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제20편 아무튼 사람을 구했습니다
어두운 골목길 안쪽에 숨어 있던 파울라는 전에 본 것 같은 골목길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과거의 경험을 끌어올려서 비슷하게 느끼게 되는 거라고 했나?'
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아, 그녀는 정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본 뒤에 찝찝한 채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조금 기분이 묘해졌을 뿐이었다.
'첫 작전이라서 긴장해서 그럴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타날 사람을 기다렸다.
이바나를 알게 된 것은 운이 좋았다.
피센 후작의 아들, 가엘이 결투에서 지고 나서 동네방네 떠들어댄 덕분이었다.
그는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바나를 따라다니며 애원했다.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다른 기사와 싸워 실력을 올리면 충분히 알렉스와 상대할 수 있다고도 떠들어댔다.
식당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흥미를 느껴서 조사해 봤더니,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후작 아들이 입학식 때부터 급격하게 강해졌다는 것과 다른 학생 중에서도 갑자기 강해진 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다.
그런 학생들의 중심에는 모두 이바나가 있었다.
당연히 이바나의 능력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되었고, 좀 더 알아본 뒤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들의 성장은 이바나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바나의 능력은 다른 이의 성장을 빠르게 하는 것이거나, 미래의 능력을 당겨오는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상급자에게 보고했고,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는 지급으로 조직 상부에 보고되어, 이렇게 그녀가 납치 현장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과정은 달랐지만, 결국 결론은 같아진 상황.
만약, 알렉스가 이 상황을 알았다면, 변하지 않으려는 세계의 의지가 나비효과를 이겨낸 것으로 생각했을 터였다.
그래도 모두 같지는 않았다.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전보다 훨씬 열심히 뛰어다닌 만큼, 파울라는 두려움을 이길 정도로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뒤에서 구경이나 해. 일 시키려고 부른 게 아니라, 경험을 시켜 주려고 부른 거니까."
파울라는 선배 조직원의 말에 남아있는 한 조각의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일을 앞에 두고 딴생각이 떠올랐다.
조별 과제를 하기 위해 수도를 벗어난 요하힘이 떠오른 것이었다.
요하힘에게 너무 늦게 연락을 보낸 게 아닌지,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가 제때 피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런 걱정을 떠올리는 순간, 골목 안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모습을 보였다.
뒤로 물러서라고 했지만, 그녀도 할 일이 있었다.
파울라는 선배에게 허락을 구했다.
* * *
이바나와 호위가 골목길에 접어드는 순간에도, 나는 지붕 난간에 몸을 기댄 채로 일이 벌어지는 것을 구경하는 관람객이었다.
하지만, 팝콘을 들고 편하게 보는 그런 관람객은 아니었다.
나는 평범한 관람객이 아니라, 가장 알맞은 순간에 무대에 난입하기를 기다리는 분탕 종자, 트롤러였다.
문제는 그 알맞은 순간을 찾는 것이 쉬운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일을 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파울라에게 납치가 어떻게 테러로 변해 버렸는지 듣기는 했지만,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제대로 알려주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운 좋게 같은 시간에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이미 달라진 것이 많이 있었다.
일이 똑같이 진행될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역시, 왕실이나 정치와 엮인 일은 풀기가 어려워.'
다른 일이었으면 이렇게 타이밍을 맞추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미리 칼로 원인을 제거해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국가 반역자 이상의 죄목이 걸릴 수 있었다.
지금은 이리저리 엉켜있는 실타래를 조심조심 풀어야 했다.
다행히, 일의 시작은 파울라의 말대로였다.
먼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파울라가 움직였다.
그녀가 모습을 보이자, 이바나와 호위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라? 이바나 신입생?"
귀를 기울이자, 파울라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보고, 들었긴 했지만, 연극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역시, 대단한 스파이였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저 인사를 듣고 이바나가 바로 함정인 것을 알아차렸다고 했다.
하지만, 저 연기가 들키다니. 저 정도 연기면 들킬 리가 없는데?
"저를 아세요?"
그녀의 말에 이바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라, 이번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 건가?
마지막으로 이바나를 찾아갔었다고 했는데, 이번 삶에서는 이바나를 만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역시, 똑같을 리가 없었다.
같은 시간에 일이 벌어졌다고, 같은 상황일 리가 없었다.
나는 긴장을 끌어올렸다.
시작부터 달라졌으니,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아, 저는 파울라라고 2학년이에요. 이 앞 여관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가는 길이에요."
파울라는 자신의 문양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바나에게 다가갔다.
이바나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파울라가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분명, 이바나가 처음부터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했는데.
뭐가 달라진 거지?
연기가 더 좋아진 건가? 아니면, 처음 만나서 파악이 잘 안 된 건가?
전과 점점 달라지고 있었지만, 나는 계속 지켜봤다.
아직은 기다릴 만했다.
중간이 달라진다고 해도 어차피 일은 벌어질 것이다.
두 사람 사이가 점점 가까워졌다.
10m, 5m, 3m.
하지만, 마지막 순간, 이바나가 손을 저었다.
"죄송해요. 더 가까이 오시지 않았으면 해요. 제가 낯선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해서."
억지로 더 가까이 갈 것으로 생각했던 파울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괜찮아요. 이런 곳에서 유명한 아카데미 신입생을 보게 되어서 나도 모르게 흥분했나 봐요."
그녀는 오히려 옆으로 비켜섰다.
다른 사람이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낯선 곳에서 만난 아카데미 학생 간의 약간 서먹하지만 평범한 대화였다.
이바나는 파울라가 의심스럽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파울라의 대처는 저번 삶에서 나에게 말한 것과 달리, 무척이나 훌륭했다.
호위는 아예 의심도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파울라와 조금 떨어진 채로 빠르게 지나갔다.
그 순간.
사방에서 마나가 확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동시에 능력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마도, 이게 원래 계획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파울라가 아직 이바나 일행 옆에 있는데? 설마, 같이 공격할 생각인가?
아니면, 파울라가 자살 공격을 하려는 걸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전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솔직히 다른 것은 어떻게 달라져도 상관없었다.
내가 이번 사건에서 바꿀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바나를 살려두는 것.
그녀만 죽지 않을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내가 몸을 날리려는 순간, 파울라가 먼저 움직였다.
파울라가 처음으로 능력을 썼다. 아니, 그녀가 능력을 쓰는 것을 내가 처음 보았다.
내 생각이 맞았다. 파울라는 속도와 관련된 능력이었다.
순간 이동을 하는 것도, 다리가 빨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평범하게 걷고 달렸을 뿐이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빨랐지만, 육체 능력자들이 보기에는 한심해 보일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다만, 그녀의 한 걸음을 걷는 순간, 그녀의 몸이 쑥 앞으로 당겨졌다.
한 걸음 만에 이바나 옆에 도착한 그녀가 이바나의 팔을 낚아채고, 다시 한 걸음 걸었다.
화악.
이번에는 이바나도 파울라가 걷는 쪽으로 확 딸려갔다.
속도가 빨라진 것도, 공간을 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먼 길을 짧게 접은 뒤, 그 길을 걷는 것 같았다.
이바나가 볼 때는 공간이 접힌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무협지의 축지법 같은 건가.'
능력이란 게 별것이 다 존재했다.
어찌 되었건, 두 소녀는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혼자 남은 호위 기사에게 공격이 쏟아졌다.
"이놈들이!"
갑자기 이바나를 빼앗겨서 정신이 없어 보였지만, 제국 첩자와 호위 기사의 싸움은 저번 삶에서 들었던 것과 달라지지 않았다.
쏟아지던 불길이 갈라지고, 무기들이 튕겨 나갔다.
"기다려!"
공격을 쳐낸 뒤, 멀어지는 두 소녀에게 호위 기사가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제국에서 온 첩자들은 움직이려는 호위 기사에게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계획과 달려져서 곤혹스러운 얼굴들이었지만, 첩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첩자들은 차례대로 호위에게 쓰러졌다.
불을 날리던 호위가 검에 잘려 나가고, 염력으로 무기들을 날리던 자가 호위가 던진 단도에 목숨을 잃었다.
첩자들만으로는 호위를 점점 더 막아서기가 힘들어졌다.
"꺄악."
멀어지던 소녀들 쪽에서도 비명이 들려왔다.
이바나가 어느새 검을 뽑아 파울라를 공격했다.
전부터 이바나는 평범한 능력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검도 꽤 잘 사용할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렇게 단호하게 휘두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파울라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파울라에게서 피가 흘렀다.
파울라가 쓰러지자, 숨어서 따라가고 있던 첩자 두 명이 몸을 드러내고 이바나에게 달려갔다.
달려가는 첩자들은 파울라와 달리, 살기가 넘쳤다.
호위를 막아서던 첩자들의 우두머리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뭔가 결심한 표정을 짓고.
첩자들이 이바나에게 달려가는 순간.
나도 몸을 날렸다.
* * *
이바나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2학년 여학생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처음부터 뭔가 껄끄러웠는데, 결국 이런 결과가 되어버렸다.
바닥에 누워있는 선배는 처음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아카데미에서 본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의심스럽긴 했지만, 말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을 적으로 몰아가기는 어려웠다.
거기다, 연기가 너무 진짜 같았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거북함을 한쪽으로 미뤄둘 정도로.
물론, 결론적으로 이런 결과가 되어버렸지만.
역시, 한 사람 이외에는 믿을 사람이 없었다.
파울라라는 학생이 쓰러지자, 숨어있던 자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호위가 더 일찍 도착할 게 분명했다.
이미, 호위 기사는 한 사람만 남기고 모두 쓰러뜨렸다.
마지막 악당이 막아서는 중이었지만, 바로 쓰러뜨리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달려올 게 분명했다.
그녀가 그럴 수 있게 저 호위 기사를 키워 놓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검을 늘어뜨리는 순간.
콰아아아아앙!
빛과 함께 골목이 터져나갔다.
화아악!
그리고, 바람이 밀려와 이바나와 누워있는 파울라를 날려버렸다.
폭발 순간, 이바나는 주변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세상이 빛으로 덮이고, 무언가 큰 힘에 몸이 날려간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쿵. 쿵.
그리고, 날아가던 그녀는 벽에 충돌한 뒤에 바닥을 굴렀다.
바닥을 구른 충격으로 그녀는 오히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골목이 사라졌다.
길도 지워지고, 골목 옆의 주택들도 사라진 상태이었다.
이제는 골목이 아니라, 거대한 구덩이가 생긴 커다란 공터라고 해도 무방해 보였다.
그 공터 위로 하얀 구름이 올라가고 있었다.
버섯 모양의 구름.
이바나는 달빛 아래서도 구름 모양이 신기해 보였다.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옆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붉게 물든 로브를 둘러쓴 자들이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녀에게 달려오던 악당들이었다.
이바나는 아직 완전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자신보다 폭발에 가까워서 저렇게 다친 건가? 그래도 저렇게 움직이니 대단하네.
이바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을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
이바나는 허공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분명, 전과 달라지지 않았지만, 달려오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달려오던 두 사람이 갈라진 세상을 중심으로 반으로 나뉘었다.
위와 아래로 갈라진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반으로 나뉘어 쓰러진 두 사람 뒤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전에 보았던 선배였다.
가엘을 무섭게 박살을 내던 선배.
그 무서운 선배가 버섯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분명, 검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어떻게 두 사람을 쓰러뜨렸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분명 그가 자신을 구해준 것이었다.
이바나는 멍하니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 * *
생각하던 계획이 무척이나 어그러졌지만, 결국, 목표는 이루었다.
이바나를 살리는 것.
이바나는 1 왕자의 약점이었다.
나는 그녀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게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