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제19편 무대가 준비되었다
"많이 배웠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일어난 뒤에 바로 기사단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큰 덩치에서 나오는 힘과 강력한 마나에서 우선 밀리긴 했지만, 검술과 심법도 나보다 한참 위였다.
다양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든 그의 실력은 예상대로 내가 현실에서 본 사람 중에 가장 강했다.
내 말에도 기사단장은 삐뚜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설마 자기 자랑인 거냐? 내가 대단하면 넌 마물 왕이라도 되는 거고?"
내가 정신이 없어서 너무 편하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기사단장도 무척이나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저 성격이라면 제1 왕자도, 제2 왕자와도 전혀 맞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나는 바로 사과했다. 괜히 잘못 보일 이유가 없었다.
"괜한 애 잡지 마라. 네 부하 놈들도 아니고."
"이 실력이면 졸업하면 바로 부하죠, 서자인데 가문에 남을 리도 없고."
취직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그만둔 것 아니었나?
"복귀는 할 생각이 있는 거냐?"
"다음 왕 결정되면 슬슬 얼굴을 비출 생각이긴 한데……."
정치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괜히 중간에 시달리느니, 뒤에 빠져 있다가 다시 나타나겠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인은 그의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전에 왕실 기사단이 사라질 것 같은데?"
"설마, 그 정도인가요?"
기사단장이 눈을 크게 떴다.
"소식도 안 듣고 있었냐?"
"지금이야 찾아오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잖습니까? 훈련하는데 재미가 들려서 밖에 나간 지도 오래되었고."
"쯧쯧, 머리는 없는 게 아닌데 이렇게 귀찮아해서야."
"그래서 여기에 박혀 있는 거잖습니까."
"그보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라가 망하다니."
"둘만 투덕거리다 다음 왕이 정해질 것 같지 않아. 이미 귀족들도 다 줄을 서버렸고. 왕이 죽으면 바로 내전일 거다."
마나를 잃기는 했지만, 왕족 입에서 내전 이야기가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내전을 예상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누가 이기든 과거의 왕실 기사단은 남지 않게 될 거다. 돌아올 자리도 없을 테지. 사람들이 바뀐 자리에 너도 돌아올 생각이 없을 거고."
"끙. 그건 곤란한데요."
노인의 말에 거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잠깐 상황을 살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둘 사이에 내가 슬쩍 끼어들었다.
어린 내가 끼어들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금 같은 기회가 다시 오긴 어려워 보였다.
두 사람은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를 왜 찾아온 거냐."
"응,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노인은 기사단장의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는 계속 나에게 말했다.
"어차피 공작님에게 배우고 있으면 나와의 대련은 별로 필요 없을 텐데?"
"그거야, 내가 대련을 해주기 어려우니까."
노인이 대신 이유를 이야기해주었다.
"팔찌 있으시잖아요."
"팔찌의 마나로는 대련도 쉽지 않아."
"이 녀석이 채우면, 충분히 싸울 시간이 나올 텐데요?"
설마, 내 '마나 감응력'도 알게 된 걸까?
노인은 의아해했지만, 기사단장은 팔찌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볼 뿐이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확실히 왕실 기사단장과의 대련은 후작가에서 겪은 대련과 달리 내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왕실 기사단이라 그런지 그의 검술은 노인, 세우타 공작과 거의 같았다.
그의 심법에 맞춰서 변형되긴 했지만, 분명 같은 검술이었다.
거기다, 그의 심법은 카를로스 용사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심법은 내가 가진 심법과 같이 쓰기 어려웠고, 검술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대련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도 실망이 컸다.
다만, 그를 찾아온 이유가 이 대련이 아닌 것도 사실이긴 했다.
"저는 아이샤 공주의 호위 기사입니다."
내가 스스로 공주의 호위 기사라고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내가 공주의 호위 기사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나는 그 말을 대충 얼버무리기만 했었다.
지금도, 솔직히 호위 기사라는 생각은 강하지 않았다.
지켜줄 만한 귀여운 여자아이긴 했지만, 내 생명을 공주에게 바치는, 그런 호위 기사 역할을 할 생각은 없었다.
"공주님과 카트린이 공작님께 너를 소개했다고 했었지? 평범한 사이는 아닐 거로 생각했는데, 호위 기사라."
그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호위 기사면 왕실 기사단이 되기 어려우려나……."
다만, 그 뒤에 중얼거린 말에 그가 왜 고개를 갸웃거렸는지 알 수 있었다.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무슨 생각인지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다만, 이어진 말은 뜬금없는 말과 달리, 무척이나 사무적이었다.
"호위 기사는 알겠는데, 그런데 그게 왜?"
그의 물음에 나도 차분히 말을 이었다.
"며칠 안 있어 수도에서 벌어지는 테러를 빌미로 왕실 기사단 일부가 공주와 대공녀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받은 게 아니었다.
저번 삶에서 직접 보고, 경험하고, 당사자들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이바나가 나를 찾아오지 않은 것처럼,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특별한 일이 없다면, 같은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내 말에 기사단장의 표정도, 공작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믿을 만한 곳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무리해서 기사단장님을 찾아올 정도로 믿을 만한 곳입니다."
내가 나를 못 믿을 리가 없었다.
내 말에 공작이 혀를 찼다.
"진짜 다른 이유였다고? 에잉, 요즘 애들은 잔머리를 너무 쓴다니까."
"제가 더 낫죠?"
커다란 덩치가 자신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네놈도 잔머리는 만만찮아. 귀찮아서 안 하는 거지."
기사단장의 말에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중요한 자리였지만, 아무래도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평범한 기사단 고문과 기사단장 같지 않게 엄청 친하시네요."
"이게 사이가 좋은 거냐?"
노인은 내 말에도 툴툴거렸지만, 기사단장은 한숨을 내쉬며 내 말에 대답해 주었다.
"이렇게 오래 만났으니, 애증이지 뭐, 공작님이 내게 검을 가르쳐 준 스승이 아니었다면, 너를 보지도 않았을 거다."
나는 놀라고 말았다.
평범한 사이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스승과 제자일 줄은 몰랐다.
그제야 의문들이 풀렸다.
왜, 세우타 공작이 왕실 기사단 고문으로 남아 있게 되었는지, 기사단장이 이 숲에 있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기사단장의 검술이 노인의 것과 닮은 이유도 알게 되었다.
확실히 기사단장의 말대로 검술을 배울 생각이면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기사단장이 노인에게 물었다.
"저놈이 다음 대 왕실 기사단장 감입니까?"
"글쎄, 그럴 생각으로 만나긴 했는데…….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왜, 노인이 나를 열심히 가르치려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다만, 그것만으로 보기에는 좀 과한 것 같았는데…….
"글쎄요. 16살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 나이에 저는 밑에서 박박 굴렀습니다. 저 실력이 계속 쭉쭉 자란다고 생각하면……. 괴물인데요? 저놈이 기사단장이면 제1 왕자나 제2 왕자가 저놈을 제어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요?"
기사단장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마구 잣대를 들이대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꾹 참았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걸 생각하시는 겁니까?"
"몰라, 좀 더 봐야 해."
"그렇다면, 나도 한 손 거들어야 하나……."
또,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대화가 이어졌다.
지위도, 힘도, 실력도 달리니, 도무지 끼어들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황은 오랜만이었다.
이야기마저 다른 쪽으로 계속되어 속이 답답해졌지만,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인내는 내 가장 큰 힘이었다.
그리고, 그 인내는 대답을 얻어냈다.
"뭐, 한번 나들이 나갈 때도 되었지. 그런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부단장에게 다 맡겨놓아서 애들이 내 말을 들을지 알 수가 없어."
기사단장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잘못된 정보일 게다. 줄을 서는 정도면 모를까, 왕실 기사 놈들이 그 정도까지는 타락할 리가 없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기사단 고문인 그로서는 내 말을 믿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나가보면 알 수 있겠죠. 예전에 부단장이 줄을 서버렸다는 말도 듣긴 했으니, 확인도 해볼 겸 해서요."
기사단장은 산보를 나가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말을 하는 그의 눈은 무척이나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 *
시간은 쏜살처럼 지나가, 수도에서 테러가 벌어졌던 날이 밝았다.
조원들은 나를 빼고 모두 수도를 떠나 있었다.
며칠 전부터 나는 이바나를 몰래 따라다니고 있었다.
일이 벌어지는 날짜가 바뀔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과 달리, 이바나는 나를 찾아오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다녔다.
나를 보고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무서운 것 같았다.
후작 아들을 너무 심하게 때린 모양이었다.
과거와 달라진 것 때문에 혹시나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오후가 되자, 슬쩍 돈을 찔러넣은 교직원에게서 이바나의 외출 신청이 들어왔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이 오기까지 파울라도 여러 번 봤었다.
하지만, 파울라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죽기 전에 그녀의 본성을 충분히 보았었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그런 모습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발레아의 가식과는 느낌이 달랐다.
과연 제국의 스파이랄까.
내 연기 실력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수업이 모두 끝나자 이바나가 아카데미를 나섰다.
용병 차림의 남자가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강한 기사네.'
용병처럼 입고 있었지만, 멀리서도 실력을 알 수 있었다.
웬만한 기사단의 선임 기사 이상, 왕실 기사 중에서도 눈에 띄는 실력의 기사일 터였다.
왕세자가 뛰어난 기사를 붙여 준 것인지, 이바나가 자신의 능력으로 호위를 강하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호위를 보니, 납치가 실패한 원인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마나를 숨기고, 기척을 죽인 채로 계속 두 사람을 따라갔다.
미리 준비한 마차에 두 사람이 올라탔다.
나는 마차를 준비하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저렇게 느리게 움직이는 마차를 쫓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들키지 않고 움직이는 게 무척이나 피곤할 따름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이미 해가 져 있었지만, 마차가 움직이는 동안 깜깜한 밤이 되었다.
덕분에 마차를 쫓기는 더 쉬워졌다.
마차는 수도 중심에 멈췄고,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골목길로 향했다.
저긴가.
골목길에서 옅은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고, 나는 벽을 타고 건물 위로 뛰어 올라갔다.
내가 지붕 위로 솟구치자, 놀라서 나를 보는 사람이 있었다.
로브로 감싼 중년인이었다.
조직의 첩자이자, 제국의 관료.
나는 손을 뻗어 중년인의 목을 쥐었다.
"컥."
능력을 사용할 틈을 줄 수는 없었다.
손에 힘을 줬다.
스파이의 숨이 멈추었다.
나는 시체를 옆에 눕히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명당자리였다.
이곳에서는 골목길 안이 다 보였다.
골목길에 접어드는 이바나와 호위, 그리고, 반대쪽 그늘에 숨어 있는 파울라와 로브를 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배우가 모두 무대에 올라왔다.
관람객인 나도 준비가 되었다.
이제, 막을 올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