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제13편 모레나 영지 (2)
나는 메시지창을 뚫어지게 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요."
이미 한번 거절했고, 이번 삶은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승낙할 리가 없었다.
바로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메시지창이 갑자기 튀어나온 이유가 뭔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메시지창이었다.
수도에서 나올 때도 메시지창을 봤었다.
그리고, 그 수도에서 테러가 일어나 지금 이렇게 왕실 기사단에 쫓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모레나 영지에 뭔가 특별한 일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갑작스러운 말에 같이 길을 걷는 동료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손을 흔들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모레나 영지는 작은 영지였다.
모레나 자작이라는 신흥 귀족의 영지였는데, 자작은 이 영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수도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자작이 이 영지를 맡긴 관리인이 퇴직 왕실 기사 오헨이었다.
영지는 작은 마을 몇 개와 도시급이 안 되는 큰 마을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지는 작았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마을의 목책도 높지 않고, 경계를 서고 있는 영지병들의 기강도 좋아 보였다.
치안도 괜찮은지, 소작민들이 무장도 안 하고 길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들이 입고 있는 옷도,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분위기는 꽤 어둡게 느껴졌다.
설마, 벌써 소식이 전해진 걸까?
우리는 마을 입구에서 영지병에게 검문을 당했다.
검을 차고 로브를 두른 외지 용병이 찾아왔는데 검문을 안 할 리가 없었다.
다행히 마틴이 때맞춰 움직여주었다.
그는 문을 지키는 영지병들에 돈을 찔러넣었고, 우리는 무사히 영주 저택이 있는 마을로 들어설 수 있었다.
잠시 뒤, 영지병들에게서 소개를 받은 여관에 도착했다.
크지는 않지만 깔끔한 여관이었다.
여관에 들어가기 전에, 마틴이 말했다.
"제가 정보를 모아오겠습니다. 아주 큰 마을이 아니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럴 때는 노련한 용병이 움직이는 게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마틴의 말에 파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늦지 않게 오세요."
파울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틴은 골목길 사이로 사라졌다.
우리는 여관에 들어갔다.
"손님 오셨어요!"
우리를 보자, 여점원이 주방 안쪽에 소리를 질렀다.
안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나왔다.
"외지 용병분들이네. 식사? 방? 어느 쪽?"
"이동하는 중에 쉬기 위해 들렸어요. 하루 이틀 정도 묵을 생각이에요 큰방 하나, 작은 방 하나로 부탁드립니다."
"여자 용병이었구먼. 여자 용병은 오랜만이네."
파울라의 말에 여성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들었지? 1번, 2번 확인해!"
"네."
여직원이 걸레를 들고 계단 위로 올라가고, 중년 여성은 우리를 보며 다시 물었다.
"식사도 할 거지? 외진 곳이라 손님은 자주 없지만, 요리는 자신 있어."
각성한 귀족이라도 밥은 제때 먹어야 했다.
파울라는 식사를 주문했다.
음식은 맛이 있었다.
식사 뒤에 우리는 방에 올라가지 않고, 마틴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른 영지와 달리, 이 영지는 지금도 괜찮은가 보네요. 영주가 좋으신가 봐요."
멍하니 기다리기 지루해서 방을 치우고 아래로 내려온 점원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다행히 점원은 내 말에 대답해 주었다.
"우리 영지 진짜 좋죠? 전부 오헨 님 덕분이에요. 아예 오헨 님이 영주님이었으면 좋겠어요."
"네이! 그런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냐!"
"메에, 어차피 수도에 가신 영주님 얼굴은 본 적도 없는데요 뭐. 엄마도 젊었을 때 보고 못 봤잖아요."
종업원인 줄 알았는데, 딸인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건, 오헨이라는 퇴직 기사가 영지민들에게 꽤 신망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모레나 자작은 영지에 있지 않고 수도에만 있다는 정보는 한쪽에 치워두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모레나 자작처럼 영지를 관리원에게 맡겨두고 수도에서 지내는 귀족은 꽤 많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은데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살기 좋아 보이는 영지치고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얼마 전에 수도의 아카데미에 입학하신 오헨 님의 따님이 돌아가셨대요. 오헨 님이 걱정되어, 다들 표정이 안 좋은 거예요."
딸의 말에 지나가던 여주인이 혀를 끌끌 찼다.
"왜 수도로 보내셔서……. 그리도 착한 분이……."
엄마의 한탄에 딸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착한 분은 아니었는데요."
"아니, 이 년이, 돌아가신 분을 가지고."
여주인이 뭐라 했지만, 딸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사실은 바로 말해야죠. 오헨 님하고 다르게 무서운 귀족이셨잖아요. 오헨 님이 딸을 상전으로 모신다는 말까지……. 악!"
"당장 들어가! 처음 온 분들에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결국, 딸은 꿀밤을 맞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내 딸은 오헨 님 말고는 다른 영주와 귀족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래요. 오헨 님의 따님은 무서웠지만, 좋은 귀족이셨어요."
여주인도 거기까지 말을 한 뒤에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 주방 안쪽에서 그녀가 딸을 혼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두 사람 말을 되새기는 사이에, 마틴이 돌아왔다.
마틴이 돌아왔을 때는 해가 져서 밖은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마틴이 미리 차려놓은 다 식은 음식을 먹은 뒤, 우리는 방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남자들 방으로 정해놓은 큰 방으로 향했다.
모두 들어오자, 문을 닫고, 요하힘이 마나로 방음벽을 쳤다.
우리는 마틴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식당에서 들고 온 과실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마틴이 입을 열었다.
"오헨 경이 영지민들에게 꽤 인망이 있는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정보를 빼내기 어려웠습니다."
이건 들은 이야기였고.
"벌써 이바나 영애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영지에 퍼진 모양입니다. 너무 빨리 퍼져서 의아해했는데, 이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소문이 퍼졌다는 것도 이미 들었었다.
하지만, 마틴의 말대로 벌써 소문이 퍼질 일이 아니었다. 이곳은 실시간으로 소식이 전해지는 전생이 아니었다.
중요한 일이라면 봉화나 능력을 이용해서 급하게 전하는 일도 있었지만, 이번 일은 퇴직 기사의 양녀가 죽은 일이었다.
이렇게 빨리 영지로 전달될 이유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궁금했는데, 마틴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오헨 경은 소식을 들은 뒤로 계속 저택에 머무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내일 저택에 방문해서 물어볼 수 있겠군요."
파울라가 말한 질문은 평범한 질문이 아니었다. 무력으로 제압해서 고문으로 물어보겠다는 이야기였다.
파울라나 요하힘이야 이미 오명을 뒤집어쓴 상황이었고, 그들은 제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포기한 삶이지만, 마구잡이로 행동할 생각은 없었다.
오헨 전직 기사는 영지민의 사랑을 받는 영지 관리인이었다.
포기한 삶이었지만, 내 적도 아닌 좋은 사람을 고문하는 것은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적인 조직의 사람들과 이곳까지 같이 여행했는데, 고문을 하기 싫다고 그만두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거기다, 어느 쪽으로 했을 때 경험치를 더 줄지 알 수 없었다.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마틴의 다음 말에 그동안의 고민이 부질없어졌다.
"오헨 경은 집에 있지만, 그 집을 찾아갈 수는 없습니다. 지금 그 저택에 다른 손님이 와 있습니다."
"누가 와 있는데 안 된다는 거죠?"
파울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요하힘이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왕실 기사들이 호위한 화려한 마차가 저택을 방문한 모양입니다."
마틴의 말에 우리는 입을 딱 벌렸다.
여태 왕실 기사들을 피해 다녔는데, 찾아온 곳에 왕실 기사들이 와 있다니.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마차가 도착한 뒤에 이바나 영애가 죽은 소문이 퍼졌고, 검문이 시작된 것도 그 때문인 모양입니다."
우리가 의심스럽게 생겨서 검문을 당한 게 아니었다. 왕실의 높은 분이 와서 경계가 강화된 것이었다.
그 강화된 경계를 돈으로 뚫다니, 마틴 용병을 다시 보게 되었다.
"누, 누가 온 거죠?"
왕실 기사단이 호위한 마차라면 그 안에 탄 사람은 왕실과 관계된 사람이 분명했다.
"제1 왕자, 황태자인가요?"
내 말에 모두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파울라와 요하힘은 황태자라는 말에 놀란 것이고, 마틴은 내가 정답을 맞힌 것에 놀란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일을 떠올렸다.
퇴직 기사의 딸이 죽었는데, 왕실 기사단이 찾아온 것.
그리고, 죽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온 왕가의 마차.
양녀, 갑작스러운 입학, 특이한 능력, 황태자의 분노, 제1 왕자파인 피센 후작과 모레나 자작.
그런 이야기들을 하나로 모으니, 갑자기 전생에 보았던 막장 드라마가 떠올랐다.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생각을 치워버렸다.
상상하는 것으로는 소용없었다. 이번 일은 직접 들어야 했다.
마틴이 내 말에 수긍하는 것을 본 파울라는 손톱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아니, 왜 황태자가 이런 영지에……."
여기에 뭔가 있다는 것을 그녀도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더 파고들기는 위험했다.
엄청난 보물 앞에 용이 앉아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나갈 수 없을 테니, 내일 아침 일찍 떠나죠."
밤에 목책을 넘다가 들키면 귀찮아질 가능성이 컸다.
아침에 열린 문으로 나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파울라와 생각이 조금 달랐다.
다음날, 일찍 우리는 짐을 챙겨 큰 방에 모였다.
다시 요하힘이 방음벽을 치고, 파울라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일이 생겨서 급하게 가는 걸로 하죠. 아침 식사도 안 하는 것으로 하고요. 이 마을을 빠져나가면 바로 국경까지 멈추지 말고 계속 움직이죠."
거기까지 말한 파울라는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국경을 넘을 방법이 있으니, 알렉스 공자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국경으로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에, 다리를 휘둘렀다.
빠각.
"꺄아악!"
비명과 함께 다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다리에 맞아, 파울라의 다리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파울라는 봉쇄되었고.'
속도에 관한 능력일 테니, 다리만 부러뜨려도 파울라는 막을 수 있었다.
나는 바로 요하힘에게 달려들었다. 좁은 방, 짧은 거리였지만, 내가 닿기 전에 요하힘은 검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닿기도 전에 손안에 숨겨놓은 단도를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검기가 검을 뽑고 있는 그의 팔을 반쯤 잘라버렸다.
요하힘은 검을 놓쳤고, 바닥을 뒹굴었다. 피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파울라와 달리, 요하힘은 이 정도만으로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요하힘의 반대쪽 팔 힘줄도 끊고, 양다리의 힘줄도 잘라버렸다.
요하힘은 고통에 기절하고 말았다.
요하힘이 만들어놓은 방음벽이 사라졌지만, 내가 대신 쳐놓아서 소리가 새 나가지는 않았다.
두 귀족을 무력화시키고, 나는 여태껏 우리를 도와준 용병을 돌아보았다.
그는 도망가지도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는 여기까지군요. 함정 같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이시죠?"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역시 노련한 용병이었다.
"으윽. 맞아요. 왜죠? 갑자기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라도 생긴 건가요? 우리를 잡아가면 혹시 봐줄 것 같아서 그러는 건가요?"
파울라가 벌벌 떨면서도 나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리가요."
"그럼 왜?"
내 말에 파울라도 용병도 의아해했다.
"두 분은 입장권 같은 겁니다."
왕자를 만나기 위한 입장권이었다.
나는 용병을 마무리하고, 요하힘과 파울라를 탈탈 털어 확인한 뒤에, 차근차근 묶기 시작했다.
우선 요하힘이 죽지 않게 붕대로 잘 감았다.
파울라가 도망치지 못하게 힘줄 몇 군데를 손보고, 두 사람이 소리치지 못하게 입도 잘 싸맸다.
두 사람이 잘 준비된 것을 확인한 뒤에 방을 나섰다.
이제 황태자를 만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