 삶 이후로 조금 달라진 건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화끈하게 행동했던 덕분인지, 그 이후로 뭔가 마음속에 묶고 있던 끈 하나가 끊어진 것 같았다.
실수나, 잘못될 것을 걱정해서 움직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다시 도전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하겠습니다."
나는 공주에게 대답했다.
내가 왕자들의 호위 기사들과 싸우게 되었다는 것은 일반인들, 학생들 사이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공주의 말대로 왕의 치유 목적 제사였던 만큼 왕실에서 조용히 시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문에 빠른 몇몇 사람들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조별 과제 모임 시간에 발레아가 나에게 물었다.
"왕궁에 가서 결투한다면서요?"
아직, 다음번 방문지가 결정이 안 되어 조별 과제는 매주 미팅만 이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 두 번의 방문이 너무 빠르고 거창했었지, 원래 조별 과제라는 게 이렇게 모여서 자료를 모으고 미팅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다른 조별 과제 조들도 그렇게 했고, 우리가 두 번 다닌 정도만으로도 연말에 과제 제출에 문제가 없을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발레아처럼 다들 다음번 방문지 조사에 급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건 어디서 들었습니까?"
아이샤 공주를 쳐다보았지만,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에게 들은 게 아니에요. 제사 이야기도 들었고, 저번 모임에서 호위 기사가 기사의 검을 들고 기도한다는 말도 들었잖아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소문을 모아 봤어요."
이게, 소문을 모은다고 알 수 있는 일이었나?
"왕실 관료인 아버지가 제사 문제로 투덜거린다는 딸의 증언도 있었고, 갑자기 왕자님들의 호위 기사들이 강훈련에 돌입했다는 왕실 기사 아들의 말도 있었거든요."
아니, 아카데미에 그런 학생들도 있었나? 그보다 발레아는 그런 사람들을 다 알고 지내는 건가…….
"그런 소문을 이리저리 조합하니, 그런 결론이 나게 된 거예요. 확신은 아니었지만, 공자님이 맞다고 하셨으니, 정답이었던 거죠."
확신이 아니었는데, 내가 답을 알려 준 꼴이 되어 버렸다.
뭐, 내가 숨길 일도 아니었고,
"왕실의 일이니, 비밀은 지켜 주세요."
비밀로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 맡기면 그만이었다.
공주의 말에 발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해서 알아본 거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의외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을 잘 지키니, 공주도 그녀의 말을 믿었다.
"미리사 님도 부탁드려요."
공주의 말에 미리사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사의 표정을 보니, 부탁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대공녀님은 궁금하지도 않으신가 봐요. 다음 방문지 때문에 그러세요? 그래도 알렉스 공자님의 결투인데……."
결투는 아니었다. 그냥 제사에 참석할 기사를 뽑는 대결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발레아의 말처럼 대공녀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미리사처럼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별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
발레아가 묻자 대공녀도 그냥 있을 수 없는지, 차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저는 알고 있었어요."
대공녀의 말에 공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로 알려드리지 않았는데……."
공주는 비밀을 지켜달라는 말에, 대공녀에게도 말을 안 한 모양이었다.
대공녀는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왕실 인장으로 봉인되었었던 편지였다.
"초청장을 받았거든요. 저도 왕족이니, 구경하는 데 문제도 없고요."
공주 이외에 대공녀에게 초청장을 보낼만한 왕족이라…….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별로 기분 좋은 초청이 아니라, 거절하려고 했는데, 알렉스 공자님이 참가하신다니, 꼭 구경해야죠."
공주만 볼 줄 알았는데, 관람객이 늘어났다.
"나도 보고 싶은데……."
발레아가 아쉬워했지만, 그녀가 구경하기는 힘들었다.
"그보다, 모두 이기면 기사의 검을 쥐어 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럼, 옆에서 같이 볼 수 없을까요?"
발레아와 달리, 대결을 볼 수 있는 대공녀는 또 다른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그 기대는 공주가 무너뜨렸다.
"교단의 예식이라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할 거예요. 저도 왕자님들도 제사는 보지 못하니까요."
확실히, 유물들이 비치되어 있다는 교단의 제사를 보려면, 싸움에서 이기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다른 왕자들의 호위 기사들은 어떤 기사들이죠?"
발레아의 말에 그동안 들었던, 두 왕자의 호위 기사들을 떠올려 보았다.
카를로스 왕가는 호위 기사를 왕의 아들딸이 어렸을 때, 앞날이 창창한 예비 기사를 호위 기사로 세워, 호위 역과 같이 자라게 해 왔었다.
어린 나를 공주의 호위 기사로 세운 것도 그런 이유였었고, 두 왕자의 호위 기사들도 그런 이유로 젊은 기사들이었다.
제1 왕자의 호위 기사는 왕실 기사단에서도 유명한 기사였다.
얼마 안 있으면 선임 기사에 오를 것으로 알려진, 실력 있는 젊은 기사였고, 또 하나 유명한 점은 그는 부단장의 아들이었다.
아들이 제1 왕자의 호위 기사를 하고 있으니, 부단장이 제1 왕자의 파벌로 들어간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2 왕자의 호위 기사는 의외로 소문이 적었다.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말도 있었고, 영지도 없는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는 말도 들었었다.
가문과 상관없이 제2 왕자가 어렸을 때 실력에 반해 호위 기사로 들였다는데, 그 이후의 호위 기사 실력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었다.
공주에게 대결에 대해 들은 뒤에 경매장 주인에게까지 물어봤지만, 이렇게 소문이 적을 줄은 예상도 못 했었다.
클리세 대로라면 예상치 못한 강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열심히 준비할 뿐이었다.
* * *
제사 일자가 정해져 있어서 대련 일은 금방 정해졌다.
제사 일이 촉박해서인지, 제사일 전전날에 대련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주말로 시간을 미룰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아카데미를 쉬어야 했다.
교수들은 내 결석계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럴만했다.
벌써 결석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내가 교수라도 화를 낼 것 같았다.
‘2학년 성적은 잘 나오기 힘들겠어.’
그래도, 왕궁 방문이라는 사유를 보고 교수들은 바로 허락해 주었다.
왕이 아프든 말든, 왕립 아카데미는 왕실을 어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카트린은 결석계를 보고 나를 걱정해주었다.
"결국, 언젠가는 드러나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왕궁이 될 줄 몰랐네."
많은 시간 동안 나를 보아왔던 카트린이었다.
그런 내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을 보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왕궁은 복마전이라는 것을 잊지 마. 실력을 보일 때도 다시 한번 생각하고."
그녀 나름대로 최선의 조언을 해주었고, 나는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다음 날, 나는 아침부터 장비를 갖추고 왕궁으로 향했다.
등에는 대검을 메고, 허리에는 단검을 차고, 반지와 목걸이까지 걸고, 공주가 준비한 마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