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제8편 제사 (2)
조별 과제 모임이 있는 날.
수업을 끝내고, 언제나 모이던 그 응접실에 조원들이 모였다.
요하힘이 빠져서 남자는 나 혼자밖에 남지 않게 된 조별 과제 조였다.
다행히 다들 뒤로 빼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전생 때 같은 참사는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방문은 허탕이었지만, 두 번째에는 꽤 건실한 시간이었어요. 유물도 많이 보고,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어요."
대공녀의 말에 조원들은 모두 동의했다.
"후작가 방문을 주선해준 알렉스 공자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릴게요."
대공녀가 인사를 하고 다른 조원들은 내게 손뼉을 쳐주었다.
무척이나 훈훈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아카데미 생활을 계속 보낼 수 있다면 무척이나 좋을 텐데…….
아쉽게도 그건 한여름의 꿈일 뿐이었다.
대공녀와 공주, 내가 아버지를 죽였던 조금 무서운 소녀, 그리고, 자신은 모르겠지만, 입학식장을 박살 내버렸던 여학생도 있었다.
모두 하하 호호 웃고 있지만, 한 명씩 살펴보면, 이 조는 정말 무서운 집단이었다.
거기다 이 조에 모인 조원들 목적도 각기 달랐다.
유물을 찾아서 능력을 올리고 싶은 사람과, 형제들의 눈을 피하면서 다른 귀족들에게 얼굴을 알리려는 사람.
그리고, 재미를 위해 나를 따라다니는 학생과 얼떨결에 끼어든 여학생까지.
용사들의 유산을 되짚어가면서 그들의 행적을 확인하겠다는 조별 과제의 목적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나밖에 없었다.
‘암, 나밖에 없지.’
내가 스스로를 칭찬하는 동안, 조원들은 다음에 방문할 곳을 토의하기 시작했다.
"북쪽 국경 요새 근방에 유적이 꽤 있으니 이번에는 그곳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어요?"
공주는 제국과 맞닿아 있는 국경 요새로 가보자고 했다.
거리가 멀어, 다녀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드는 곳이었다.
제국과 맞닿은 곳이라 위험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녀 말대로 그 근처에는 발굴이 완료되지 않은 유적이 많이 있었다.
유적이 파헤치기 전에 제국과 국경선이 그어졌기 때문이었다.
위험 지역이라 학자들도 찾지 못했고,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모험가나 용병들도 유적들을 파헤치기 힘들었다.
덕분에 이름만 알려진 유적들이 여러 개 있었다.
그럴듯한 방문지였고, 공주의 말도 그럴듯했지만, 공주는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마, 요새를 지키는 장군과 병사들을 보고 인사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왕비와 공주는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인맥과 세력을 키울 생각인 것 같았다.
두 왕자의 시선을 피하며 세력을 일구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일이었고,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 살기 위해 하는 일이었다.
아카데미의 조별 과제에 자신의 정치적인 일을 끼워 넣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행동을 비웃을 수 없었다.
공주의 말이 끝나고 대공녀는 미리사에게 물었다
안타깝게도 미리사는 의견을 내지 못했다.
"저는……. 도서관에서 본 것밖에 없어요. 제가 뭘 추천하기는 무리에요."
요하힘 일과, 후작가를 다녀온 일로, 미리사의 자존감이 더 낮아진 듯했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그녀였지만, 조별 과제를 다니면 본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위쪽의 세상이었다.
이 세상은 철저한 계급 사회,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리사가 고개를 저은 뒤, 발레아가 손을 들었다.
"그레시아 공작가는 어때요? 알렉스 공자님도 여기 있고, 아카데미에는 마누엘 공자님도 있으니 방문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발레아는 황당하게도 우리 영지를 추천했다.
"그레시아 공작가 정도면 유물이나 역사 같은 것도 많이 남아있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그레시아 공작가가 어떤 유물을 가졌는지 들은 적이 없었다.
공작이 가지고 있는 검도 평범한 검이었고, 몇 가지 평범한 유물은 보기는 했었지만, 왕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공작가가 그런 유물만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 서자라서였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전처럼 화가 나거나, 포기한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레시아 공작가로 가는 것은 반대였다.
"유물이나 역사 때문에 그레시아 공작가로 가자고 한 게 아니죠?"
"당연하죠. 제가 유물에 대해 알 리가 없잖아요. 알렉스 공자님 영지를 보고 싶어서 꺼낸 말이에요."
뻔뻔한 이야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의외로 대공녀와 공주는 발레아의 이야기에 끌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레시아 공작령은 갈 수 없었다.
"너무 멀어요. 왕복하는데, 한 달은 써야 합니다."
조별 과제를 위해 수업을 많이 빼준다고 해도, 영지 하나를 방문하겠다고, 한 달 넘게 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네요."
대공녀는 아쉬운 얼굴로 발레아의 의견을 뒤로 미루었다.
발레아도 끝났으니, 내 차례인가?
"그럼 저는……."
"신전은 안 돼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공녀에게 한 소리를 들어버렸다.
대공녀의 집에서 너무 우긴 모양이었다.
"아니, 저도 추천할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요."
하지만, 나도 더 우길 생각은 없었다.
"아, 죄송해요."
"신전은 무슨 말인가요?"
대공녀가 내게 사과했고, 발레아는 끼어들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물었다.
발레아의 물음에 대공녀가 내가 한 말을 다시 이야기해주었다.
"알렉스 공자가 신전에 있는 유물을 보자고 하더라고요."
"아, 맞다. 신전도 유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던데, 그럼, 그거 괜찮지 않아요?"
발레아도 나처럼 사정을 알지 못했다.
역시 이 세상은 제대로 된 정보를 알기가 힘들었다.
대공녀는 다시 이유를 이야기해주었다.
제물로 쓰는 유물이라 일반인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샤 공주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 맞다!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거라면, 이번에 왕궁에서도 해요."
왕궁에서 신전에 제물을 바친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나와 조원 모두가 공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아버님이 아프시잖아요."
왕이 아프다는 것을 모르는 왕국인은 없었다.
그것 때문에 왕자들이 싸우려 하고 있었고, 영지들 치안이 박살이 났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얼마 뒤에, 신전에서 아버님의 치유를 위한 제사를 지내기로 했어요."
"다른 유물도 바치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대로 왕실에 충성하는 기사가 국보인 기사의 검을 들고, 제단 앞에서 기도도 드릴 거에요."
공주의 말은 대공녀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모두 흥미진진한 얼굴로 공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녀들보다 더 흥분했다. 뭔가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 그게 다예요."
다들 빤히 보고 있자, 공주가 어물쩍 말을 마쳤다.
공주의 말이 끝나자, 조원들은 저마다 말문을 쏟아냈다.
"제물로 바치는 유물이 뭐죠?"
대공녀는 유물에 대해 궁금해했고,
"그 기사의 검이라는 게 초대왕의 검 맞죠?"
발레아는 초대왕의 검에 관심을 보였다.
"신전에서 기사가 기사의 검을 들고, 기도한다니……. 멋있겠다."
그리고, 미리사는 기도하는 기사에 꽂힌 것 같았고.
나도 공주에게 물었다.
"왕실에 충성하는 기사가 어떤 기사를 말하는 거죠?"
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기 때문일까? 공주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전에는 왕의 호위 기사가 했던 일이라고 했어요. 왕의 호위 기사만큼 왕실에 충성하는 기사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왕의 호위 기사는 없는 걸로 알고 있었다.
왕실 기사단의 선임 기사 중 한 명이 했었는데, 왕이 아프고 난 뒤에 퇴임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왕의 호위 기사는 따로 없으니, 다른 왕족의 호위 기사가 하게 되겠죠. 두 왕자님의 호위 기사 중 한 명이 하게 될 거예요."
흥분한 와중에도 공주의 말속에서 왕자들에 대한 지칭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오라버니라고 했었는데, 이제는 왕자님이라고 불렀다.
공주의 심정이 전과 달라진 것 같았다.
어쨌거나, 공주의 말에는 틀린 게 있었다.
"왕족의 호위 기사는 한 명 더 있습니다."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켰다.
공주도 왕족이었고, 나는 그녀의 호위 기사였다.
"아……. 그렇네요. 그렇죠. 공자님은 저의, 공주의 호위 기사였죠. "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공주가 표정을 바꾸더니, 내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건 알렉스 공자의 명예에 관련된 일이었네요."
아니, 사과를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혹시나, 나도 낄 수 없을까, 살짝 던져본 말일 뿐이었다.
저렇게 과하게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공주가 나를 보고 힘있게 말했다.
"기다려주세요. 제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네, 넵."
처음 보는 공주의 패기 있는 말에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쉬는 날이라 왕궁으로 돌아갔던 공주는 해가 뜨자마자 왕비의 궁을 찾아갔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공주에 왕비는 기뻐했지만, 그녀가 꺼낸 말에는 그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어마마마를 믿고 물러가겠습니다."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해줄 거다."
"……죄송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왕비의 말에 공주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이제는 차려놓은 과자를 먹지도 않고 가버리네."
왕비는 아쉬운 얼굴로 차려놓은 다과를 바라보았다.
과자도 차도 손을 대지 않아, 다과는 처음 그대로 예쁘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아카데미를 간 뒤에는 점점 속마음도 이야기하고, 활기차게 변해가던 아이였다.
그래서 엄마로서 참으로 행복했었는데, 오늘 딸은 그 어린 모습을 벗어 버린 것 같았다.
아카데미 가기 전, 어른 모습을 뒤집어쓴 차가웠던 그때 모습처럼.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전과는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뭐가 다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과 달리 보기가 나쁘지 않아 보였습니다."
오랜 친구인 하녀장의 말에 왕비는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아쉬운, 미안한 미소였다.
"전에는 어른인 척했던 아이샤였지만, 오늘 찾아온 아이샤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어른이라는 가면을 쓴 게 아니라, 어린 나이에 그만큼 성장을 한 것이었다.
전처럼 걱정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왕비는 어른이 된 딸의 모습에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조금이라도 오래 왕실 일은 생각지 않고, 즐겁게 지냈으면 했는데……. 역시 무리였을까요?"
"평범하게 지내시기에는 공주님이 너무 똑똑하십니다."
"그렇죠?"
거기까지 말한 왕비가 표정을 바꾸었다.
딸이 결심했는데, 어머니가 서러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 제사를 진행하는 관리를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다만, 갑자기 움직이시면, 두 왕자가 반발할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괜찮아요. 잘 안돼도 그것으로 배우는 게 있을 거고……."
하녀장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잠시, 다과를 보던 왕비가 고개를 들었다.
"졸업할 때까지는 좀 남기는 했지만, 우리 딸도 결심한 것 같으니, 나도 이제 움직여야겠지."
혼자서 결심을 다진 왕비가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레시아 공작님께…….
로 시작되는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