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제17편 왕실 기사단장 (2)
과거로 돌아온 뒤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 많이 고민했다.
다른 일들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제1 왕자는 내가 어떻게 하기 힘들었다.
왕이 살아있는 지금, 그는 이 왕국의 왕세자였다.
제2 왕자가 그에게 도전하고 있다지만, 그는 왕위 계승 1위의 정통한 승계자였고, 수많은 지지 세력을 가진 왕국 제일 파벌의 수장이었다.
겨우 15살, 왕실 아카데미 학생인 내가 그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망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른 체하기도 불가능했다.
제1 왕자와 이바나는 황당하게도 남매 사이였다.
거기다, 왕자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제1 왕자는 왕족들보다 이바나를 더 가족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를 그냥 놔둔 채로, 이바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나바가 몸을 사리지 않는 이상, 언젠가 파울라나 제국 스파이들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왕실 기사단이 움직일 테고, 그러면 그 핑계로 공주와 대공녀에게 위협이 가해질 가능성이 컸다.
결국, 어떻게든 제1 왕자의 손발을 묶을 필요가 있었다.
힘을 빼놓지 못하더라도, 일이 벌어지는 동안은 정신을 못 차리게 해야 했다.
그렇다면, 제1 왕자의 수족이 되어버린 왕실 기사단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방법밖에 없었다.
"칩거한 기사단장 이야기냐?"
"네, 제가 배운 것을 기사단장에게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기사단장이 없는 사이에 부단장이 왕세자 편에 붙었다는 이야기나,
그 때문에 왕실 기사단이 왕세자의 수족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왕실 기사단의 고문인 그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고, 내가 참견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상대해주는 것은……. 역시 무리인가……."
노인은 난감한 얼굴로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있는 게 보였다.
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몰랐는데, 처음 왔을 때는 반지를 낀 상태로 왔었던 모양이었다.
노인이 끼고 있는 반지는 마나를 채워 넣을 수 있는 유물 반지였다.
저 반지로 마나를 지닐 수 없는 노인이 나와 대련을 했었다.
처음 대련은 길지 않았지만, 내가 마나를 채워왔을 때는 꽤 오랜 시간을 대련할 수 있었다.
지금도, 노인이 끼고 있는 반지에 내가 최대한 충전한다면 상당한 시간 동안 그와 대련을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 반지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노인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왕실 기사단장은 몇 년 전, 몸이 안 좋아져서 자리를 내놓고 집에 칩거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떠난 뒤에 기사단장 자리가 계속 비어있는데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왕자들의 권력다툼에 진력이 나서 칩거해버렸다는 게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원래부터 정치와 거리가 먼 뿌리부터 기사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두 왕자가 계속 치근덕댔으니, 도망칠 만도 했다고 다들 이야기했다.
내가 그를 만난다고 뭔가 대단한 결과를 만들어내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나를 도와줄 리도 없고, 정치에 질려 칩거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박차고 나올 리도 없었다.
그렇지만,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현 왕실 최고의 기사였다. 검만 섞어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거기다, 상황을 보고, 대충 유언비어라도 왕실 기사단에 불어넣을지 몰랐다.
작게나마 혼란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약간만이라도 제1 왕자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면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왕실 기사단장을 알게 되는 것은 내 배경을 늘리는 일이 될 터였다.
저번 삶에서 깨닫게 되었다. 개인의 힘은 권력에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물론, 마왕 같은 집단을 이기는 힘도 존재하지만, 사람들과 더불어 살려면 권력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힘을 당장 가질 수는 없지만, 그에 상대할 방법은 알고 있었다.
공주와 대공녀를 알고 지내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포함되어 있었고, 앞으로는 그런 사람을 더 늘려볼 생각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해 보마, 그래도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성격이 꽁한 녀석이라, 제 마음에 안 들면 죽어도 안 하는 놈이거든."
"어쨌거나 그전에는 나하고 훈련을 해 보자고. 제대로 된 대련은 아니지만 대련할 방법도 있어,"
전과 달리, 훈련을 같이하자고, 노인이 내게 매달렸다.
계약도 바로 할 테니, 비밀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전처럼 실내 연무장을 빌릴 거라고 했다.
"매일은 무리니, 일주일에 두 번 만나는 것으로 하자고."
만나는 날도 배로 늘어났다.
세우타 자작에게 배우는 것은, 내가 오히려 바라는 일이었다.
당연히 나는 노인의 말에 따랐다.
노인의 말을 따르면서도 궁금함은 더 커졌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었다. 노인도 내게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선물을 줄 리가 없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신전에서 계약까지 하고, 칩거한 왕실 기사단장까지 소개해주면서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일지.
나를 성장시켜서 그가 얻을 게 무엇일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과거를 반복하는 나로서는 '나비 효과'라는 것을 그렇게 크게 느낄 수 없었다.
기상학이라면 맞을지 모르지만, 미래는 그렇게 작은 일로 변하지 않았다.
내 앞을 가로막은 신입생을 보니, 다시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계에는 정해진 미래로 달리길 원하는 시간 선이라는 게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그 시간 선은 내가 여러 번 깨뜨려왔었다.
나 때문에 계속 바뀌어온 미래.
어딘가에 예언 능력자가 있다면, 나 때문에 화를 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오늘은 세우타 공작과 실내 연무장에서 처음으로 수업을 받은 날이었다.
비밀을 지킨다는 신전 계약서를 보여준 공작은 처음부터 반지를 끼고, 나와 대련을 했다.
죽기 전에 했었을 때보다 대련은 짧게 끝났다.
대련은 전보다 격렬했고, 마나도 그때보다 훨씬 빨리 줄어들었다.
짧은 대련이었지만, 나도 공작도 만족했다.
공작은 내 실력을 경험한 것에 만족해했고, 짧은 시간이지만, 나도 공작의 본 실력을 보게 되어 만족했다.
다만, 공작은 전보다 더 힘들어했다.
그리고, 공작은 전처럼 내게 반지를 건네주었다. 다음 대련을 위해 마나를 채워오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전과 달리, 이번만큼만 채워올 생각이었다.
왕실 기사단장을 소개받으려면, 공작과의 대련은 짧아서 아쉬운 대련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련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후작 아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알렉스 선배님이시죠? 2학년 기사 학부에서 제일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전과 토시 하나도 다르지 않은 말.
전에는 몰랐지만, 열심히 외운 말이 분명했다.
자, 여기서부터는 나도 긴장을 해야 했다.
"1학년 중에는 더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님에게……."
"거절한다."
이런 조금 빨랐나?
대련 소리가 나오기 전에 거절해버렸다.
다행히 후작 아들의 행동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내 말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에 모여 있는 신입생들 사이에, 여학생이 보였다.
이바나, 왕세자의 여동생이었다.
왕세자의 숨겨진 여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여학생이 다르게 보였다.
내려다보는 그녀의 시선도, 주변으로 흘러나오는 카리스마도, 모두 그녀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알고 보니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모르고 보면 잘난 체하는 평범한 신입생일 뿐이었다.
후작 아들이 돌아보자, 이바나가 눈꼬리를 올렸다.
후작 아들은 후다닥 고개를 돌리고, 나에게 소리쳤다.
"피센가의 가엘 드 피센이 알렉스 선배님께 결투를 신청합니다!"
결투 신청을 듣고,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일들과 달리, 이 결투는 나도 확실히 일어날 거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최대한 똑같이 상대하려고 했지만, 역시 완전히 똑같이 할 수는 없었다.
'나비 효과'대로라면, 틀어진 대화 때문에 결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나는 '나비 효과'에 중지를 날리며, 후작 아들의 말에 대답했다.
"아니, 결투가 아니라……."
"결투를 받아들인다. 대신 학생들 간에 목숨을 거는 것은 문제가 있으니, 승부의 결과는 다른 것으로 하지."
이번에는 후작 아들이 좀 더 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래봤자, 결투라고 말한 이상 물리기는 어려웠겠지만.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요청 하나를 들어주는 것으로 하자고. 귀족의 명예를 걸고."
하얗게 변한 신입생 얼굴을 또 보게 되는 것은 그리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 대신 여학생 얼굴에서 왕세자와 닮은 부분을 요리조리 찾아보았다.
자세히 보니, 꽤 닮아 있었다.
왕세자도 잘생기고, 이바나도 미인 축에 들었다.
그래도, 이바나의 아버지인 자작을 떠올리니, 아무래도 이바나는 어머니인 왕비 쪽을 닮은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본 모양이었다.
이바나가 나를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얼굴을 구기니, 더 닮은 것 같았다.
그렇게 결투가 정해지고, 우리는 바로 가까운 연무장으로 향했다.
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들을 것은 다 들었고, 사정도 알고 있으니, 나는 후작 아들에게 따로 묻지 않았다.
검을 들고, 신입생 하나가 신호를 보내는 순간, 그대로 달려들었다.
간을 볼 생각도, 실력을 키워줄 필요도 없었다.
검을 휘둘러, 후작 아들의 검을 날려버리고, 다리를 휘둘러, 놈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마지막으로, 쓰러지는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이빨이 날아가고, 코피가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대자로 뻗은 놈을 보고 만족했다.
후작이 간을 본 덕분에 공주가 크게 다쳤었다. 덕분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이 녀석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나를 고생시킨 보상은 받을 필요가 있었다.
"요청 사항은 나중에 말해 줄게."
이번에는 전보다 더 늦게 말해 줄 생각이었다.
후작 아들이 박살 난 일로 전처럼 나는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졌다.
과한 구타에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지만, 그만큼 대리 만족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다음 조별 과제 모임에서 사람들이 그 일로 나를 놀려댔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들 조사한 것을 이야기해주실래요?"
대공녀의 말에 조원들은 조사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조사들이었다.
대공녀는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알렉스 공자님은요?"
죽기 전에는 후작 아들과의 약속을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별로 조사한 내용이 없습니다."
똑같이 움직이면 같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 좀 더 조사해 볼까요?"
시간을 더 들이자는 말에 내가 나섰다.
"우선 조사한 곳에서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첫 방문이니 연습 삼아 움직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들 수도에 남아있으면 곤란했다. 변수는 최소한으로 줄이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내가 나선 덕분에 수도 근처의 던전으로 첫 조별 과제 방문을 정하게 되었다.
조사가 끝난 관광코스 같은 던전이었다.
유물 같은 것이 나오기는 힘들었지만, 첫 방문으로 더 좋은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결정이 된 뒤에, 모두에게 폭탄을 떨구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첫 번째 조별 과제 여행은 빠져야겠습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내 말에 조원 모두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우기다시피 해서 결정된 여행이었다. 그런데 당사자가 빠진다니.
몇몇 사람은 아예 애인에게 배반당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약속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세우타 공작이 칩거한 왕실 기사단장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왕실 기사단장의 집을 방문하기로 한 날짜가 여행일 중에 있었다.
물론, 여행에서 빠지는 진짜 목적은 왕실 기사단장 방문이 아니었다.
조별 과제의 첫 여행 동안 수도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이바나의 납치 실패와 자폭.
그 일에 끼어들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