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제6편 두 번째 신검 (2)
대공녀는 의아한 눈으로 응접실 테이블에 올려놓은 천 뭉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건 뭔가요? 수도 구경하러 나간 날에 가져온 걸 봤는데."
보고도 묻지 않다니. 역시 대공녀는 품위가 있었다.
나는 천을 풀었다. 천에 쌓여 있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이 뒤틀리고, 깨져나간 망가진 검.
마나를 흘려보니, 겉모양만큼이나 유물의 능력도 망가져 있었다.
대공녀는 눈을 가늘 게 뜨고, 검을 노려봤다.
"설마……. 그냥 모양만 비슷한 검은 아니겠죠?"
나는 확인해 보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대공녀가 검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망가진 검으로 스며들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나가 검을 타고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대공녀의 마나는 막힌 곳을 우회하고, 표면을 타고 흐르면서 검의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참을 살핀 뒤, 대공녀가 손을 뗐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공녀에게 물었다.
"설마, 이것도 못 고치는 건 아니겠죠?"
대공녀 프리다는 나를 흘겨보았다.
"그 구슬만 안되었던 거예요. 단검도 고쳤는데, 이 정도 검은 고칠 수 있어요."
확실히 단검이 더 대단했다는 말이었다.
하기야, 단검은 시끄러운 에고가 들어 있기는 했지만, 용사가 직접 사용했던 유물 검이었다.
이 검은 잘 고쳐도 ‘신검’의 형제 검 정도일 테니, 단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구슬을 확인한 지도 꽤 되었다. 건드리면 점점 약해져서 주머니에 두고 꺼내지 않았다.
아직은 괜찮았지만, 언제까지 유물로서 기능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재촉할 수도 없는 일. 지금까지처럼 열심히 망가진 유물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검부터 고치라는 말이겠죠?"
대공녀는 크게 심호흡하고 검에 손을 올렸다.
검에 다시 마나가 흘러 들어갔다. 전과 다른 형태의 마나, 수리를 위한 대공녀의 능력이었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검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휘어졌던 날이 점점 펴지고, 뭉개졌던 날들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빛을 잃었던 검이 다시 빛을 찾았고, 검에서 맑은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웅.
마나가 검을 흔들어 나는 소리였지만, 마치 무협지에서 보던 검명 같았다.
잠시 뒤, 대공녀는 멀쩡하게 돌아온 검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긴 시간도 아니었지만, 대공녀는 땀 범벅이 되어 있었다.
"보기만 비슷한 게 아니네요. 감정을 해봐도 후작가에서 본 검하고 비슷한 검이에요. 도대체 이 검을 어디서 찾은 거죠?"
경매장 주인은 검을 감정하고, 그 내역부터 가진 능력까지 죄다 알아내던데, 대공녀는 그 정도 실력은 안 되는 듯했다.
물론, 대공녀의 능력은 유물 수리였고, 감정은 유물 수리에 딸려온 부가적인 능력일 뿐이었다.
나에게는 대공녀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었다.
덕분에 단검이 용사의 유물이라는 것도 들키지 않았고, 구슬도 어떤 물건인지 들키지 않았으니.
"한 대장간에서 찾았습니다. 고물들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냥, 운이 좋은 것일 뿐인가요? 신기하네요. 구경을 나가서 이런 검을 바로 찾아내다니."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런 대답밖에는 할 수 없었다.
공주가 하늘에 그어진 마나 선을 보고 따라가서, 검을 찾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비밀들을 공유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검을 잡아보았다.
그 뒤에 마나를 밀어 넣어보았다.
마나를 밀어 넣자, 검이 은은하게 빛났다.
"잠시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나는 대공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져서, 허리에 찬 장검을 꺼내 다른 손에 들었다.
그리고, 꺼낸 장검에도 마나를 집어넣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훈련을 위해 만든 평범한 장검이었지만, 생각보다 잘 만든 검이었다.
마나도 잘 받아들이고, 생각보다 튼튼해서 나도 실전에 여러 번 사용했었다.
지금도 마나를 잘 받아들였다.
날이 나가서 대장간에서 수리를 받기는 했지만, 마나가 흐르는 검날은 새 검처럼 윤기가 흘러내렸다.
마나가 깃든 검은 보통 검보다 몇 배는 강했다.
철근도 잘라낼 수 있고, 마물의 몸도 베어낼 수 있었다.
마나를 집어넣은 검에 수리가 끝난 유물 검을 가져다 댔다.
검을 대는 순간,
"큭!"
가슴에서 격한 통증이 일어났다.
검에 관통당한 것 같은 충격이었다.
놀란 나머지 마나가 풀려버렸다.
"괜찮아요?"
대공녀도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생각보다 심한 고통이었다.
기사단장과 대련 할 때 신검의 능력을 봉인할 수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마나를 많이 넣지도 않았는데 이런 고통이라니.
검에 마나를 밀어 넣어 막으려 해도 이런 식으로 공격이 들어오면 소용이 없었다.
‘방어 무시’라는 게임 스킬을 떠올린 게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마나를 밀어 넣는다면 검이 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상대방이 이 검의 능력을 몰라야 하겠지만……."
검의 능력을 막을 수 있는 나 같은 능력자가 아니더라도, 검이 닿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으니,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검끼리 닿으면 위험하다는 점만으로도 싸움의 유리함은 말할 수 없을 정도지.’
보이지 않는 검기로 신검의 능력을 막지 못했다면, 기사단장과의 싸움에서 내가 질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다. 상대방 방어를 무시하고 내부를 공격하는 검이라니.
여러 가지 활용법이 계속 떠올랐다.
"하지만, 내놓고 쓸 수는 없겠죠?"
내 말에 대공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검은 피센 후작가의 보물, ‘피센의 신검’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검이었다.
고쳐놓고 보니, 그 능력만큼이나 생긴 것도 비슷했다.
피센 후작의 신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검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들고 다니다가는, 보물을 노리는 승냥이들만 가득 꼬일 게 분명했다.
차라리 팔까?
내가 여태 팔았던 유물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대단한 유물이었고, 팔면 한 재산 얻을 수 있는 보물이었다.
이 검이라면 수도에 있는 공작의 저택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유물을 마구 팔 생각이었으면, 반지도, 석궁도, 주머니와 배낭, 내 검들도 예전에 팔았을 것이다.
솔직히 지금도 돈은 충분히 많았다.
아마, 내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 중에서 제일 부자일지도 몰랐다.
결국, 팔기도 싫고, 내놓고 쓸 수도 없으니, 당분간은 주머니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았다.
"이 검도, 그 검 꼴이 되는 건가……."
훈련용으로 몰래 써야 하는 검은 검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쉬며, 검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지켜보던 대공녀가 입을 열었다.
"결국, 창고행인가요?"
"당분간은요."
"흠, 그럼 검 수리비는 어떻게 하려나……."
아, 그게 있었다.
대공녀가 수리해주는 게 공짜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팔 생각도 없고, 쓸 수도 없었다.
그냥 나중에 준다고 해야 하나?
내가 난감해하자, 대공녀가 픽 웃었다.
"선물 받을 것 골랐어요. 마침 등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그걸로 할게요. 검 수리비는 선물 받은 것으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계속 도움받고 있는데, 이런 것까지 받아낼 생각은 없어요."
다행이었다. 나는 대공녀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었다.
무시무시한 공국왕에서 이런 딸이 나다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었다.
조금 무안해진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다음, 조별 과제 방문지는 정하셨습니까?"
"아뇨. 이제 오늘 돌아온걸요. 벌써 정할 리가요. 다음에 만날 때 같이 정해야죠."
이런, 너무 급하게 이야기를 튼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신전은 어떻겠습니까?"
음식점에서 훔쳐 들은 뒤로 신전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교단이 생각보다 많은 유물을 모으고 있다는 것도 이유는 아니었다.
다만, 언젠가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이었다.
봉인지를 가게 되었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고, 수도에 오게 되었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었다.
왜 이제야 신전을 가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가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대공녀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신전에 있는 유물을 보기는 어려워요."
그녀가 창 쪽을 바라보았다.
"신전에 들어간 유물은 신께 제사를 올리기 위한 공물이에요. 교단에서는 공물이 된 유물들을 다시 공개하지 않아요."
몰랐던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놓치고 있는 게 많다니.
이쪽 세상에서도 실무는 따로 배워야 하는 걸까?
"그래서 명단을 만들 때도 일부러 빼놓았는걸요."
목록에 빠진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더 어려운 문제였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되면 더 주장하기 곤란했다.
어차피, 말을 돌리려 한 것일 뿐이었다. 나는 이 정도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대공녀에게 알겠다고 말한 뒤에 나는 검을 싸맸던 천을 집어 들었다.
다시, 이 천으로 검을 감싸고, 집에 돌아가 주머니에 넣어둘 생각이었다.
언제 꺼낼지 모르겠지만, 그동안은 주머니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천으로 감싸려 할 때, 대공녀가 급하게 말했다.
"아 맞다, 검에 막혀 있는 기능이 있더라고요. 수리를 안 해도 되는 부분이라서 막혀 있는 게 더 이상했어요."
그녀의 말에 나도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처음 검을 발견했을 때, 마나 선을 뽑아내는 기능을 막아 놓았었다.
전부 고쳐 놓았으니, 막아 놓은 기능도 확인해 봐야 했다.
천으로 검을 덮는 대신에 조심스럽게 검에 마나를 흘러 넣었다.
검 속에 있는 가상의 회로로 마나를 흘려 넣어 잠가 놓았던 스위치를 열었다.
딸각.
들리지는 않았지만, 스위치가 올라갔고, 검에서 마나로 이루어진 선이 다시 모습을 보였다.
가느다란 실 같은 선이 검 끝에서 출발해 천장으로 이어졌다.
다행히, 기능에는 이상이 없었다.
나는 검을 들고, 창문으로 걸어갔다.
후작가 방향으로 제대로 이어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라?"
하지만, 창문 앞에 선 나는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선이 엉뚱한 곳으로 향해 있었다.
후작가 방향으로 선이 이어지지 않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늘로 솟구친 마나 선은 다시 아래로 꼬꾸라져서 아래로 처박혀 있었다.
마나 선은 수도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쭉 이어진 선은 수도의 한 건물과 이어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보이는 높은 첨탑이 있는 건물이었다.
나는 건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다음 조별 과제 방문지는 교단의 수도 신전으로 해야겠습니다."
대공녀가 반대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나의 선은 아름다운 첨탑을 자랑하는 수도의 신전으로 이어져 있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이 검과 비슷한 검이 수도의 신전에 있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