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제11편 도주 (2)
버려진 갱도는 횃불 하나로 밝히기는 너무 어두웠다.
더구나 사람들의 표정도 어두우니, 분위기는 더 안 좋았다.
용병은 힘들어서였고, 요하힘은 누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요하힘의 정체보다 조직이라는 자들 때문에, 표정이 좋지 못했다.
요하힘의 형인 비드가 조직원이라면, 공국에서 벌어진 일도 제국에서 벌인 일이 아니라, 그 조직이라는 곳이 일을 벌인 게 되었다.
거기다, 목걸이로 자폭을 하는 곳이라면 죽었던 시간대에서 아카데미 입학식장을 날려버린 미리사와 피아르의 스승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형수의 가문인 후작가에서 일을 벌였던 자들도 제국에서 왔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 조직이라는 곳은 적어도 세 번 이상 나와 싸웠던 곳이었다.
같은 조직과 세 번 이상 싸웠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조직이란 곳의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국에서 벌인 일이 제국이 아니라 그 조직이고, 이번 일도 그 조직이라는 곳의 짓이라면, 조직의 힘과 권세가 얼마나 큰 것일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조직은 공국에 특사를 보내고, 카를로스 왕국에 보내는 사절을 조직의 인원으로 채울 힘을 가진 곳이었다.
조직이라는 곳은 제국의 한 부분이거나, 제국 그 자체일 수도 있었다.
"파울라가 보냈다면 자네도 조직원이겠지?"
"네. 원래 말단 조직원이었습니다. 왕국에 있던 조직이 철수한 뒤에도 남아서 용병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연락이 닿아서 이번에 오신 분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하기야, 제국을 움직이는 곳이 귀족만 쓸 리가 없었다.
공국에서도 용병들을 이용했고, 후작가에서는 용병들만 움직였었다.
용병으로 벌어진 사고라.
발레아 영지의 일이 떠올랐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자그마한 남작 영지였다.
조직이 관여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생각이 이어질수록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답이 없는 곳과 관련된 모양이었다.
이번에 죽지 않고 정보를 얻으려고 했지만, 처음부터 이런 정보를 얻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뭔가, 다음 삶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였지, 이런 무시무시한 정보를 원한 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모두 같은 조직이라면 지금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요하힘은 의아해했지만, 자살 폭탄이 터진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 입학식장을 날려버렸던 놈들이었다.
수도 주택가를 날려버리는 정도야 쉽게 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
사람을 납치하는 것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목걸이 같은 특이한 물건도 열심히 만드는 자들이니, 이바나의 특이한 능력을 보고 납치할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다.
다만 의아한 것은, 납치 대신 자폭한 점이었다.
납치에 실패했거나 문제가 있으면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자폭해버리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의아한 것은 왕실 기사단이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겨우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아카데미 여학생 하나와 몇 사람이 휘말려 죽은 정도의 일이었다.
수도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였지만, 이렇게 왕실 기사단 수십 명이 나설 것은 아니었다.
'공주나 대공녀를 처리할 생각으로 과하게 움직임인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확정을 짓기에는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았으니, 이제 연기를 할 때였다.
"다시 출발하죠. 추격대에게 잡히지 않으려면 열심히 움직여야 해요."
용병이 일어나 다시 길을 안내했다. 앉아서 이야기하는 동안, 요하힘이 우리 쪽 상황도 용병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용병이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일이 꼬여서 고국을 등지게 된 공작 서자를 보는 그런 눈이었다.
나도 그런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나는 우울하고 침울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조직을 떠올리니, 쉽게 우울한 얼굴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조용하고 우울한 걸음을 이어가니, 어느덧 막다른 곳에 도착했다.
벽 앞에 서서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갱도의 천장이 철판으로 되어 있었다. 거기다, 철판 뒤쪽은 비어있는 게 느껴졌다.
용병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천정을 두드렸다.
캉, 카앙, 카앙, 캉, 캉.
일정한 박자로 두들기는 소리가 어두운 갱도로 퍼져나갔다.
끼이익.
잠시 뒤,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철판으로 된 천장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강한 빛은 아니었지만, 빛도 보였다.
"오랜만에 손님이네."
"손님은 무슨, 나야."
"마틴, 너였냐."
출구를 지키는 사람도 용병과 아는 사람이었다.
그보다, 이제야 용병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진짜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를 이름이 생겼다.
천장 위로 올라가니, 그곳은 지하실이었다.
무두질한 가죽과 함정 도구들이 쌓여있는 작고 낡은 지하실.
이곳은 사냥꾼 집의 지하실이었다.
우리를 맞이한 사람도 영락없이 사냥꾼처럼 보였다.
용병이 사냥꾼과 알고 있었던 덕분에 우리는 바로 지하실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예상대로 이곳은 숲 안에 있는 사냥꾼의 집이었다.
창밖을 보자, 나무들 너머로 멀리 외성벽이 보였다.
이곳은 도시 밖에 있는 숲이었다.
용병 마틴은 갱도 입구의 병사 때처럼 사냥꾼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고 보니, 이 사람도 제대로 된 사냥꾼이 아니었고, 갱도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도 영지병이 아니었다.
"다들 용병입니다. 광산 쪽 큰 손들의 일을 돕는 용병들이죠."
사냥꾼 집을 나서며 묻자, 용병이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지나온 광산 갱도를 이용한 비밀 통로도 원래 광부들이 찾은 것이었다.
그들은 도시 밖으로 이어진 갱도를 영주에게 알리지 않고, 뒷주머니로 활용하기로 했다.
폐광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을 그들이 고를 수 있게 하고, 병사 몇 명을 용병으로 대체하는 것은 광산 토박이들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그들이 직접 하지 않고, 용병들을 세운 것은 만약을 대비한 것이었다.
언젠가 이 일이 들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병이 지켜도 신전 계약이 있으니, 비밀은 어느 정도 보장되니까요. 실수로 걸리더라도 용병들만 잡히고 끝나는 거죠."
마틴도 입구를 지키고 있을 때 신전에서 계약했었던 모양이었다.
"저는 조금 꼼수를 써서 계약을 벗어났습니다."
마틴이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성벽을 뒤로 한 채로 숲을 걷기 시작하자, 내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용병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원래는 요하힘에게 상황을 듣고 난 뒤에 헤어질 생각이었다.
혼자 움직이는 게 훨씬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정체를 듣고 난 뒤에는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조직이란 곳과 접점을 만들었는데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용병 마틴을 고문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봐도 아는 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아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문제가 생겼을 때 합류하기로 한 안가가 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면 그곳으로 올 겁니다. 그곳에서 기다리다가 제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제국으로 같이 가시죠. 사과 대신에 제가 최대한 돕겠습니다."
요하힘이 나를 보며 다짐하듯이 말했다.
역시 사람이 나쁘지는 않았다. 제국 위주라는 단점이 좀 있지만, 괜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미 관계가 꼬여버린 뒤였다.
시간을 되돌려도, 요하힘과는 이미 늦어버렸다.
나는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고민해보겠습니다."
당연히 부정적인 결론이 나오겠지만, 결론이 나올 때까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숲에서 벗어나자, 넓게 펼쳐진 곡창지대가 보였다.
이 영지도 다른 영지에 비하면 넓지 않지만, 곡창지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숲과 가까운 민가에 숨어들었다.
집주인이 들에 나가 있는 틈을 타서, 주인의 옷을 훔쳐 그 옷으로 갈아입었다.
요하힘은 아카데미 정복을 버려야 하는 것을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제국까지 도망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남이 보는 것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혼자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있던 옷은 유물 주머니에 넣고, 주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은 조금 컸다.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한 모양이었다.
반지를 끼고, 목걸이를 확인하고, 단도와 장검을 허리에 찼다.
유물 주머니를 들키지 않으려면 대검은 아직 꺼낼 수 없었다.
농가에 숨어 있는 동안, 멀리, 대로를 달리는 기사들이 보였다.
추격대였다.
다행히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옷을 다 갈아입은 뒤, 우리는 집을 나섰다.
허름한 옷을 입고 낡은 모자로 얼굴을 감추자, 귀족이 아니라 농사꾼처럼 보였다.
우리는 농사꾼처럼 천천히 길을 걸었다.
걸음이 너무 늦는 것 같아, 조금 조바심이 났다.
어머니가 이 일을 아시기 전에 결론을 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도 이 세계가 유지된다면 어차피 아시게 되겠지만, 그래도 내가 죽기 전에 아시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죽은 뒤에 이 세계가 어떻게 될지는 나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곡창지대를 지나자, 우리는 다시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용병 때문에 속도를 많이 올릴 수 없었다.
농사꾼 옷을 입고 있었으니, 말을 탈 수도 없고, 우리는 열심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걸어서 우리는 안가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작 영지와 그 옆 영지 사이에 있는 마을의 작은 여관이었다.
손님도 없고 파리만 날리는 곳에 덩치 큰 주인만 앉아 있었다.
졸고 있던 그는 용병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바로 일어나 입구를 닫아걸었다.
그 뒤에 그는 주방 안으로 걸어가 안쪽 벽을 두드렸다.
벽이라고 생각되던 곳이 살짝 열렸다.
"찾던 손님이 왔군."
묵직한 여관 주인의 말이 들리고, 벽이 활짝 열렸다.
그 안에서 아는 사람이 나왔다. 파울라였다.
"요하힘? 괜찮아……. 어? 알렉스 공자?"
그녀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반쯤 겁을 먹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여관 주인이 나를 노려보며, 몸에 힘을 주었다.
덩치를 보고 평범한 여관 주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실력 있는 용병인 모양이었다.
나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계속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나는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내 말에 파울라는 요하힘을 노려봤다.
"왜 같이 온 거죠?"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저런 성격이 아닌 줄 알았는데…….
스파이라더니, 본성은 전혀 다른 여자였다.
요하힘과 용병이 열심히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다 듣고 난 뒤에 파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같이 가는 수밖에"
그녀도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꿩 대신 닭을 데리고 가자'라는 느낌이랄까.
"그보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납치도 이해가 안 가지만, 왜 자폭이 돼버린 겁니까?"
요하힘의 물음에 파울라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납치는 제가 보고한 거예요. 특이한 능력이라 제가 위에 보고를 올렸더니, 납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그녀는 슬쩍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옷자락 끝이 타버린 게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그녀도 그 현장에 있었을 터였다.
그곳에서 빠져나와 이곳까지 우리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니, 그녀의 능력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왜 거기서 자살하면서까지 그녀를 죽였는지는 저도 몰라요. 여기서 할 말도 아니고요."
말을 하면서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파울라는 요하힘과 달리 사리 분별을 잘했다.
정보를 얻어내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보다 빨리 움직여야 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국경을 넘기가 어려울 거예요."
그녀는 우리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벽에 커다란 왕국 지도가 걸려있었다.
"대로로 공국을 지나 제국으로 가는 것은 무리예요. 좀 돌아서 가야 할 것 같아요. 물아센 영지나, 모레나 영지 쪽으로 돌아서 가야 할 것 같은데 어디가 좋을 것 같아요?"
그녀가 가리키는 영지들을 보고, 한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모레나 영지가 이바나 영애가 살던 곳이 아니었나요?"
"아,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을 알아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어느 지역에서 온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차피 가야 한다면 모레나 영지 쪽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녀의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내 말에 파울라는 눈을 반짝였다.
예상대로 그녀는 내가 꺼낸 말에 관심을 보였다.
신기한 능력을 보고했다고 했으니, 그 유래도 알고 싶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것이 궁금했다.
왜 왕실 기사단이 움직였는지, 그것을 알고 싶었다.
지금 수도로 가서 물어볼 수 없으니, 그녀의 양아버지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