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제16편 왕실 기사단장 (1)
내가 돌아온 시간은 개학식 날 저녁.
20살 용사 카를로스에게 도전했다가 죽어버린 그 시각이었다.
나는 검을 놓고, 침대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통증이 밀려왔다. 목이 잘렸으니,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저번 삶에서 얻은 수많은 경험을 생각하니, 고통은 참을 만했다.
왕실 기사단 고문인 세우타 공작에게서 배운 검술과 심법, 피센 후작가에서의 대련, 마지막으로 왕실 기사단 부단장과도 싸워보았다.
훈련과 대련으로 몸에 새겨놓은 것은 사라졌지만, 머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죽기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으니, 어느덧 통증이 가라앉았다.
바로 장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밤이 되었지만, 더 늦기 전에 검을 휘둘러야 했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몸에 새겨놓아야 했다.
건물 입구에서 교직원에게 야간 훈련을 하러 간다고 말한 뒤, 가까운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연무장.
주변 건물들 창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빛으로 삭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전생에 화려한 야경은 아니었지만, 이 세계의 은은한 불빛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검을 휘둘러 보았다.
기억하고 있는 검술을 따라, 검을 움직였다.
역시 어색했다.
머리는 기억하고 있는데, 몸은 처음 겪는 그런 어색함이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수많은 반복된 삶에서 계속 겪어왔던 것이었다.
해결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계속 반복하면 되었다.
검을 휘둘렀다.
밤이 새도록.
* * *
다시 겪는 2학년 수업은 전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교양 시간이 줄고, 늘어난 기사 학부 수업에서는 홀로 훈련하게 되었다.
다른 학생들과 실력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난감하게 느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좋았다.
죽기 전에 얻은 검술과 심법을 몸에 체득할 시간이 필요했다.
잠자는 시간과 수업 시간을 빼고는 계속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월반이 아니라 조기 졸업이라도 시켜줘야 할 것 같은데……."
저번 삶과 비슷하게 카트린이 혼자 검을 휘두르는 내 옆에 다가와 말을 붙였다.
전과 비슷한 말이었다.
아마, 내가 이렇게 답했었지?
"무리일 겁니다. 교양 성적 때문에요."
"월반 정도는 가능하지 않아?"
그녀와의 이야기는 저번 삶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서자라서 피해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와 나라에 대한 한탄.
그리고, 카트린이 그때처럼 내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기다려,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비슷하게 생활하니, 비슷하게 삶이 이어졌다.
다음날부터 카트린은 수업에 빠졌고, 나는 주변의 소란과 상관없이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다 보니, 주말이 찾아왔다.
나는 저번 삶과 똑같이 배낭을 메고 아카데미를 나섰다.
그때와 똑같이 경매장 주인을 만나 배낭에 든 물건들을 팔았다.
그는 전과 같이 쏟아진 장물들보다 배낭을 더 원했지만, 지금도 배낭을 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 나는 그에게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이름이 신검 추적자라고 했나요?"
내 말에 툴툴거리며 장물을 정리하던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용병 때 이름이긴 하지만, 네, 아직도 그 이름을 씁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조금 전에 배낭을 가지고 생떼를 부리던 남자의 말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용병 이름이란 게 자신의 목표와 정체성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내 말에 신검 추적자가 쓰게 웃었다.
"그런 사람도 있고, 겉멋으로 지은 사람도 있고, 그런 거죠."
"신검 추적자는 겉멋으로 지은 이름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뭐, 겉멋은 아니지만, 한참 열정이 있을 때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지금이야 미련만 남은 거겠죠."
회한에 잠기던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아, 미센 후작가의 신검을 본 적이 있어서요."
죽기 전, 없어진 시간대에서 본 것이었지만, 보기도 하고 검을 섞어보기도 했다.
"오, 그 검을 보셨나요? 별수를 다 써도 정말 안 보여주던데."
내 말에 신검 추적자의 눈이 커졌다.
생각보다 과한 반응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추적하고 있다는 신검이 후작가에 있는 신검은 아니겠죠?"
그렇다면, 나는 괜한 말을 꺼낸 것이었다.
다행히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신검을 찾고 있었습니다. 용사가 쓰던 사라진 신검을."
왜 찾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아직 그것까지는 묻지 않았고.
"후작가 신검을 보려고 했던 이유는 혹시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보면 뭔가 알 수 있습니까?"
"신검과 관련이 있다면요. 하지만, 잡아보기는커녕, 멀리서 보기도 어려워서요. 가지고 있는 유물로 이야기해보려 했지만, 평범한 용병은 상대해주지도 않더군요."
각성한 이상 평범한 용병이 아니었겠지만, 후작이나 후작의 기사단장을 상대하기는 무리였을 터였다.
후작가에 있는 검이 신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단검의 에고가 확인했다.
유물 감식이 가능한 이 남자라면 뭔가 더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운이 좋다면 좋은 소식을 들고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혹시 배낭을 파신다는 건가요?"
신검 이야기가 끝나자 남자는 바로 경매장 주인으로 돌아와 버렸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다음 장소로 향했다.
다음 장소는 대공녀가 사는 저택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대공녀를 만나 망가진 유물들을 건네주었다.
전과 달리, 비율 가지고 투덕거리지는 않았다.
"고치면 수익의 5할을 드리죠. 부족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앞으로 계속 이어나갈 계약금으로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내 말에 대공녀는 수긍했다.
전보다 1할 더 먹게 되었지만, 계속 지원하겠다는 말 때문에, 분위기는 오히려 더 좋았다.
어차피 원가가 제로였고, 앞으로 더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는 조별 과제 조가 정해졌다.
조원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대공녀와 공주, 발레아와 미리사, 그리고 요하힘.
출입구에 붙은 명단에 적혀 있는 요하힘이라는 이름을 노려보았다.
아직 요하힘을 어떻게 할지 정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적으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직이란 곳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람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제국인이었고, 그의 형은 조직원으로 나에게 죽은 사람이었다.
거기다, 어차피 일이 진행되면 그는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내 앞을 막게 될 녀석이었다.
생각해보면 죽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착한 사람이라고 봐줄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첫 번째 모임 시간이 되었다.
전처럼 대공녀의 주도로 자기소개가 이어지고, 이어서 대공녀가 우리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과제 이름은…… 유물 조사대입니다."
다들, 이 조별 과제가 어떤 과제인지 알게 되었지만, 이번에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처럼 어떻게 조사를 할지 각자 이야기를 했고, 나는 반복되는 장면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또 그런 표정이네요. 뭔가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표정, 가끔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져요."
옆에서 발레아가 말했다. 확실히 나를 오래 지켜본 발레아라면 알아볼 수도 있을 듯했다.
"잠시 멍해져 있었네요. 고마워요. 덕분에 정신을 차렸네요."
삶이 반복되면 가끔 이렇게 세상과 내가 분리된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빨리 정신을 차려야 했다. 멍하니 있다가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모임이 끝난 뒤에도 할 일이 남아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그녀 특유의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발레아를 뒤로 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전처럼 공주가 뒤에서 나를 불렀고, 나는 다시 공주에게 부탁했다.
최대한 전과 달라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결과는 내일 알 수 있을 터였다.
다행히 달라지지 않았다.
월요일, 카트린이 다시 수업에 복귀했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 세우타 명예 공작과 함께.
평범한 노인의 등장에 모두 의아해했지만, 나를 봐주러 왔다는 말에 전처럼 수긍해주었다.
노인은 지팡이를 짚으며 따로 서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내 앞에 서서 전처럼 내 몸을 훑어보았다.
"분명 마나 심법을 익히고 있다고 들었는데, 왜 몸이 그러냐?"
전과 같은 말.
내 대답은 전과 달랐다.
"하나하나 확인하시는 것보다,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몸도 그걸로 설명된다는 거냐? 재미있는 놈이군."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노인에게 말했다.
"제 실력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노인은 내 말에 코웃음을 쳤다.
"어서 검이나 휘둘러봐라. 마음에 들면 계약이라도 해주마."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신전에 가서 비밀을 지킨다는 계약까지 했었던 세우타 공작이었다.
비밀을 지키겠다는 그의 말은 믿을 수 있었다.
나는 자세를 잡고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멀리서 알 정도로 마나를 끌어올리지는 않았다.
다른 능력을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죽기 전에 배우고, 그동안 훈련으로 몸에 새겨진 검술과 심법들을 모두 펼쳤다.
부웅.
바람이 일고,
파앗,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가의 검법에서 후작가의 검법으로 넘어가고, 심법이 변형되었다.
검이 빨라졌다가 다시 느려졌다.
세상이 느려지고, 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점점 검술에 빠져들어 가는 순간, 고함이 들렸다.
"멈춰!"
노인이 외친 고함이었다.
놀라서 검을 멈추자, 왜 노인이 고함을 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연무장에서 훈련을 받던 학생과 기사들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나도 따로 끌어올리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바닥에 남은 흔적을 보니, 그들이 왜 봤는지 알 수 있었다.
갈라지고, 휩쓸린 흔적들.
단단하게 다져진 바닥이 울퉁불퉁하게 변해있었다.
검이 닿은 것도 아니었다. 마나가 일으킨 기적도 아니었다.
검이 일으킨 검 풍만으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마나를 너무 끌어올렸습니다."
나는 큰 소리로 이곳을 보는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기사들과 학생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한 사람은 내 말에 속지 않았다.
"마나를 끌어올리긴 뭘 끌어올렸다고. 다른 사람이 이 정도 흔적을 남길 정도로 마나를 끌어올렸으면, 옆에 있는 나는 충격에 피를 토했겠지."
노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밀로 하라는 이유는 알겠구먼."
노인은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 나이가 맞는 거냐? 천재가 뱃속에서부터 검을 휘둘러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텐데."
검을 휘두른 시간으로 따지면, 뱃속에서 지금까지의 시간보다 길었다.
"공주와 카트린이 졸라서 왔더니, 무슨 괴물이 떡하니 등장해있냐."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여준 게 달랐으니, 반응도 달랐다.
"그런데 다 어디서 배운 거냐. 아니, 비밀로 해 달랬지. 이런, 괜한 약속을 한 건가."
혼자 한탄하던 노인이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 정도 실력이면, 내가 가르칠 게 있을지 모르겠네."
실제로 배운 시간이 짧아서, 세우타 공작에게 배울 것들은 많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먼저 확인할 게 있었다.
"혹시, 왕실 기사단장님이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