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제10편 도주 (1)
혼란한 틈을 타서 저택을 탈출했기는 했지만, 아직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외성으로 둘러싸인 광산 도시를 벗어나기 전에는 안심하기는 어려웠다.
나와 요하힘은 저택에서 벗어나 고급 주택가를 달렸다. 금방 추적이 시작될 터였다. 쉴 시간이 없었다.
나는 달려가면서 요하힘에게 물었다. 이제야 겨우 질문할 시간이 난 것이었다.
"갑자기 체포라니,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함께 달리고 있던 요하힘이 내 말에 대답했다.
"저들은 이번에 저와 함께 제국에서 파견된 분들이 사람을 죽였답니다."
그의 얼굴에 여러 가지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파견된 사람들? 같이 온 제국 관료들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갑자기 살인이라니.
"살인이요? 누굴?"
"여러 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능력으로 자폭을 했다던데, 그런 능력이 있을 수 있는지……. 더구나 그분들 중에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던 분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런 능력, 아니 물건을 알고 있었다.
나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가슴을 더듬자 목걸이가 손에 걸렸다.
'설마, 오해가 아니었나?'
어쨌거나 자폭을 한 거라면, 그건 폭탄 테러라고 불러야 했다.
"살인이라고 하셨잖아요."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일을 벌인 거랍니다. 죽이고자 했던 사람은 이바나 영애라고 했습니다. 영애는 죽고 용병이 살아남아서 증언했다고……."
다행히 공주와 대공녀가 같이 있어서였는지, 사정을 다 알려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바나라면 얼마 전 나를 찾아왔던 특수한 능력자일 텐데.
분명, 후작가 아들에게 능력을 부여했던 신입생 이름이 이바나였다.
그녀가 살해당했다고? 자폭 능력에 당해서?
이유를 들었지만, 더 이해가 안 갔다.
차라리 능력이 신기해서 납치하려던 것이었으면 이해가 됐을지도 몰랐다.
역시, 도망치기를 잘한 것 같았다.
그대로 잡혔다가는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감옥에 갇혀 시간만 보냈을 게 뻔했다.
하지만, 듣고 보니, 조금 이상했다.
그런 사정이면, 공주도 대공녀도 그렇게 막아서려고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 의문을 이야기하니, 요하힘이 그때 상황을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아이샤 공주와 대공녀가 막아서자 한마디씩 겨우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공주와 대공녀가 있어서 친절하게 상황을 알려준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강제로 이유를 알아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분위기가 안 좋아진 게 당연했다.
하나씩 이야기를 꺼내니 믿기도 어려울 거고, 뒤에 이어진 상황을 보니, 선임 기사가 고의로 그렇게 한 것 같았다.
그에게 칼이나 한 방 먹일 걸 그랬나.
하지만, 괜히 왕실 선임 기사가 아니었다. 한 수에 끝낼 수 있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에게 싸움을 걸었다면 이렇게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달리면서 좀 더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지만, 요하힘이 알고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이렇게 달아나도."
"아까 보았잖습니까. 왕실 기사단이 기회를 틈타서 공주와 대공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체포되었다가는 재판을 받기도 전에 죽을 겁니다."
제국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요하힘은 체포되었다는 것도 밝히지 않고 죽일 가능성이 컸다.
내 말에 요하힘도 수긍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저야 제국으로 탈출하면 그만이지만, 공자는 이 왕국이 고국이잖습니까."
아마,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그때 화살을 날리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솔직히 이 왕국에 대한 소속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가는 것도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한가지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할 수 있어도, 집에 계신 어머니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제국으로 같이 가시죠. 제가 신변은 보장하겠습니다. 알렉스 공자의 실력이라면 제국에서도 분명 환영할 겁니다."
그런 이유로, 이어진 요하힘의 권유는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어머니를 제국으로 모실 수도 없는데, 나 혼자 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지금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아직 이 도시를 빠져나간 것도 아닙니다. 거기다, 왕국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더욱 알 수 없고요."
거기다, 같이 도망치고 있는 나는 죽을 자리를 찾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요하힘이 제국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우선 첫 번째 난관은 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외성이 높아서 들키지 않고 성벽을 넘기는 어려워 보였다.
성문을 뚫고 가는 방법도 있지만, 추격대가 바로 따라붙을 게 분명했다.
추격대가 뒤에 붙으면 정보를 얻기는커녕 이번 삶은 도망치다가 끝날 터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달리면서 계속 방법을 찾았다.
그때, 골목을 달리는 우리 앞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멈춰요!"
가죽 갑옷을 입은 초췌한 남자였다.
용병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요하힘이 검을 휘둘렀다.
"아악!"
놀라서 나도 검을 휘둘렀다.
캉!
겨우 막을 수 있었다.
내가 막지 않았으면 용병은 반으로 갈라졌을 게 분명했다.
"잠깐만요, 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코앞까지 검이 다가와 있는 것을 본 용병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아……. 죽을 뻔했다."
"누구시죠?"
내 물음에 그는 정신을 차리고, 요하힘에게 말했다.
"파울라님이 보내셨습니다. 열심히 달려왔지만, 제가 조금 늦어버렸습니다."
파울라라는 말에 요하힘은 반색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용병의 말에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미리 알고 보냈다는 건가?"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알고 보냈다는 것은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말이었다.
그의 말에 용병은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말을 해도 된다. 그는 나를 구하기 위해 왕실 기사들을 베었다. 그는 내 동료다."
요하힘의 말대로 지.금.은 동료가 맞았다.
요하힘의 말에 수긍했는지, 용병이 빠르게 대답했다.
"저에게 편지를 주셨습니다. 저도 이런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최악의 경우, 수도로 돌아오지 않고 제국으로 가는 것을 도와주라는 말을 듣기는 했습니다."
지금이 최악의 상황인 건가.
하지만, 그보다 편지에 적힌 내용이 궁금했다.
"우선, 제가 모시겠습니다."
용병이 바로 일어나서 우리를 안내했다.
"용병들만 아는 뒷길이 있습니다. 돈이 좀 들지만, 들키지 않고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을 찾지 못했던 우리는 용병의 뒤를 따랐다.
용병은 남쪽 성문으로 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도시 한쪽을 에워싼 산 쪽으로 움직였다.
"설마 산 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나?"
요하힘의 말에 건물 너머로 삐쭉 솟아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바위들이 수직으로 치솟아 있는 험준한 바위산이었다.
그쪽으로는 성벽을 만들지 않은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 바위산으로 탈출하는 것은 성벽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훨씬 힘들어 보였다.
요하힘의 물음에 용병은 고개를 저었다.
"산을 넘지 않고도 나갈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 있는 말에 우리는 용병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용병은 고급 주택가를 벗어나, 산에 붙어 있는 광산 지역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광산 지역은 황량했다. 아직 채광 중이라고 들었는데, 벌써 다 캐낸 건가?
"산 안쪽은 아직 채광하는 곳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는 도시와 가까워 남은 광맥을 건들기가 위험해 이렇게 방치된 것이죠."
우리를 안내하는 용병은 생각보다 이곳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나는 안내하는 용병에 대해서도 궁금해졌지만, 아직 질문할 때는 아니었다.
버려진 광산 갱도 앞을 병사 두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함부로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모양이었다.
용병이 병사에게 다가갔다.
병사에게 우리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용병이 저렇게 자신 있게 가니, 우선 지켜보기로 했다.
"웬일이야? 여길 다 오고."
병사의 말에 용병은 우리를 가리켰다.
"용병이 하는 일이 뻔하지, 호위야."
우리를 보고 병사들이 피식 웃었다.
"조금 전에 저택 쪽이 시끄럽더라고. 호위가 아니라 운반인 것 같은데."
"그거나, 이거나."
"알았어. 우리야 돈이나 잘 내면 그만이니까."
"비밀이나 잘 지켜줘."
"걱정하지 마. 수십 년을 지켜온 돈벌이인데 그걸 깨 먹을 리가 없지."
용병과 병사는 십년지기 친구 같았다.
말을 하는 사이에 용병의 손에 있던 주머니가 병사에게로 건네졌다.
슬쩍 주머니 안을 살핀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은 알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잊어버렸을라고."
"그래, 또 보자고."
"안 보는 게 좋아."
"그건 그렇지."
병사에게 손을 흔들고, 용병은 갱도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그의 뒤를 따랐다.
동굴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입구 근처에 굴러다니던 횃대에 불을 붙여 주변을 밝혔다.
마나를 쓸 수 있는 귀족들은 이 정도 어두움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마나를 쓰지 못하는 그에게는 횃불은 필수였다.
용병은 계속 걸어갔다.
갈림길이 나와도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고, 막힌 곳처럼 보이는 곳도 그가 움직이니 길이 나타났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용병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휴. 좀 쉬죠. 두 분은 괜찮겠지만, 저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하기야, 마나가 없는 보통 사람은 체력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
그의 말에 우리도 자리에 앉았다.
용병은 품에서 편지를 꺼내서 요하힘에게 건네주었다.
"늦었지만, 파울라 영애가 주신 편지입니다."
요하힘은 편지를 받아, 내용을 읽었다.
버려진 갱도 속에서 횃불을 배경으로 편지를 읽는 요하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체포당할 만했군요."
편지를 읽은 뒤, 요하힘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실 기사단의 이야기가 사실이었습니까?"
내 말에 요하힘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에는 단지, 이바나 영애를 납치하겠다고 적혀 있습니다. 사람들을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저와 같이 온 관료들이 이바나 영애를 납치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이면 다른 것도 다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사람을 폭파하는 능력도 처음 들었고, 왜, 사람을 죽이는 쪽으로 진행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실 기사단이 오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혼자 결론을 내린 요하힘은 바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알렉스 공자님이 피해를 보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도망자가 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공주를 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원인을 파고들면, 요하힘의 책임도 있지만, 말을 들어보니, 그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믿겠지만, 저는 정말 유학생으로 왕국에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조직의 사람들이죠."
"조직이라고요?"
내 물음에 용병이 헛기침했다.
저 용병도 조직이라는 곳과 관계된 자였던 모양이었다.
"저도 따지고 보면 아무 관계가 아닌 것은 아니니까요. 저희 형이 그 조직원이라……."
요하힘의 말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요하힘과 얼굴이 닮은 사람.
나는 요하힘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의 이름이……."
전과 달리 그는 형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버나드입니다."
같지는 않지만 비슷했다.
"버나드라, 그럼 애칭은 비드입니까?"
"애칭은 아니지만, 밖에 돌아다닐 때는 그 이름을 많이 쓰는 모양이에요."
얼굴이 닮은 이유가 있었다.
요하힘은 나에게 죽은 비드의 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