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제25편 테러가 끝난 뒤 (2)
이바나라는 이름을 가진 신입생.
그녀는 테러가 일어난 날 밤에 잠깐 보고 처음 봤겠지만, 나는 죽기 전에 한 번 더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이바나가 나를 찾아왔었다.
"알렉스 선배,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때 한 말도 지금과 똑같았다.
그 당시에는 바쁘다고 만나기를 거절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제가 잡아놓은 응접실이 있어요. 그리로 가시죠."
그녀의 말에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의 자신감 있는 모습과 그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그녀의 행동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작 영지 대리인의 양녀라는 그녀의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동안, 왕세자가 해준 지원 때문에 이바나는 현재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단한 능력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금방 다른 사람에게 들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줄 생각은 없었다.
친하지도 않은 자의식이 강한 후배에게 오지랖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어찌 되었건 간에, 저번 삶에서 나는 이 여학생의 오빠에게 죽었었다.
솔직히 좋은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발레아가 물었을 때도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발레아는 구해준 사람이 여학생이냐고 물었었다.
여학생이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착잡한 마음이 들어서 표정이 과히 좋지 않았었다.
다행히 다들 내 표정을 보고 만족한 듯 했다.
왜 만족해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가지만, 다행히 그 뒤로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었지만, 예쁜 얼굴과는 별개로 가깝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잡아 놓았다는 곳은 조별 모임을 했었던 그 응접실이었다.
화려하고 커다란 응접실에 그녀가 먼저 들어가 주인 역할을 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차를 따르고, 다과를 준비하는 것을 보며 나는 이바나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차를 한 잔 마시고, 살짝 눈살을 찌푸린 그녀가 잔을 놓고 입을 열었다.
"저를 구해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왜 그런 일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지만, 선배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분명 위험했었을 겁니다."
처음부터 감사를 표하는 모습에 나도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구해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할 줄 아는 사람이면 오빠 같은 인간은 아닐 테니까.
"감사를 듣기 위해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감사를 표하니, 달게 받겠습니다. 숙녀를 구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마음이 편해진 나도 기사들이 여성들에게 하는 접대 멘트를 했다.
‘이런, 이런 말을 처음 들었나?’
내 말에 이바나의 귀가 붉게 변해버렸다.
생각해 보니, 이바나는 사교계에 아직 발도 들이지 못한 시골뜨기 소녀였다.
이런 멘트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런 말에 약할 뿐이었다. 이바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흥,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다른 게 아니라, 제가 만나자고 한 것은 구해 준 것에 보답하고 싶어서입니다."
보답? 이바나가 내게 뭔가 해줄 게 있었나?
"가엘, 아니 피센 후작가의 자제를 아시죠?"
"아, 당연히 알죠. 실력도 없이 결투랍시고 그렇게 덤빈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요."
내 말에 이바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마음대로 안 되는 모양이었다.
"결투가 금방 끝나버렸지만, 그래도 1학년 중에서는 가장 강했던 학생입니다. 입학 때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고요."
후작 아들이 내게 박살 난 덕분에 이야기가 꼬인 모양이었다.
후작 아들이 관련된 이야기라. 그거라면 한 가지밖에 없을 듯한데…….
"그는 일주일 만에 엄청나게 강해진 거였어요. 물론, 아직 선배와는 차이가 컸지만요. 그가 강해진 것은 제 능력 때문이었어요."
대련 결과 때문에 계속 이야기가 끊어졌지만, 결국,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입맛이 썼다.
조금 전 이야기로 나는 이바나가 세상살이를 모르고 갇혀 지내며 조금 왜곡된 생각을 가지게 된 시골 소녀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는 다른 사람을 빠르게 강하게 해줄 수 있어요. 가엘도 제 능력으로 그렇게 빠르게 성장한 거예요."
입맛이 썼지만, 그래도 이 기회에 정확한 능력을 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신체나 마나는 나쁘지 않았지만, 검술은 영 아니던데……. 전부 강해지는 것은 아닌가 보군요."
내 말에 이바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바로 믿으시네요."
능력의 약점을 먼저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내가 바로 믿는 게 더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신기한 능력들을 많이 봐서요."
본 것만이 아니라, 내가 직접 쓰고 있었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믿게 만드는 게 어려웠는데, 다행이에요."
지금이야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이바나는 전부 강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내 말에 동의했다.
"맞아요. 경험에 관련된 거나, 능력 자체를 성장하는 것도 조금 제한이 있어요. 그래도 나중에는 그 사람의 잠재능력 모두를 당겨올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아직 성장 중이니까요."
하지만, 그건 자신의 능력이 다 성장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 전제는 잘못된 것이었다.
경험이나 능력마저 고속 성장이 가능하다면 정말 이건 치트키였다.
짧은 훈련만으로 완성된 능력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직, 한 명밖에 안 되긴 하지만, 이것도 성장하면 늘어날 거예요."
이바나의 말에 흥분이 가라앉았다.
결국, 지금 이야기는 성장하면 모든 게 다 될 거라는 이바나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더 성장하지 못할 수도 있었고, 엉뚱한 부분이 성장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최악인 점은,
"문제는 능력을 거두어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점이겠군요."
"아니, 그건……. 가엘을 보셨군요."
이번 삶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저번 삶에서 확인했었다.
능력을 거둬가도 뭔가 남기는 하는 것 같았지만, 작은 파편 정도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 파편 때문에, 후작 아들이 강했던 때를 잊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내가 약점들을 계속 들추어내자, 이바나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하지만,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 생명을 구해준 보상이 맞습니까? 분명, 강한 사람에 능력을 걸면 본인의 성장이 빨라지겠죠. 이건 아무리 봐도 저보다 본인을 위한 것 같은데요."
"아……."
내 말에 이바나는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얼굴 전체가 시뻘겋게 변했다.
이바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설마, 자신은 이제껏 보상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마, 그랬을 수도 있었다.
다들 원했을 테고, 베풀 듯이 능력을 주었을 테니까.
다만, 지금 깨달았을 것이었다.
본인에게 더 이득이 되는 것을 보상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을.
고개를 숙인 이바나를 보며 나는 혀를 찼다.
‘그런 것을 보상으로 하려면 절대 상대에게 들키지 말았어야지’
나도 약점들을 몰랐으면 냉큼 받아들였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보상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왕세자 때문이라도, 이바나에게 지금 보상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것도 목줄이 생기는 보상이었으니.
"그래도, 마음에 걸리신다면 나중에 한 번 쓸 수 있도록 예약을 걸죠."
내 말에 이바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끄덕였다.
좋아.
이렇게 해서 원할 때 이바나의 능력을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성장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이바나의 능력이 내게 아예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이기기 힘들 때, 이바나의 능력은 일종의 필살기가 될 수 있었다.
그 시간을 내가 조절할 수 있다면, 이건 나만의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을 반복할 수 있는 나에게는 한번이 여러 번이 될 수도 있었다.
* * *
이바나와 만난 뒤,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사라진 유학생들에 관한 이야기도 아카데미 안에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봉인지에서 펼쳐진 이번 신입생들의 현장 학습 소식도 들려오고, 기사단장의 복귀 소식도 들려왔다.
왕실과 수도의 귀족들은 기사단장의 복귀에 정신이 없어진 모양이었지만, 나는 조별 과제 준비로 무척이나 바빴다.
목적지가 피센 후작가였기 때문이었다.
저번 삶에서는 대공녀가 혼자 다 처리해 주었지만, 이번에는 나도 열심히 뛰어다녀야 했다.
내가 처음 권유한 곳이 영 이상했다는 이유였지만,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 조원 말고 학생이 아닌 사람을 끼워 넣어야 했기에 내가 협상에 나서야 했다.
다행히 끼워 넣은 사람이 유물 감식에 능한 능력자여서 일이 틀어지지는 않았다.
대공녀도 자신과 비슷한 능력자를 데려온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대공녀의 주 능력이 다른 것이었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준비를 끝내고, 두 번째 방문지로 출발하려던 때에 수도에는 이상한 소문이 흐르고 있었다.
낯 뜨거운 왕실의 추문이었다.
죽은 첫 번째 왕비가 죽기 전에 다른 사람과 외도를 했었다는 소문.
왕이 멀쩡하다면 소문의 뿌리를 찾아내서 능지처참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소문이었다.
다행히 왕은 누워 있었고, 그 소문은 왕에게 닿지 않았다.
당연히 죽은 왕비의 아들인 제1 왕자가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의 손발이었던 왕실 기사단은 과거의 기사단장이 돌아와 있었다.
지금 왕실 기사단은 제1 왕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왕실 기사단이 아니라면, 치안대나, 귀족 사관들이 일을 맡아야 했지만, 그쪽은 제2 왕자 쪽 파벌이 장악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손을 놓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지켜볼 뿐이었다.
더구나 일부는 소문이 더 나라고 신나게 부채질했다.
그래서인지, 소문은 계속 불어나, 이제는 왕비에게 숨겨진 자식이 있을지 모른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런 소문들이 돌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마차를 타고 수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앞 마차에는 여학생들이 탔고, 뒤쪽 마차에는 요하힘 대신에 ‘신검 추적자’, 경매장 주인이 나와 함께 타고 있었다.
마차가 수도를 벗어나자, 경매장 주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 소문을 내도 괜찮을까요?"
그가 말하는 소문이야 다른 게 아니었다.
지금 수도에서 한참 떠들썩한 왕실의 추문 이야기였다.
"괜찮아요. 사실이니까."
그 추문은 내가 퍼트린 것이었다.
수도의 정보상이자 소문 통인 경매장 주인을 통해서 열심히 퍼트린 결과였다.
내 힘으로는 기사단장으로 왕실 기사단을 조금 흔드는 것 이상으로 제1 왕자에게 피해를 줄 방법이 없었다.
검을 들고 왕궁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었고, 그와 상대할 권력도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비밀뿐.
약점과 비밀은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를 협박할 것도 아니었고, 결국, 묵히면 변이 될 뿐이었다.
왕실 선임 기사도 요하힘 건으로 두 공주의 추문을 퍼트리려고 한 모양이었다.
추문에는 추문.
내 주변에 추문을 퍼트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후작가에 공짜로 같이 가게 해줄 생각이 없었으니, 이 정도 조건이면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경매장 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런 사람에게 휘말리게 되었는지……."
그에게는 만족스러운 조건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만족스러우면 그만이었다.
후작가로 오게 되면서 경매장 주인은 내 정체를 전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내 정체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먹기 힘들었다.
그가 추문을 퍼트린 이상, 이제 그와 나는 하나로 같이 묶인 협력자일 수밖에 없었다.
추문을 퍼트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나머지는 제1 왕자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어떻게 할지 결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 털어냈으니,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그 첫 번째로 피센 후작이 가진 신검의 비밀을 풀 생각이었다.
비밀을 풀어줄 남자의 한숨 소리를 배경으로 마차는 피센 후작가를 향해 계속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