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제1편 신검 추적 (1)
짧은 여행 끝에 마차는 피센 후작령의 중앙 도시에 도착했다.
거대한 외성 안에 자리 잡은 광산 도시.
광산 도시에서는 전에 보았던 것처럼 여러 가닥의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른 조원들, 여학생들은 그때처럼 도시 중앙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이 도시를 방문한 경험이 있었던 나는 전생의 공장단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뿐이었다.
그때처럼 도시는 더러웠고, 사람들은 지쳐 보였다.
마차는 그런 도시를 통과해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화려한 저택. 미리사는 저택을 보자 다시 입을 쩍 벌렸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접견실로 향했다.
화려한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를 안내했던 집사가 후작을 모셔왔다.
50대 초반의 장사꾼처럼 보이는 귀족. 피센 후작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전처럼 순서대로 인사를 한 뒤에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조원들을 훑어보고는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명이 비는군요. 아 맞다. 얼마 전에 안 좋은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인사 다음으로 후작이 처음 꺼낸 말은 우리를 비꼬는 말이었다.
시작부터 신경전이었다.
요하힘 건은 예전에 처리되었고, 방문 협상을 할 때는 요하힘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걸 들추어내다니.
요하힘 일로 왕세자 쪽 사람들과는 조별 과제를 수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긴 했었다.
저번 삶에서 경험했듯이 후작은 제1 왕자 파였고, 바로 일을 진행하기에 불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부터 트집을 잡아댈 줄 몰랐다.
분명, 협상 때는 부드럽게 이야기가 진행되어 안심했었는데…….
너무 쉽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선방을 한 방 날린 후작은 바로 대공녀와 공주에게 양해를 구했다.
"두 공주님의 방문이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라서 환영회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과 같은 말에 공주와 대공녀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저번에 봤을 때와 똑같이 후작은 나를 쳐다보았다.
저번에는 자기 아들과 결투한 이야기를 꺼냈었다.
이번에는 좀 더 안 좋은 소리를 하려나?
"수도에서 벌어진 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결정적일 때 사람도 구했다고."
신기하게도 후작은 전과 다른 말을 했다.
"실력도 좋다고 들었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기사 후보생이니, 이런 식으로 합리적인 요구를 하게 되는 모양이군. 그에 비해서는 우리 아들놈은……."
결투에서 박살 난 아들이 생각난 것인지, 그는 작게 혀를 찼다.
어쨌거나 이번에는 아들을 꽤 다치게 만들어서 후작이 나를 좋지 않게 볼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좋게 보는 것 같았다.
이게 이바나를 구한 여파일까?
후작이 나를 좋게 보았지만, 이번에는 스카우트 제의를 하지 않았다.
대신, 후작은 우리 조가 마음에 안 들지만, 나 때문에 해 준다는 느낌을 팍팍 풍기며 일을 진행했다.
대공녀는 살펴보고 싶은 유물 목록을 후작에게 건네주었고, 후작은 보여 줄 수 있는 것들을 알려주라고 집사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전처럼 ‘유사 신검’을 지닌 기사단장과의 대련까지 허락을 받았다.
우리와 같이 있던 ‘신검 추적자’는 후작도 집사도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경매장 주인도 오히려 그게 편했던 모양이었다.
"역시, 신분이 높으신 분과 같이 있는 것은 고역이군요."
얼마 뒤 손님방 옆 응접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 경매장 주인이 꺼낸 말이었다.
후작령까지 오는 동안 소개를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 그렇게 따지면, 여기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군요. 다들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제가 늦게 알아차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귀족들을 상대로 유물을 팔아본 경험이 많아서인지, 대공녀와 공주를 상대하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낯설어서인지, 여학생들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려 했다.
"유물 감정사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유물을 살필 때, 많이 도와주세요."
대공녀만이 대표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을 뿐이었다.
경매장 주인도 그녀의 인사에 정중한 자세로 감사를 표했다.
"‘신검 추적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걸로 부르기는 그렇잖아요. 따로 불리는 이름은 없나요?"
용병도 아닌데, 용병들이 쓰는 별명이 입에 붙을 리가 없었다.
발레아의 말에 경매장 주인은 바로 대답했다.
"레스티아도, 레스티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역시, 경매장 주인이나, 신검 추적자 말고도 쓰는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여태 별명만 알려주었으니.
나는 여자가 묻는다고, 냉큼 다른 이름을 대는 경매장 주인의 모습에 속으로 욕을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가 알려준 이름도 별다를 게 없었다.
레스티아도도 결국 추적자라는 뜻이었다. 결국, 이 이름도 가명이었다.
가명이긴 했지만, 본명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니, 발레아나 다른 조원들은 그의 대답에 만족해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여학생들은 아저씨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완전히 외면당했었던 접견실 때와 달리, 이 방에서의 소외는 경매장 주인을 슬프게 한 모양이었다.
레스티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두워 보였다.
경매장 주인의 이름을 묻는 것을 끝으로 더는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여학생들은 나를 타깃으로 삼았다.
"알렉스 공자님 덕분에 후작가에 오게 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다르게 대할 줄 몰랐네요."
처음 말을 꺼낸 것은 대공녀였다.
"그렇죠? 요하힘 공자 일은 대부분 모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 아는 모양이에요. 처음에 후작님이 그 일을 꺼냈을 때는 협상이 깨진 게 아닌가 했다니까요."
그녀의 말을 발레아가 받고,
"그런데, 알렉스 공자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가 확 풀어지는 게……. 공주라는 자리가 별 의미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어요."
대공녀가 다시 마무리했다.
딱 봐도 과장된 이야기였다. 어차피 협상으로 다 결정된 이야기였다.
처음 말은 슬쩍 간을 본 것일 뿐이었고, 나 때문에 뭔가 바뀐 것은 없었다.
다만, 후작이 생각보다 더 내게 호감을 보이긴 했다.
"요하힘 공자 일이 문제였다면 후작님은 왜 그러신 걸까요?"
공주가 손을 턱에 올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주의 물음에 발레아가 손가락을 세웠다.
그리고, 뜬금없는 추리를 이야기했다.
"피센 후작님도 왕세자님 파벌이잖아요. 혹시 같은 왕세자님 파벌로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요하힘을 체포한 것도 공자님이고, 구해준 여학생이 중요한 사람일 수도 있고요."
분명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답인 것 같았다.
단지, 다른 여학생들이나, 말을 꺼낸 발레아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뭐, 진짜 이유는 모르겠지만, 왕세자님 파벌이 좋게 본다면, 알렉스 공자가 왕세자님 파벌의 핵심 인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 공자님 앞에 출셋길이 활짝 열리는 거잖아요."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물론, 발레아도 그걸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특정 파벌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말을 하는 발레아의 눈이 웃고 있었다.
방금 한 말은 다른 사람을 놀리려고 한 말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 타깃은 내가 아니었다.
발레아의 말을 듣고, 공주와 대공녀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미리사도, 레스티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공주를 쳐다보았지만, 발레아는 두 공주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고민이 가득한 날이 지나고, 다음 날이 밝았다.
오늘은 유물을 구경하는 날.
후작가에서는 전처럼 방 하나에 유물을 가져다 놓고, 우리를 불렀다.
아직도 기능이 살아있는 유물과 망가진 유물들. 전과 같은 물건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다들 눈을 빛내며 유물을 구경했고, 특히 조용했던 경매장 주인, 레스티가 앞으로 나서서 유물을 살펴보았다.
"이 시계는 100년 전에 봉인지를 탐색하던 용병이 찾은 것이랍니다. 고대 제국 때의 유물입니다. 이 유물은……."
"아, 이 시계, 주변의 마나를 흡수해서 시간을 알려주는 거죠? 따로 동력이 없어도 거의 무한으로 움직이는 것이라 망가지기 전에는 꽤 유명했었습니다."
전에도 유물을 설명해 주었던 서기관이 각 유물에 관해 이야기해 주려고 했지만, 레스티는 그 이야기에 끼어들어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뽐냈다.
그렇게 서기관과 티격태격하면서 유물을 확인해나가자, 경매장 주인은 결국, 서먹했던 대공녀와 다른 조원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마나를 열로 바꾸는 방식 같죠?"
"네, 잘 보셨네요. 아마 작은 화로로 쓰이는 물건처럼 보입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열이 약하지만, 전에는 방 하나는 따뜻하게 했을 것……."
확실히 유물 감정 실력은 대공녀보다 경매장 주인이 뛰어났다.
그리고, 경매장 주인이 나선 덕분에 서기관과 집사는 훨씬 더 한가해졌다.
한번 봤었던 유물이라, 나는 한가하다 못해 지루했다.
그래서 한가한 집사에게 말을 건넸다.
"망가진 유물 중에 파실만한 것은 없을까요? 하나 사고 싶습니다. 공주나 대공녀께서 후작가에 방문한 기념으로 가져가실만한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저번과 같은 말이었다.
아쉽게도, 전에는 기사단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받아낼 생각이었다.
"파는 물건은 아니지만……. 후작님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예상대로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옆에서 발레아가 나를 향해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다.
놀리는 건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박수였다.
전처럼 그날 저녁에는 후작 가족과의 만찬이 있었다.
그때처럼, 후작 아들 가엘의 형제들과 딸들도 식사 자리에 있었지만, 이번에는 가엘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치료 중이려나.
이곳저곳 뼈를 부러뜨리긴 했지만, 포션의 위력을 생각하면 이제 괜찮아질 때도 되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후작의 입에서 가엘 이야기가 나왔다.
"가엘 놈은 내 동생이 훈련 중이라 참석을 못 했네. 결투에서 그렇게 엉망으로 져놓고도 멀쩡히 살아서 왔으니, 내 동생이 화낼 만하지."
후작 아들을 박살 낸 것은 다른 쪽에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내일 만나게 될 기사단장이 조금 걱정이 되었다.
* * *
다음 날.
우리는 숲으로 둘러싸인 연무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곳에는 전에 보았던 기사단장이 있었다.
음, 아무래도 결투로 명예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후작이 아니라 후작의 동생인 기사단장인 모양이었다.
나를 보는 기사단장의 표정이 몹시 안 좋았다.
그리고, 기사단장 옆에는 얼굴이 온통 파랗게 물든 후작 아들 가엘이 서 있었다.
훈련이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매타작을 당한 것 같았다.
기사단장이 나를 보고 검을 꺼내 들었다.
"감히, 후작 검술을 무시할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도록 하지."
이게 무슨 소리인지, 나는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끔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