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제21편 귀환(1)
거대한 폭발은 수도의 밤을 깨워버렸고, 폭발이 일어난 골목에는 치안병들과 치안 기사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날아가 버린 집들과 거리를 보고 황당해했고, 휘말린 사람들을 보고 더 어이없어했다.
피해자가 왕실 아카데미 학생이었고, 이 일을 일으킨 사람들은 제국에서 파견된 관료들과 유학생이었다.
피해자를 구해준 아카데미 학생도 있었지만, 치안대에서는 현장에 있던 사람 모두를 체포했다.
이바나를 습격했던 자들은 모두 죽었지만, 파울라는 죽지 않았다.
이바나가 봐준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파울라가 능력으로 몸을 조금이나마 피한 것이었다.
큰 부상이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고, 그녀는 포션을 마시고, 치안대 안에 있는 병상에 갇히게 되었다.
살아남았지만, 파울라에게 좋은 일일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긴 삶 중에 처음으로 수도의 치안대 감옥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나마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이바나의 일관된 말 덕분인지, 조사는 강압적이지 않았다.
나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대해주는 치안 기사에게 성실하게 대답했다.
"파울라가 이바나를 몰래 조사하고 미행하는 것이 이상해서 저도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실하다고 사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왜, 당사자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물었고, 나는 준비한 핑계를 이야기했다.
"파울라도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고, 이바나도 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좀 껄끄러운 일이 있어서 따로 말해주기가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조사하는 치안 기사도 왕실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결투 때문이라는 내 말을 그는 바로 이해해 주었다.
역시, 학연, 지연은 어느 세계에서도 통하나 보다.
그 뒤에는 실제 있었던 일을 그에게 설명했다. 물론, 내가 한 일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다행히, 이번 일에는 많이 안 끼어들어, 거짓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진실 90%에 거짓말 10%, 전생의 사기꾼에게 들은 말이긴 했지만, 꽤 잘 통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쉽게 풀려나긴 어려워 보였다.
제국 관료들이 엮여 있고, 살아남은 사람은 왕립 아카데미 학생들이었다.
이바나의 뒷배가 움직이지 않는 이상 풀려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잠깐, 1 왕자가 알게 되면, 나도 풀어주려나?'
1 왕자가 어떻게 할지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탈옥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준비해 놓은 것들이 효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조사를 받고, 시간이 흘렀다.
이 안에서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날이 밝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조사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이 찾아온 것 같았다.
이바나 쪽 사람들이 왔거나, 아카데미 교수들이 찾아왔는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얼마 뒤에는 여기서 풀려날 수 있을 듯했다.
곧이어, 조사실 문이 열렸다.
이바나를 찾아온 줄 알았는데, 나를 찾아온 손님이었다.
카트린이나 아카데미 교수가 올 줄 알았는데, 뜻밖의 사람이 들어왔다.
노인, 세우타 명예 공작이 지팡이를 짚고 조사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새벽잠이 없는 게 별로 좋은 게 아니야."
늙어서 잠이 줄어 손해가 크다며 공작은 허리를 두들겼다.
"나가자. 이야기가 끝났다."
"벌써, 어떻게……."
"치안병 놈들이라면, 이제 겨우 조사하기 시작했지만, 왕실 기사단이 움직였다."
어떻게 노인이 찾아왔나 했더니, 그가 왕실 기사단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나야, 일이 터지고, 정보를 모아 부단장 놈에게 알려준 것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이렇게 빨리 왕실 기사단을 움직였다는 말은, 테러에 대해 그만큼 빨리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기사단 고문인, 노인의 발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하자, 노인은 손을 저었다.
"수도에서 테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기사단 고문이라는 자가 맘 편히 있을 수는 없지."
마나를 잃은 노인이었지만, 그는 아직 기사였다.
나와는 다른 제대로 된 기사.
노인은 말을 하면서도 괜히 사서 고생을 한 것 같다고 투덜거렸다.
"웃기는 건, 치안대 일이라고 꿈쩍도 안 하던 부단장 놈이 피해자 중에 이바나라는 여학생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번개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이야."
노인은 말을 하면서 나를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뭔가 아는 게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말할 때가 아니었다.
노인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지팡이로 문을 열었다.
"아무튼, 왕실 기사단이 우르르 움직인 덕분에 대충 파악되었으니, 나가도 된다는 말이다. 어차피 너는 우. 연. 히 생존자를 도와준 참고인에 불과하니까."
다행히 노인은 내게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때 비밀 계약에 이런 일도 포함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생각보다 빨리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 * *
왕실 기사단이 더 빨리 움직인 덕분에 1 왕자는 전보다 빨리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직 주변이 어둠에 잠겨 있을 때, 1 왕자는 집무실에 앉아 보고를 들었다.
전과 달리, 1 왕자는 제대로 옷도 차려입고 있었고, 비웃는 듯한 미소도 얼굴에 남아있었다.
이바나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제국에서 온 관료 놈들이 이바나를 납치하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자폭해버렸다는 건가?"
"흔적을 없애려고 한 것 같습니다."
실제와 조금 다른 보고였지만,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왜?"
"이바나 영애의 능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젊은 귀족의 말에 왕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쓸모도 많고, 특이한 능력이긴 하지만, 제국이 납치할 만한 능력이긴 한가?"
왕자의 말에 귀족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혹시, 저희가 모르는 비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알지 못하는 비밀이면 없는 거야."
하지만, 그의 말에 왕자가 코웃음을 쳤다.
"아, 죄송합니다."
귀족의 사과에 왕자는 손을 흔들고, 책상을 두드렸다.
"쯧쯧, 좀 더 숨겨놓을 걸 그랬나. 미리 얼굴을 알려놓아서 나중에 데뷔할 때 충격을 줄여 볼까 했는데, 이래서야 곤란하잖아."
1 왕자는 표정을 구겼다.
기껏 여동생을 수도로 올렸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졌다.
더구나, 제국이라니.
황당한 전개에 왕자는 머리가 아파졌다.
이바나 이야기를 들으니, 동생도 만나 보고 싶었지만, 지금 만날 수는 없었다.
'어머니 묘소나 찾아뵈어야겠군.'
왕자는 짜증이 솟아올랐지만, 그렇다고 확인해 봐야 할 것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와의 관계를 알고 납치하려고 한 게 아닌 건 확실한 거지?"
왕자의 말에 젊은 귀족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정황상 아닐 것으로 여겨지지만,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아직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왕자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람의 목숨을 날리기로 했다.
"그것도 고려해야 하니까……. 결국, 다 죽이는 게 편하겠군."
방에 있는 젊은 귀족과 부단장은 그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쳤다는 여자애 말고 또 누가 있지?"
"제국에서 파견된 관료는 그 자리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다친 여학생 외에는 마침 수도를 벗어나 있는 유학생 한 명이 더 있습니다."
"좋아, 기사단을 보내서 잡아 오도록."
왕자의 말에 부단장과 젊은 귀족이 눈을 마주쳤다.
젊은 귀족이 조심스럽게 왕자에게 물었다.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왕자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해? 반역죄로 그 자리에서 참수해버려."
왕실 기사단의 행사였다. 방해하는 자는 반역자로 처단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방해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공주와 대공녀라는 것은 젊은 귀족도 부단장도 왕자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왕세자의 승낙을 얻어낸 뒤, 부단장과 귀족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첩자 체포에 다른 일을 끼워 넣으려면 선임 기사 임명부터 할 일이 많았다.
젊은 귀족과 인사를 하고 부단장은 기사단 숙소로 향했다.
사고를 만들려면 첩자가 도망치기 전에 도착해야 했다.
복도를 걷는 부단장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사건은 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사람들의 욕심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이바나가 죽지 않아 달라진 열차 궤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 * *
해가 떠오르고, 기숙사에 돌아온 나는 다시 짐을 쌌다.
여러 가지 준비를 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업을 빼먹게 되어서 카트린과 다른 교수들에게 미안했지만, 직접 가봐야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2학년 성적은 개판이 될 모양이었다.
나는 조별 과제를 떠난 조원들에게 간다는 편지를 써서, 기숙사 사감에 남기고는 아카데미를 떠났다.
마차보다 뛰는 게 더 빨랐다.
나는 해가 중천에 오르는 것을 보며, 수도를 빠져나왔다.
수도를 벗어나면서 창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저번 삶에서 수도를 나왔을 때 보았던 저장 시점 메시지 창.
하지만, 아무리 걷고, 뛰어도 메시지 창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원, 공주와 대공녀는 안전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늦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계속 조원들이 있는 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 * *
알렉스가 성문을 나서려는 그때, 기사단도 출발 준비를 끝마쳤다.
수십 명의 기사로 이루어진 체포조였다.
분명 과한 인원이었지만, 부단장의 지시와 왕세자의 명령이라는 말에 기사단원들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원들은 자신들을 이끌 선임 기사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놓고 1 왕자 파벌을 따르는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실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언제나 중립을 지키며 왕실을 수호해야 하는 기사단원들에게는 보기 싫은 사람일 뿐이었다.
다만, 그런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겠다는 기사들은 기사단장이 떠난 뒤, 많이 줄어들었다.
부단장이 왕세자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 뒤에는 중립을 지키던 기사들은 항상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1 왕자 파벌의 기사들이 설치는 것을 다른 기사들은 포기한 얼굴로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오히려 몇몇 기사들은 1 왕자 파벌이 꼴 보기 싫어서 2 왕자 파벌로 들어갈까 고민 중이었다.
기사들이 모이자, 기사들을 이끌 선임 기사가 앞에 나와 크게 외쳤다.
"이번에 잡을 범인은 제국에서 온 첩자다! 어젯밤에 수도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 범인이고, 아카데미 학생으로 위장한 채로 지금 다른 학생들과 수도를 떠나 있다."
그래도 이번 일은 거부감이 덜했다. 다들 어젯밤에 테러가 일어난 것을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라고 봐주거나, 얕잡아 보는 일이 없길 바란다."
"옛!"
선임 기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몇몇 기사들이 그의 말에 맞춰서 함성을 내질렀다.
"수도의 테러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왕께서 분노하시고, 왕자님이 명령을 내리셨다. 체포를 막는 사람은 모두 죽이고, 방해하는 사람은 모두 베라는 명령이시다."
과한 말에 많은 기사가 눈을 찌푸렸지만, 딱히 뭐라 하기도 힘들어 다들 입을 닫았다.
"알겠습니다!!"
다만, 함성을 외치던 기사들이 그의 말에 크게 대답했다.
선임 기사는 보고 있는 부단장에게 인사를 하고, 기사단을 출발시키려 했다.
그가 손을 들고 외치려는 순간.
"자, 출발……."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덮었다.
"오랜만이야."
솟아오르는 햇빛을 뒤로한 채로 거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네. 벌써 네가 선임 기사를 단 거야? 그럴 실력은 되고?"
선임 기사는 입을 딱 벌리고, 거인을 바라보았다.
"설마……."
부단장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거인을 바라보았다.
"여, 부단장도 오랜만이야."
"아니, 갑자기……."
부단장은 입을 벌렸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나들이 삼아서 나온 거야. 요즘 기사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궁금하고. 그래서, 이번 출동은 오랜만에 나도 가볼 생각인데. 괜찮지?"
"네!!!"
거인의 말에 조용하던 기사들이 폭발하듯이 소리쳤다.
반대로 선임 기사와 호흡을 맞추던 기사들은 표정이 안 좋아졌다.
선임 기사는 어떻게 할지 계속 부단장을 쳐다보았고, 부단장은 갑자기 들이닥친 기사단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열차 궤도 앞을 막아선 거인은 부하들을 보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