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제24편 테러가 끝난 뒤 (1)
기사단이 떠나고, 나도 조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먼저 기사단이 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조금 달려가자 기사단장, 거인 같은 기사만이 널찍한 바위에 앉아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타고 있던 말만, 옆에서 열심히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여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예 출동을 못 하게 막아주기를 바라긴 했지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나설 때쯤 되니까, 정의의 용사가 딱하니 등장해서 공주들의 환심을 다 사버렸잖아."
생각해 보니, 비유도 아니고 진짜 공주잖아. 이건 사기이자, 반칙이야.
그렇게 혼자서 구시렁거리던 기사단장이 나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풀려난 뒤에 바로 여기로 달려온 모양이더군."
"저는 공주의 호위 기사이고, 다른 학생들도 제 친구들입니다. 기사단장이 잘해주시리라고 생각했지만, 호위 기사가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내 말에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다만, 그는 질문을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친구라고 말한 것치고는 유학생은 잘 체포해서 왔던데. 제국을 싫어하는 거냐? 아니면 이 왕국을 위해서냐?"
아무래도 기사단장의 질문은 일종의 시험 같았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대답을 말했다.
"요하힘은 사정을 안 뒤에도, 뒤에 남게 될 사람들을 생각하지도 않고, 도망을 쳤습니다. 공주님과 남겨진 친구들을 위해서 잡아 온 것뿐입니다."
나는 기사단장에게 요하힘의 품에서 찾아낸 편지를 건네주었다.
파울라가 요하힘에게 전해준 편지. 저번 삶에서도 본 편지였다.
본인이야 다르겠지만, 이 편지를 보고도 도망을 쳤다는 것은 공범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치고는 요하힘이 꽤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거기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기사단장에게는 다른 것을 알려주었다.
"요하힘을 데려가던 용병에게서 죽기 전에 목적지를 알아냈습니다."
용병은 죽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그들이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가 본 적이 있었다.
저번 삶에서 방문했던 조직의 안가. 영지 경계에 있던 낡은 여관을 기사단장에게 알려주었다.
"고문도 일가견이 있나 보군."
"서자 출신입니다."
내 생각대로 기사단장은 내 말을 오해해 주었다.
나 정도 실력을 갖춘 서자라면, 지저분한 일에 써먹으려고 공작이 숨겨서 키웠을 거라는 상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고문에 일가견이 있을 거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질문은 거기서 끝났다.
앉아 있는데도 나보다 커 보이는 기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둘러나 볼 생각이었는데, 내 생각보다 기사단이 엉망이 되어 있었어. 이대로 가다가는 영감 말대로 왕실 기사단이 남지 않게 될 것 같더군."
이번에는 보지 못했지만, 기사들이 공주가 다쳤던 저번 삶에서처럼 굴었다면, 기사단장이 한숨을 내쉴 만했다.
"세파에 시달리기 싫다고 돌아올 곳이 없어지게 놔둘 수야 없지. 아무래도 복귀를 해야 할 듯해."
그래 주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왕실 기사단이 중립만 지켜준다면 걱정할 일이 많이 줄 게 분명했다.
푸념을 늘어놓던 기사단장이 나를 보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네 목표는 뭐냐."
목표라.
언제나처럼 최대한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게 제일 중요한 목표긴 했다. 거기다 주위 사람들도 잘살면 좋겠고.
하지만, 기사단장은 전혀 다른 목표를 이야기했다.
"설마, 공주를 여왕으로 세울 생각인 것은 아니겠지?"
다들, 공주가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공주가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왕비도, 카트린도, 당사자인 공주마저도 자신이 왕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게 처음으로 공주가 왕이 될 가능성을 말한 사람이 나왔다.
기사단장은 공주가 아니라, 내 실력을 인정해서 한 말일 터였다.
그만큼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말이었고, 부정적인 뉘앙스긴 했지만, 내가 노력한다면 공주가 왕이 되는 게 완전히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공주를 왕으로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11살이었다.
공주도 지금 당장은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오해는 생기기 전에 바로 잡는 게 좋을 듯했다.
"왕비님과의 계약으로는 제가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공주님을 지켜드리는 것이었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고요."
아카데미를 다니게 해주는 대신에 공주를 지켜달라는 것이, 이리저리 포장하기는 했지만, 왕비가 내게 내건 계약조건이었다.
나는 승낙했고, 지금도 만족스러운 계약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주를 지키느라 힘든 일이 많았지만, 그만큼 대단한 사람들을 알고 사귀게 되었다.
대공녀를 만나게 될 리도 없었고, 세우타 공작에게 검을 배우고, 이렇게 왕실 기사단장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리도 없었다.
거기다, 검 속에서 카를로스 용사에게 검을 배운 것도 따지고 보면 공주의 호위 기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렇게 빨라진 성장도 어느 정도는 공주와 같이 다닌 덕분이었다.
내 말에 기사단장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주억거렸고,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다란 덩치가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이며 표정을 바꾸자, 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뭐,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그보다, 가끔 찾아와라. 대련 상대가 없어서 곤란했는데, 네놈 정도면 부실하기는 하지만, 상대할 만은 하니까."
대련이라면 나도 반가운 이야기였다.
마나를 채운 팔찌를 쓰면 세우타 공작과도 대련을 할 수 있었지만, 나도 이왕이면 기사단장하고 대련하는 게 더 좋았다.
기사단장은 수도의 집을 예전에 팔아버렸다면서, 집을 구하면 세우타 공작을 통해 알려주겠다고 말한 뒤에 말에 올라탔다.
말 허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지만, 기사단장도 나도 모른척했다.
기사단장이 떠난 뒤, 나는 그 자리에 남아 일행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기사가 호위하는 마차가 다가왔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뒤쪽의 마차에 타야겠지만, 그동안의 일이 궁금했던 조원들이 나를 같은 마차에 끌어들였다.
"자, 다른 할 일은 모두 끝난 거죠? 이제는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주세요."
발레아가 대표로 내게 압박을 줬다.
어차피 알려주어야 할 일이었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담담하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다들, 왕실 기사단이 요하힘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수도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는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그 폭발을 일으킨 것이 제국에서 온 사람들이고, 파울라도 그 일에 참여했다는 말에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 되었다.
다들 파울라를 알고, 대화도 나누어본 적이 있었다.
조용하고 착실해 보이는 그녀가 그런 테러에 참여했다는 것을 쉽게 믿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계속 이야기해주었다.
그들의 목적은 원래 아카데미 신입생을 납치하려던 것이었고, 호위와 싸우다 자폭을 했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끼어들어서 신입생을 구해주긴 했지만, 조원 중에 요하힘이 있어서 조원들이 걱정되었죠. 그래서 바로 달려왔다가 요하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요하힘보다 요하힘을 핑계로 달려온 왕실 기사단이 걱정이었다.
요하힘도 우연히 만난 게 아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내 능력을 말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일을 우연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요하힘을 데려온 거군요."
대공녀의 말처럼, 다들 설명을 듣고, 내 행동을 이해해주었다.
다만 한 명은 아직 내 행동에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요하힘 공자님은 그 일과 관계없는 게 아닐까요? 직접 벌인 일도 아닌데, 그렇게 다치고 끌려가시다니……."
미리사가 오랜만에 자기 목소리를 냈다.
유적지에서 친해진 것인지도 몰랐고, 아니면 요하힘을 몰래 좋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요하힘을 피투성이로 만들어서 데려온 데다가, 왕실 기사단에 넘겨준 내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다행히 그녀에게 내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알렉스 공자는 우리를 위해서 요하힘 공자를 잡아 온 거예요."
대공녀가 먼저 나서서 그녀에게 설명했다.
"좀 전에 왕실 기사단 기사들이 우리에게 요하힘을 숨겨주었다는 누명을 씌우려고 했었어요. 알렉스 공자가 요하힘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체포되었을 수도 있었어요."
그냥 평범한 대치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더 나빴던 모양이었다.
"기사단장님이 보이셔서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거로 생각해서 가만히 있었는데, 그 기사님은 이상했어요."
공주가 미안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두 공주가 나서서 말하자, 미리사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에 대한 불만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화가 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더는 나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대답도 잘하는 것을 보니, 미리사와 사이가 더 안 좋아지게 된 것인지는 좀 애매했다.
설명을 끝내고, 궁금증들도 해결해 주었지만, 발레아는 아직 질문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다른 것을 궁금해했다.
"그래서, 구해냈다는 신입생은 여자예요? 남자예요?"
그녀의 질문에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모두의 시선을 받자, 목덜미에 땀이 맺혔다.
별것 아닌 질문이었지만, 이건,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언제나 그렇지만, 테러 사건은 누가 범인인지 공표되지 않았다.
그 일은 사고로 포장되어 묻혔고, 당한 사람들 이외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다.
다행히 왕실과 기사단에 줄이 있었던 나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두 나라와 윗사람들끼리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살아남은 두 관련자. 요하힘과 파울라는 얼마 뒤에 제국으로 송환되었다.
요하힘과 파울라에게서 많은 것을 듣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알려준 안가도 찾아가 보았지만, 안가를 지키던 주인을 잡지는 못했다고 했다.
덕분에, 높은 분들은 이번 일은 제국에서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제국과의 관계를 조정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조직에 대해 아는 것은 아직 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나도 그리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아직도 조직의 이름을 모르고 있으니, 안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죽어서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여러 번 반복된 삶을 살아보았지만, 어느 때도 완벽한 삶은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창을 바로 치워버릴 수 있었다.
다시 시작된 새로운 삶.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신입생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