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제12편 모레나 영지 (1)
우리는 조직의 안가인 여관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요하힘과 나, 파울라는 아침을 먹고 옷을 갈아입었다.
농사꾼의 옷 대신에 낡은 가죽 갑옷을 입고, 그럭저럭 쓸만한 철검을 허리에 찼다.
그 위에 로브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을 가리니, 우리는 키가 작은 경험 많은 용병처럼 보였다.
준비가 끝난 뒤, 우리 도망자들은 마틴 용병과 함께 여관을 떠났다.
나는 여관을 기억에 담아두고, 일행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졸업한 뒤에 시간이 되면, 용병이나 모험가들과 함께 유물을 찾아다닐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이런 동료들과 비슷한 일을 경험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더구나, 같이 움직이는 동료들을 신뢰하기 어려우니, 유물 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꺼낼 수도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식량과 생존 키트 일체를 챙겨 두었는데, 지금은 귀찮게 짐을 등에 지고 걸어야 했다.
"왕국 수도와는 전혀 다르군요.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네요."
길을 걸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던 요하힘이 작게 속삭였다.
"나라 꼴이 이런데, 수도 귀족들은 돈을 뿌려가며 왕자들에게 줄을 대려고 난리니……. 이 왕국이 유지되는 게 신기하다니까요."
요하힘의 말에 파울라는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뭔가 억울했던 걸까.
그녀의 말에 앞장서서 가던 마틴이 손을 저었다.
"왕이 건강했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아니, 두 왕자가 왕을 이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기 전에는 괜찮았다고 할까요."
마틴은 이 왕국에 오래 있었다는 말처럼 지나간 일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왕의 능력이라고 불리는 '마나 감응력'을 두 왕자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 문제였다.
대대로 안정적으로 내려오던 왕권과 후계자가 한 번에 무너진 것이었다.
파벌이 나뉘고, 귀족들이 서로 으르렁대던 것이, 왕이 정무에서 손을 떼자 전부 밖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이들의 말이 모두 맞았지만,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전생을 기억하고, 남과 다른 삶을 살고 있어도, 아직은 내 조국으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자잘한 잡담을 이어가며 길을 걸었다.
요하힘과 내가 있어서인지, 파울라와 용병 마틴은 조직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조직 이름도 듣지 못했네…….'
뭔가 이름이 있을 텐데, 다들 조직이라고 부르기만 했다.
그만큼 비밀을 지키는 것일 터였다.
용병 차림으로 길을 걷고 있으니, 마차를 타고 기사의 호위를 받을 때와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상황이 안 좋은 마을을 지날 때면 아이들이 몰려나와 우리에게 구걸하기도 했고, 집에서 재워주겠다면서 식량을 나누어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거기다, 보이지 않던 강도들도 보였다.
"이번에도 꽝이잖아."
"바랄 걸 바라."
길 한쪽에 수레가 쓰러져 있었고, 수레 주위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몇 명의 강도들이 수레를 뒤지고 있었고, 다른 강도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강도들이 길을 가던 가족 여행자들을 습격한 모양이었다.
시체 옆에 떨어져 있는 검과 쇠뇌를 보니, 남자들은 나름의 무력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그런 정도로는 무사히 여행을 마치기는 힘들었다.
다른 곳으로 피해 가기는 어려웠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강도들도 우리를 보게 되었다.
"어이, 용병 아저씨들, 싸우면 서로 귀찮아지니까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나가시죠."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가 뒤쪽으로 검을 흔들며 말했다.
푸하하하!
강도들이 모두 웃어 재꼈고, 요하힘이 입술을 깨물었다.
"참아요. 왕실 기사단이 우리를 찾고 있어요. 마나를 쓰는 용병들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확인하러 올 게 분명해요."
파울라의 말은 요하힘에게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표정을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드러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나는 카를로스 왕국인이니 미리 조심을 시킨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아쉽게도 금방 쓸모가 없어졌다. 참아야 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두목! 영 꽝이라서 안 되겠어요. 저 용병들도 털죠."
수레를 뒤집던 나이 든 강도가 우리를 가리켰다.
"괜찮겠어요? 꽤 구른 용병들 같은데……."
다른 강도가 뭐라 했지만, 강도는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그의 목에는 용병이라는 표식인 철패가 걸려있었다.
"내 용병 짬밥이 몇 년인데. 앞에 있는 용병은 제대로 구른 용병이지만, 로브를 쓴 뒤의 세 명은 제대로 된 용병이 아냐."
그의 말에 파울라와 마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옷만으로는 눈썰미가 있는 용병에게 숨길 수 없었다.
요하힘이 검에 손을 올렸다. 바로 나서서 처리해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파울라는 요하힘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 눈썰미라면 믿을 만하지. 포로 지킬 한두 명만 남고 모두 붙어!"
강도 두목도 용병 출신의 강도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여겨진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검을 허공에 대고 빙빙 돌렸고, 강도들이 다가왔다.
척.
검을 빼내려는 요하힘의 손을 잡았다.
"마나를 쓰는 것을 들키지 않으면 되는 거죠?"
요하힘의 팔을 잡은 채로 파울라에게 물었다.
"그렇긴 한데요……."
"그럼 제가 나서죠."
나는 요하힘의 팔을 놓고 앞으로 걸어갔다.
마틴은 검을 뽑았지만, 이미,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중이었다.
역시, 노련한 용병이었다.
실력자들이 같이 있는데 용병인 그가 나설 이유가 없었다.
이런 용병이 그 조직의 일원이라니, 무척이나 아쉬웠다.
내가 나서자, 요하힘도 뒤로 물러섰다.
나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다가오는 강도는 열 명 남짓.
다가오는 강도 중에 각성한 귀족도, 마나를 느낀 자도 없었다.
당연히 이렇게 작은 강도단에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철검을 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나 없이 싸우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런다고, 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고, 다시 한걸음. 그리고, 앞으로 달렸다.
마나를 사용한 번개 같은 움직임은 아니었다.
단련된 일반인이면 할 수 있을 만한 움직임이었다.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미친놈 아냐?"
"하나씩 죽여달라는 거잖아. 더 좋지 뭐!"
"내가 먼저야! 내가 먼저!"
다가오던 강도들이 나를 보고 신나게 떠들더니, 바로 앞의 강도가 마주 달려 나왔다.
그는 피가 가득 묻은 칼을 양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가까워지면 내려치려고 했던 것 같지만, 내 달리기는 지금보다 더 빨랐다.
내 능력의 기초는 처음 각성한 '육체 최적화'였다.
어렸을 때도 마나 없이 기사와 대련 할 수 있었던 능력이었다.
그런 내가 이 정도 속도만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강도가 검을 내려치기 전에 나는 강도를 스쳐 지나갔고, 내 검은 그사이에 강도의 양팔을 베어버렸다.
서걱.
검을 쥔 팔이 하늘로 솟았다.
모두의 시선이 팔로 향하고 있을 때, 나는 계속 움직였다.
한걸음 옆으로 움직이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서걱.
목이 잘려 나갔다.
잘려 나가는 목을 뒤로하고 힘껏 몸을 날렸다. 검을 앞으로 내지른 채로.
검은 다음 강도의 목에 박혔다.
"컥!"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계속 움직였다.
내 검을 막는 강도는 없었다. 피할 수 있는 강도도 없었다.
마나를 쓰지는 않았지만, 나는 강했다.
내 육체는 인간의 한계에 근접해 있었고, 내 검술은 기사와 대련을 했을 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호흡을 한 번도 하지 않고, 나는 달려드는 모든 강도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두목이라는 자는 그래도 내 검을 막아내는 시늉을 했지만, 막아낸 검을 타고 들어가는 검날에 목이 잘려 나가고 말았다.
용병 일을 오래 했었다는 강도는 내가 강도 하나를 베어내는 순간 바로 도망치기 시작했었다.
역시, 관록은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도 우리 쪽 용병 마틴이 쏜 쇠뇌에 맞아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우리 쪽 용병이 더 짬밥이 높았던 것 같았다.
여자와 아이들을 지키고 있던 강도들도 도망치다가 내 검과 마틴의 화살에 죽었다.
우리가 포로를 신경 쓰지 않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실력 있는 용병들이 포로 때문에 일을 그르칠 리가 없었다.
강도들이 쓰러진 뒤, 요하힘도 파울라도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달라진 느낌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도들과의 싸움이었지만, 마나 없이 싸우는데 이렇게 쉬울지는 예상도 못 했다.
마나를 끌어올리지 않아도 감각은 유지되었고, 상대의 움직임은 보지 않아도 전부 알 수 있었다.
검술로 단련된 육체도 전과 달라져 있었다.
억지로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상황에 맞춰서 그레시아의 검술과 세우타 공작의 검술, 그리고, 피센 후작과 다른 곳에서 보았던 검술들이 적재적소에 튀어나왔다.
확실히 카를로스에게서 상속받은 심법과 검술들은 모두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거기다, 검술들은 모두 마나 없이도 충분히 강했다.
'마나에 종속된 검술들이 아니었던 것일까?'
단지 용사 카를로스의 능력을 복원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길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은 가물거리는 느낌일 뿐이었고, 고민할 문제가 더 늘어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고민은 내게는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싸움이 있고 나서, 파울라가 나를 대하는 모습이 전과 달라졌다.
요하힘도 마나 없이 싸우는 내 모습에 놀라기는 했지만, 대련과 후작가의 싸움으로 충분히 내 실력을 봐왔기에 놀라는 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지만, 파울라는 내 실력을 처음 본 것이었다.
말로 들은 것과 직접 본 것은 달랐다.
요하힘을 이겼다는 말을 들었지만, 여태껏 실감이 안 갔던 모양이었다.
파울라는 전보다 내게 친절하게 대하고, 나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묻기도 했다.
"꿩 대신 닭에서 꿩 대신 칠면조인가."
혹시나 쓸만할지 모르는 짐 덩어리에서 이제는 이바나의 대체재 정도는 된 것 같았다.
우리가 구한 여자와 아이들은 다음 마을까지만 같이 데려다주었다.
그 자리에 버려두는 것은 다른 강도에게 당하라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으니,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다만, 그들이 마을에서 살아갈 방법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뒷일까지 도와줄 수도 없었기에 우리는 그들을 외면하고 계속 움직였다.
그 뒤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두 번 더 강도를 만났다.
그 강도들도 내가 나서서 쓰러뜨렸다.
요하힘도 마나를 숨기고 싸움에 끼어들었지만, 요하힘은 각성 때부터 마나를 쓰던 귀족이었다.
마나 없이 싸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요하힘은 강도 두 명과 한참을 싸우더니 겨우 이길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길을 걸어서 우리는 겨우 이바나가 살았었다는 모레나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영지 경계를 넘는 순간, 나는 메시지창을 보게 되었다.
<모레나 영지에 도착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