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제2편 신검 추적 (2)
연무장 중앙에 서서 내게 검을 겨누고 있는 기사단장은 지금 다시 봐도 후작과 비슷했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것은 후작과 달리 분노한 기사의 기백이었다.
저렇게 비슷한 얼굴이 다른 느낌을 내는지.
화난 얼굴을 보면서도 무척이나 신기했다.
아니, 잠깐,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저번에 봤을 때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분명 서로 예의를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한 번도 후작가 검술을 무시한 적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기사단장 옆을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가엘의 멍든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파란색이 빠질 정도로 하얗게 변한 것을 보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한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사실을 이야기해서 오해를 바로잡으면 그만이겠지만, 그것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후작가 검술을 알려주는 일에 신검을 쓰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니, 같은 장검을 쓰도록 하겠다."
저렇게 말하는데,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건 좋은 기회였다.
"그럼, 저희가 대련하는 동안, 저희 조원들이 신검을 잠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곳에 가져가지 않고, 이곳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정중한 내 말에 기사단장은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상관없지. 형님의 허락도 있었으니, 살펴보는 것은 문제없다. 대신, 마나를 넣을 때 조심하도록."
나는 바로 ‘신검 추적자’, 레스티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역시,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기사단장에게 달려가, 신검을 건네받았다.
피센 후작가의 신검을 보러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경매장 주인은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멀리서 검을 보는 게 아니라, 직접 만질 시간을 달라는 부탁이었다.
능력을 써서 신검을 감정하고 파악하려면 직접 만져보는 쪽이 더 효과가 큰 모양이었다.
거기다, 살펴볼 시간도 최대한 길게 늘여달라고 했다.
오래 살피면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상식 같은 이야기였다.
원하는 게 많다고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으니, 최대한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지금 그 기회가 찾아왔다.
연무장 구석으로 가서, ‘신검 추적자’와 대공녀가 열심히 검을 살펴보는 것을 보고, 나도 검을 뽑았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대검이나, 허리에 찬 단검이 아니라, 평범한 철검이었다.
상대가 유물을 쓰지 않는데, 내가 유물을 쓸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나보다 고수가 아니었다. 충분히 같은 무기로 상대할 수 있었다.
먼저 검을 가져가서인지, 기사단장은 전처럼 신검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다.
나를 보고 고개를 계속 갸웃거렸을 뿐이었다.
[조금 전에 본 검은 분명, 신검은 아닌데, 뭔가……. 신검하고 비슷한…….]
하지만, 똑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 아니, 검은 있었다.
[분명, 진짜 신검과 연관이 있습니다. 제 몸을 걸고 맹세합니다.]
맹세까지 똑같았지만, 한번 들었던 소리였기에 대충 흘려넘겼다.
지금은 단검의 말을 들을 때가 아니었다. 기사단장과 대련을 해야 했다.
전에도 두 번이나 싸워보았지만, 이번에는 빨리 끝내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붙은 대련이었다.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련이라 마음은 편했다.
한동안 머리를 쓰느라 힘들었었다.
이렇게 편하게 검을 휘두르는 게 얼마 만인지.
나는 화가 난 기사단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대련이 시작되고, 전처럼 기사단장은 내 검에 놀랐다.
기사단장만이 아니라,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도 놀랐다.
조원도, 후작 아들 가엘도.
시간을 끌려면 어쩔 수 없이 비등한 실력을 보여줘야 했다.
그런 실력을 보여 주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연무장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 편하게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전처럼 열심히 검을 휘두르며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지날수록, 기사단장은 신이 났다.
그는 반쯤 무아지경에 들어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한참 동안 자신과 비슷한 실력자와 싸우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비슷하게 느껴지는 실력자를 만났으니, 신이 나는 게 당연했다.
아쉽게도 나는 기사단장처럼 몰입할 수 없었다.
이미 기사단장과는 세 번째 싸우는 것이었다.
처음 싸움 때는 지금 같은 대련이었지만, 몰입해서 싸웠고, 두 번째는 거의 실전과 다름없는 싸움이었다.
모태가 되는 용사 카를로스의 검술을 보아왔기에 이제는 어느 정도 후작가 검술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간을 끌어야 하는 대련이었으니, 몰입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대련은 더 비등하게 흘러갔다.
시간이 흐르고, 마나로 주변을 살피던 나는 레스티가 검에서 손을 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슬쩍 곁눈질로 레스티를 확인했다.
나를 보고 있었는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신검 추적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가 끝난 것이다.
캉!
"큭."
문제는, 잠깐 눈을 돌리는 사이, 기사단장의 검이 치고 들어왔다.
나는 바로 밀리기 시작했다.
역시, 눈을 돌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기사단장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기분 좋았던 몰입이 깨져서일까?
"이런 대련에서 눈을 돌리다니, 나와의 대련이 그렇게 값어치가 없다는 건가?"
아니, 내가 대련 도중에 눈을 돌려서였기 때문이었다.
화가 났기 때문인지, 기사단장의 검이 거칠어졌다.
기세를 타버려서인지, 밀리기 시작한 흐름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마나를 움직였다.
검 끝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반칙이었지만, 빨리 대련을 끝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서걱.
일렁이는 검이 기사단장의 검을 스쳐 지나갔다.
충돌음이 들려야 했지만, 내 검은 기사단장의 검을 소리 없이 베어버렸다.
땡그르르르.
잘려 나간 검날이 땅에 떨어졌다.
기사단장은 어이없는 눈으로 잘려 나간 검을 쳐다보았다.
"검이 많이 약해진 모양입니다. 다음에 신검으로 다시 대련해보죠."
"그럴 리가, 다르지 않을 검일 텐데……. 거기다, 검이 잘려 나가는 소리를 내가 잘못 들을 리가 없어."
역시 이 정도 실력의 기사에게는 대충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카트린의 단검으로 배운, 보이지 않는 검기로 잘라 냈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슨 말로 속여야 하나, 고민할 때.
화아악.
연무장 한쪽에서 마나가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환하게 빛나는 검을 볼 수 있었다.
대련하는 동안 살펴보라고, 대공녀와 레스티에게 건네준 ‘신검’이었다.
빛나고 있는, 그 신검은 지금 대공녀가 들고 있었다.
대공녀는 신검을 들고 난감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바로 감이 왔다.
대공녀가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
기사단장에게 할 변명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나는 바로 대공녀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나보다 빨리 움직였다.
자신의 검이 빛나게 된 것을 알게 된 그는, 바람을 가르며 검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나 빠른지, 방금 전 대련은 실력을 숨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는 대공녀의 손에 들린 검을 바로 낚아챘다.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다행히 빛은 점점 가라앉았고, 잠시 뒤에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검에 이상이 있습니까?"
만약을 위해, 대공녀 옆에 서서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검을 한참 동안 살피던 기사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괜찮네. 문제가 있지는 않아. 살짝 감각이 달라진 것 같지만, 나쁜 쪽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쪽 느낌이네."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쁘게 될 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좋아져도 문제였다.
"뭔가 하신 것은 아니시죠?"
나는 고개를 돌려 대공녀에게 물었다.
나는 말하는 중에 대공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괜히 실수하면 큰일이었다.
내 눈짓을 알아차리고, 대공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확인만 했어요."
다행히 대공녀의 연기는 완벽했다.
나는 다시 놀라서 달려온 레스티에게 물었다.
"혹시, 감정을 하는 도중에 유물이 변하기도 하나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거의 없죠. 유물 감정도 유물 안에 마나를 넣는 거라 유물이 전보다 활성화된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부정적인 어투였지만, 나는 그 말을 냉큼 받았다.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얼렁뚱땅 이유를 만든 뒤에, 나는 가슴에 손을 올려 기사단장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생각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사과를 하자, 대공녀도 다른 조원들도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 사과를 하자, 기사단장은 손을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잠깐 놀랐을 뿐입니다. 검도 아무 문제 없고, 이 일은 없던 것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행히 기사단장은 우리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했으니, 앞으로 그가 이 일을 다시 꺼낼 일은 없을 터였다.
대신 기사단장은 나를 보며 의문을 표했다.
"그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군."
검을 자른 걸 아직도 떠올리고 있었나?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려 했지만, 다행히 그 의문은 아니었다.
"이 정도 검술을 익힌 자가 피센 후작가의 검술을 비하할 리가 없을 텐데……. 후작가 검술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딸꾹,"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다른 사람은 딸꾹질을 시작했다.
모두,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파랗게 변한 얼굴로 다시 하얗게 되었던 후작 아들 가엘이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딸꾹, 아니, 잠깐 놀라서……. 딸꾹."
가엘은 딸꾹질을 하면서도 열심히 변명하려고 했지만, 기사단장은 한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거짓말이 들키면 딸꾹질하던 버릇은 아직도 그대로냐."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보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추한 꼴을 보였습니다. 사과는 제 쪽에서 해야겠군요. 오해한 것을 사과드리겠습니다."
기사단장은 내게 존댓말로 사과했다.
정중한 사과에 나도 그와 같은 말로 대답했다.
"정당한 대결이었고, 좋은 대결이었습니다. 훌륭한 기사와 대련을 했으니, 오해도 없던 일로 하시죠."
내 말에 기사단장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멋진 기사군! 지금은 이놈을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그 뒤에 찾아가지, 좋은 기사를 만났으니 한잔해야지."
술로 다 풀 수 있다면 나도 환영이었다.
이쪽 세상은 술에 나이 제한이 없었다.
별로 과음하는 성격이 없어서 반주로 약간씩 마시기만 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꽤 마실듯했다.
그렇게 기사단장은 조카를 다시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우리는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대공녀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남들 모르게 방음벽을 펼쳤다.
그리고, 대공녀에게 물었다.
"신검, 고치신 거죠?"
대공녀는 내 말에 방음벽을 펼친 것을 알아차렸다.
"네……."
예상대로였다.
"아니, 왜 지금 그걸 손댄 겁니까?"
내 물음에 대공녀는 하소연하듯이 대답했다.
"이럴 줄 몰랐어요. 한군데만 살짝 고장 나서 슬쩍 고친 것뿐인데……."
능력을 숨기고, 비밀을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적이고 친구고, 허술한 보안 의식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 어른처럼 행동하더니, 대공녀도 이런 때에 보면 아직 십 대 중반의 소녀일 뿐이었다.
"그런데, 뭘 고친 겁니까?"
"정말 살짝 고친 거예요. 막혀 있는 마나의 흐름을 풀어준 것뿐이어서 기사단장님 말대로 조금 좋게 느껴진 게 맞을 거예요."
따라오는 ‘신검 추적자’를 보니, 대공녀와 달리, 신검에 대해 더 알아낸 듯했다.
확실히 유물 감정은 그가 더 뛰어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유물 감정을 완전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신검에서 빛이 뿜어지는 순간, 나는 신검에서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신검의 주인인 기사단장도, 신검 추적자도, 대공녀도.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마나 감각, ‘마나 감응력’이 없었으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마나를 보고 느끼는 내 감각에 검에서 빠져나오는 한 가닥의 마나가 잡혔다.
그 가느다란 마나의 선은 하늘로 뻗어 올라,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검에서 빛이 사라진 뒤에도 그 마나의 선은 남아 있었다.
지금도 내 눈에는 보였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선이.
그 선은 연기가 가득한 도시의 중앙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올려다보는 곳을 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공주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