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제22편 귀환(2)
수도에서 마차를 타고 반나절 정도 가면 도착하는 고대 왕국의 유적.
대전쟁 때 폐허로 변해 버렸지만, 왕국이 세워진 뒤에 발굴이 이루어져서 수도 근처의 관광 명소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찾는 이가 없어 쓸쓸히 무너져 가는 폐허일 뿐이었다.
그런 폐허에 오랜만에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마차 두 대와 천막을 세워 놓고, 며칠 전부터 유적을 살피는 아카데미 학생들.
하지만, 예상대로 소득은 없었고, 학생들은 무척이나 지루해 보였다.
며칠 동안의 허탕에 더 조사할 생각도 못 하고, 천막 앞에 모여서 잡담만 늘어놓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요. 미리사도 재미없죠."
발레아의 물음에 미리사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돌아가면 여길 추천한 사람에게 뭐라고 해야겠어요. 미리사도 같이 말해요."
"아니, 저는 그 정도는 아닌……."
"당사자도 없는데 어때요. 이럴 때 열심히 불만을 늘어놓는 거예요."
발레아의 말에 미리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알렉스 공자가 이유 없이 일을 행한 적은 없었어요."
발레아의 장난에 검을 닦고 있던 공주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본 시간은 짧았지만, 괜한 짓을 하는 사람은 아니긴 하죠. 그래도 이번에는 좀 서두르는 느낌이었어요. 본인도 뒤에 빠져 버리고."
공주의 말에는 동의했지만, 대공녀도 이번 일에는 의문을 느끼는 듯했다.
"내 말이 그거예요. 여기에 우리를 보내고 자기만 쏙 빠졌잖아요. 다른 것보다 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는 게 괘씸한 거예요. 물론, 이렇게 지루하지만 않았으면 말도 안 꺼냈겠지만요."
지루해서 투덜거리는 것인지, 이유를 말하지 않고 빠져서 불만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결국, 이 모든 말들은 지루한 김에 꺼낸 잡담일 뿐이었다.
여학생들이 잡담을 나누는 것을 보며 요하힘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루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별로 불만이 없었다.
폐허가 되기는 했지만, 고대 제국이 남긴 흔적을 구경하는 것은 고대 제국을 이은 차르 제국의 국민으로서 즐거운 일이었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지만, 언젠가 차르 제국이 고대 제국 이상으로 융성해지면, 이 유적들도 멋지게 복원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런 곳을 미리 살펴보는 것은 요하힘의 자긍심을 북돋아 주었다.
그렇게 나름 유익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자신들 쪽으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말은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가죽 갑옷을 입은 남자도 무척 지저분했다.
그나마 장비는 낡았지만 건실하게 갖춘 것 같았다.
요하힘이 보기에도 현장에서 오래 구른 용병 같았다.
그가 알아차린 뒤에, 공주도 용병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이어 모두 말을 타고 달려오는 용병을 바라보았다.
용병은 무척이나 급하게 말을 몰았다.
일행 앞까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오더니, 바로 앞에서 급하게 멈춰 세웠다.
"이놈아! 멈춰!"
그는 굴러떨어지듯이 말에서 내려 일행 쪽으로 달려왔다.
모두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다른 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요하힘 앞에 섰다.
"헉, 헉. 휴우, 늦지 않았군요."
"누가 보냈냐?"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요하힘이 용병에게 물었다.
"파울라 님이 보내셨습니다."
파울라가 그에게 용병을 보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병은 품에서 편지를 꺼내 요하힘에게 건네주었다.
요하힘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로 전하는 것도 아니라니.
요하힘이 다른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금 떨어져서 편지를 열어 보았다.
편지를 읽는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편지에 적혀 있는 글이 그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을 위해서 피해 있으라니. 거기다, 수도에서 사람을 납치한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지.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었다.
어쨌거나, 요하힘은 파울라의 말을 들어야 하는 처지였다.
요하힘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용병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라는 거지?"
"일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와 함께 피하셔야 합니다."
"잘못되었다고? 파울라는 괜찮아?"
"죄송합니다. 정확한 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요하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조직이란 곳이 폐쇄적이라는 것은 형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일행 앞으로 갔다.
그리고, 일행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먼저 가 봐야겠습니다. 같이 파견된 파울라 영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거짓말도 아니고, 두루뭉술하지만 이해 못 할 말도 아니어서, 일행은 궁금해했지만, 요하힘이 떠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럼, 빨리 가 봐야죠."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세요."
오히려, 그는 공주와 대공녀를 필두로 일행의 걱정이 담긴 배웅을 받았다.
요하힘이 짐을 챙기는 사이, 발레아가 일행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요하힘 공자도 가 버리면, 두 명이나 빠지게 되는데, 우리도 이걸 핑계로 슬슬 접는 게 어때요?"
귀족답지 않은 적나라한 어조에 공주와 대공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도 발레아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고용인들이 남아 있고, 따라온 대공녀의 기사도 있지만, 여학생들만 남게 된 상황에서 계속 탐사를 진행하기는 무리였다.
네 명의 여학생은 서로 시선을 마주친 뒤에 결정을 내렸다. 이번 여행을 여기서 끝내기로.
그렇게 여성들이 홀가분한 결정을 내리는 동안, 요하힘은 짐을 챙겨서 용병이 타고 온 말에 올라탔다.
요하힘은 올라탄 말이 비실거리는 모습에 걱정이 되었다.
"이 말밖에 없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기보다 달리기를 잘합니다."
말이 자신을 잘 태워 줄지 걱정이었는데, 용병은 다르게 들었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이 말 이외에는 다른 말이 없다는 소리였다.
두 사람은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여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출발했다.
짐을 실은 말은 요하힘을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고, 용병은 그 옆에서 달려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있으니, 그들은 우선 수도를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난 뒤에, 북쪽으로 방향을 바꿀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다가, 두 사람은 계획대로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용병의 말에 따르면 우선 북쪽 영지에 있는 안가에 머물다가 상황을 봐서 제국으로 돌아가는 계획인 것 같았다.
요하힘은 엉망이 되어 버린 유학에 짜증이 났고,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조직이란 곳이 더 싫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조직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금 안내하는 용병도 조직에 속한 용병이었고, 지금 가는 곳도 조직의 안가였다.
그렇게 북쪽으로 달려가는 두 사람 앞길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어? 수도에 있다는 사람이 왜 저기 있는 거지? 뭔가 할 이야기가 있나?"
그를 먼저 알아본 요하힘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옆에서 달려가던 용병은 얼굴을 굳히고, 쇠뇌를 꺼내 들었다.
용병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요하힘에게 물었다.
"헉, 아는 학생입니까?"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왕실 아카데미 제복을 입고 있었다.
"모를 리가, 아카데미에서 제일 친한 학생일걸? 같은 조원인데, 일이 있어서 수도에 남았는데……."
"헉, 헉, 설마, 강합니까? 공자님 정도로?"
"나보다 훨씬 강하지. 제국 왕실 기사보다 강할걸?"
"젠장!"
용병은 숨을 몰아쉬는 것도 잊고,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쇠뇌로 학생을 겨눈 뒤 바로 쏴 버렸다.
"아니, 왜?"
터엉!
요하힘이 놀라 소리쳤지만, 그 소리는 화살이 검에 튕겨 나가는 소리와 겹쳐졌다.
"도망치십시오. 제가 시간을 벌어 보겠습니다. 도망치는 데 성공하면, 좀 전에 말한 안가로 가십시오."
용병의 말이 들렸는지도 몰랐다.
가만히 서 있던 상대가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요하힘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중간 과정은 모르겠지만, 결국 새로 사귄 친구는 제국으로 가는 자신을 막을 생각인 것 같았다.
도망치라는 말에도 요하힘은 말에서 내렸다.
저 남자에게서 도망치라니.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그동안 들은 말 중에서 제일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물론, 지금 자신이 검을 꺼낸 것도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이길 리가 없었다. 2학기 내내 갈수록 차이가 벌어졌었다.
신입생을 박살 내 놓은 결투를 봐도 거기서 더 차이가 났을 게 분명했다.
제국에 대한 자긍심이 가득한 요하힘이었고, 유학을 온 이 왕국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 이쪽으로 달려오는 남자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더라도 제국 기사 후보생이 뒤를 보일 수는 없었다.
차이가 벌어졌다고 해도,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의 확률이 있을지 몰랐다.
요하힘은 최후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좋아! 알렉스 공자! 덤비시오!"
호기롭게 외친 요하힘에게 알렉스의 검이 날아왔다.
* * *
요하힘이 떠나고, 고용인들이 열심히 움직인 끝에 남은 여학생들도 떠날 준비를 끝냈다.
이들이 떠나면 다시 유적은 적막해질 예정이었다.
다들, 그런 생각에 유적을 마지막으로 쳐다보았다.
멸망한 고대 제국의 유적.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데도 이상하게 역사와 문화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고대 제국.
그런 생각들을 하며 유적을 보고 있던 여학생들은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소리에 모두 마차로 걸어갔다.
아직 유적이 조용해지기는 일렀던 모양이었다.
유적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말을 타고 달려온 수십 명의 기사였다.
왕실 기사단의 깃발을 들고, 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왕국 최고의 기사들이 이 폐허를 찾아왔다.
워! 워!
폐허 앞. 학생들이 타고 온 마차 앞에 기사들이 멈춰 섰다.
여학생들이 놀란 얼굴로 달려온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왕실 기사단……."
수십 명의 거대한 덩치들이 포위하자, 그 자체로 여학생들은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발레아, 공주, 대공녀는 버텨 낼 수 있었지만, 미리사는 벌써 얼굴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덩치가 큰 기사단인 만큼, 그들이 타고 있는 말들도 평범한 말들이 아니었다.
고르고 고른 하나같이 강인하고 거대한 말들. 하지만, 기사단 중에는 그런 말도 작게 보이게 하는 기사가 섞여 있었다.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오른 것처럼 보이는 그 기사는 먼저 말에서 내린 뒤 뒤로 물러섰다.
이들을 이끄는 선임 기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왔다.
여학생들을 보는 선임 기사의 표정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선임 기사의 눈동자는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움찔거리며 자꾸 뒤를 돌아보려 했다.
하지만 뭔가 결심을 했는지, 그는 이를 악물었다.
"범죄자 요하힘 폰 시라흐는 앞으로 나와라. 왕명으로 체포한다."
그는 여학생들과 주변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숨겨 주거나, 방해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처형될 것이다. 요하힘은 바로 나서라!"
그가 고함을 쳤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 이른 봄이었다. 조용해진 유적에는 찬 바람만 가득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