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제7편 제사 (1)
첨탑에 이어진 선을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차, 이렇게 놔두면 안 되지.’
수도에는 이 선을 볼 수 있는 왕족이 더 있었다.
그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다.
나는 바로 마나를 흘려서 기능을 막았다.
스위치를 끄자, 하늘을 가로지르는 선이 사라졌다.
"안 돼요.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다음 조별 과제 방문지를 수도 신전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대공녀가 바로 반대를 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쉽지만 안된다는 사람을 붙잡고 억지로 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상황을 알려줄 수도 없고.
급한 것 같지는 않으니, 차근차근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 * *
2 왕자는 왕궁 정원의 벤치에 앉아 하늘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조금 전에 이상한 선이 나타나서 신경을 거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찝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잘못 본 건가."
2 왕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하늘을 가로지르던 선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신지요."
"아냐, 내가 착각을 한 거겠지."
2 왕자는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작년에 죽은 다니에르 자작에게는 숨기는 게 없었는데, 그가 죽고 난 뒤에는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직접 계획을 세우고, 인맥을 관리하려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그로 인해 처음에는 실수도 많이 했었다.
대공녀에게 했던 일들도 실수 만발이었다.
실수란 것을 깨닫고 다시 조심스럽게 접근하려고 했지만, 이미 대공녀와의 사이는 무척이나 안 좋아진 뒤였다.
아직 대공녀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기에, 2 왕자는 천천히 시간을 들이기로 했다.
2 왕자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확인했다.
왕국 중앙군의 장군과 수도 치안 대장, 그리고, 개혁파라고 불리는 젊은 귀족 파벌의 수장.
중앙군과 치안대, 그리고 젊은 귀족들, 이들이 바로 2 왕자의 파벌이었고, 1 왕자에 대항하기 위한 그의 힘이었다.
작지 않은 힘이었지만, 아쉽게도 1왕자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는 세력이었다.
첫째라는 위치와 왕세자라는 권위가 가지고 있는 힘은 쉽게 따라잡기 어려웠다.
가만히 있어도 수많은 귀족이 따르고, 왕가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고리타분한 놈들은 전통이 뭔지, 무조건 1 왕자를 따랐다.
오랜 시간, 열심히 세력을 늘려왔지만, 세력을 뒤집기는 요원해 보였다.
"그렇다고, 왕실에 흠집을 내는 불손한 소문을 내는 일을 하기는 어려웠지요."
나태한 생활 정도는 1 왕자에게 조금의 상처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하게 가짜 소문을 만들어내게 되면 그 똥물이 왕실에 튀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왕족인 자신에게도 피해가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두 왕자 사이에 말 없는 합의가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이제 그 합의를 깰 때였다.
2 왕자는 테이블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왕실에 피해가 가는 것 같아 안타깝긴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이야기가 스스로 퍼져나가는데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지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면 알아서 잠잠해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1 왕자가 저렇게 화를 내는데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예 근거가 없는 소문은 아닐 게 분명했다.
"돌아가신 왕비님 일이라 얼마 전이었다면 아버님이 화를 내실지도 몰랐겠지만……."
자리에 드러누운 왕에게 이런 소문을 전할 리도 없고, 듣는다고 뭔가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한참 앞서가는 1 왕자의 약점이 뜬금없이 튀어나온 상황이었다.
이걸 지금 후벼파지 않으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소문 자체가 충격적이니, 뭘 더 보탤 필요 없이 더 많은 사람에게 퍼트리시면 좋겠습니다."
2 왕자의 말에 모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가 왕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서 아이까지 낳았다는 소문이었다.
여기에 뭘 더 보태기 어려울 정도의 추문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풀어서 사실관계를 좀 더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부만이라도 사실이라는 증거를 잡을 수 있다면 세력 균형을 흔들어 버릴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의 파벌 사람들을 모은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소문이야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일부라도 증거가 나오게 된다면 소문이 더 이상 소문이 아니게 될 터였다.
왕비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가 나오면 1 왕자가 왕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었다.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으니 왕의 아들인 것은 확실하지만. 상관없었다. 1 왕자의 나태함 때문에 제대로 훈련도 안 된 능력이었다.
능력을 가지지 않았다고 믿게 할 자신이 있었다.
왕실 기사단장도 돌아오고, 추문도 퍼져나가고 있었다.
왕세자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되었다.
그렇게 되면 다른 곳에 손을 벌리지 않아도, 충분히 한판 붙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마친 2 왕자가 착시가 보였던 첨탑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탑이었다.
"그 제사인가 뭔가 결국 진행한답니까?"
"네, 오랫동안 관습처럼 내려오는 일이라……."
"에잉, 돌아가실 때 돼서 돌아가시는 건데, 괜히 일만 벌이는군."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되면 1 왕자나 자신이나 오히려 큰일이었다.
아직 준비가 부족하니, 조금 더 버티시는 정도면 충분했다.
* * *
나는 검을 유물 주머니 속에 담아 두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수업과 훈련, 이제야 겨우 2학년 같이 느껴졌다.
신전의 유물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보았지만, 대공녀의 말대로였다.
한번 신전에 들어간 유물은 일반인도 신자들도 볼 수 없었다.
몰래 들어가서 확인하는 것도 무리였다.
다른 도시의 신전이라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수도에 있는 신전은 이 왕국 전체를 관리하는 교단의 중앙 신전이었다.
제국에 있는 신전 다음으로 큰 신전으로, 지키는 병력도 따로 있었고, 전투가 가능한 신관과 사제도 많았다.
결국, 신전에 있는 유물을 확인해 보는 것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업을 받고 있는데, 이바나가 나를 찾아왔다.
"휴학하고 영지로 다시 내려갑니다. 약속이 있으니,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소문을 퍼트렸을 때,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 왕세자가 약점을 수도에 놔둘 리가 없었다.
"그때 일 때문입니까?"
"관련이 없지는 않아요."
말을 하는 이바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좀 더 있고 싶었는데……. 높은 분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요."
이바나의 눈에 불만이 스쳐 지나갔다.
저건 왕세자에 대한 불만일까?
나는 그녀의 말에 평범하게 대답했다.
"아쉽네요."
영지로 돌아간다면,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터였다.
비상 수단 하나를 이렇게 잃어버리게 되다니.
무척이나 아까웠다.
"그래도, 약속은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저를 구해주신 것도. 언제고 찾아오시면 제 능력을 심어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왕세자와 다르게 약속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소녀였다.
"영지에 가서도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갈게요."
소문을 퍼트려놓고도, 나는 그녀의 앞길을 빌어주었다.
찾아가는 이유도 능력을 받기 위해서였고.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이바나는 내 말에 환한 얼굴이 되었다.
"네,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생명의 은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듯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런 호감은 사라질 터였다.
괜한 양심에 찔릴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한 사람이 퇴장하고, 다른 사람이 내 일상에 끼어들었다.
"아니, 한창 바쁜 놈이 왜 여기 온 거야!"
"바빠져서 훈련할 시간이 부족하니까 왔죠. 짧은 시간에 효과적인 수련을 할 곳이 여기밖에 없잖습니까."
아카데미 개인 훈련장 건물 지하의 한 훈련장.
세우타 공작과 훈련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나는 공작과 말싸움을 벌이는 거인을 보게 되었다.
역시, 컸다.
훈련장을 지하에 만들어 천장을 많이 높이지 않았으면, 검조차 휘두르기 어려워 보일 정도였다.
왕실 기사단장이 훈련장에 와 있었던 것이다.
"대련할 상대가 필요하지? 최고의 상대가 준비되었지."
내가 들어가자, 기사단장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하면 되는데, 네놈이 무슨 대련을 한다고."
"아니, 팔찌에 넣은 쥐꼬리만 한 마나를 가지고 얼마나 싸울 수 있다고요."
기사단장의 말에, 나는 슬그머니 주머니에 손을 넣어 팔찌를 잡았다.
그 뒤에 팔찌에서 마나를 빨아내기 시작했다.
저번 훈련 때에는 기사단장을 소개받으려고 일정량만 충전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마나를 넣어 왔다.
하지만, 기사단장이 와 있으니, 이런 많은 양의 마나는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세우타 공작에게는 죄송했지만, 노인공경을 할 때였다.
"옆에서 훈수나 잘 둬주세요."
"이놈이!"
여느 때처럼 두 남자는 투덕거렸고, 나는 가지고 온 대검을 손에 쥐었다.
대공녀 집에서 장검을 또 부러뜨린 덕에, 병기를 관리하는 교직원에게 완전히 찍혀버렸다.
여러 번 부러뜨린 것도 잘 바꾸어주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한도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 학기에는 더 안 줄 거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대검을 등에 지고 다니게 되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더 끌게 되었지만, 오늘은 이 대검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대검을 들고 자리를 잡자, 노인이 혀를 차고, 한쪽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좋아! 한바탕해보자고!"
거대한 검이 크게 휘돌아왔다.
역시, 앞에서 보니, 박력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마나를 가득 일으킨 뒤에 대검을 비켜 세웠다.
쿠우웅.
충돌음이 훈련장을 가득 울렸다.
"크, 역시, 이 맛이지. 내 검을 막아서는 놈이 없어서 훈련이 안 된다니까."
벌벌 떨리는 내 팔을 보면서도 기사단장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어서, 그는 신나게 검을 휘둘렀다.
쾅, 콰앙, 쾅.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훈련장을 울리는 사이, 지켜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1 왕자 패가 뭐라 하지 않아?"
노인은 대련을 훈수하는 게 아니라, 기사단 이야기를 꺼냈다.
"뭘, 뭐라 하겠어요. 다 제자리에 돌아간 것뿐인데. 으쌰!"
나는 말을 하기도 힘들었는데, 기사단장은 노인의 말을 쉽게 대답했다.
"아니, 전에도 네게 찝쩍거려서 그 숲으로 도망간 거잖아."
"살짝 피한 거지, 도망간 건 아닙니다."
도망간 거와 뭐가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머리 위에서 내려찍는 검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콰앙!
단단한 바닥이 푹 패였다.
저거 배상을 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한바탕 난리 친 덕분인지, 별말 없던데요?"
기사단장은 검을 휘두르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기사단을 대숙청한 것도 아니고, 몇 명 일반 기사로 강등한 정도인데요. 뭐."
그것만으로도 큰일일 텐데.
그 뒤로도 노인과 기사단장은 대화를 이어갔다.
기사단과 왕궁에 관한 이야기, 파벌과 귀족에 관한 이야기들이 대련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게 훈수였나?’
기사단장이 말한 훈수가, 검에 대한 훈수가 아니었다.
세상에 대해, 귀족과 기사단에 대해 알려주는 그런 훈수였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훈련과 교육을 받은 주중의 마지막 날.
다시, 조별 과제 조원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수도 신전에 들어갈 수도 있는 이벤트에 대해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