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제6편 납치가 목적이긴 합니다만 (1)
대련이 끝나고, 소란이 일어났다.
너무 정신없이 싸웠고, 너무 많은 사람이 보았다.
다행히 다른 능력들을 들키지는 않았고, 기사단장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사단장과 대등하게 싸운 것을 많은 사람이 봤다는 게 문제였다.
같이 다니던 발레아와 공주도 놀랄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은 오죽했을까.
요하힘은 자기와 대련했을 때는 계속 봐준 거냐고 시비를 걸었다.
봐준 게 맞긴 했다.
남들보다 몇 배나 긴 2학기 동안, 정신세계에서 용사와 계속 싸웠는데, 실력 차가 벌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검술 상성을 이유로 대고, 신검의 능력이 봉인되어 제 실력이 안 나왔다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발레아에게는 쥐꼬리만큼도 먹히지 않는 핑계였지만, 놀란 조원들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쪽은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당장 저녁 만찬의 주인공이 달라졌다.
물론, 상석은 공주와 대공녀가 차지했지만, 사람들의 이목이 모이는 곳은 지체 높은 두 공주가 아니라 나였다.
후작이 나를 보는 눈도 달라져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설마, 기사단장에게서 내 이야기를 들은 걸까. 내가 그를 이길 수 있었다는 걸 들었다면, 저런 눈빛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평범한 기사가 아니라, 각성한 귀족이었다. 서자라는 위치가 문제이긴 했지만, 아래에 놓고 쓰려면 이리저리 걸리는 게 없어서 더 좋을지도 모르는 위치였다.
내 나이 16살.
지금 후작가의 최고수와 적어도 동수를 이루었으니, 얼마나 더 성장하게 될지, 짐작도 되지 않을 거다.
무척이나 탐이 날 수밖에 없었다.
신나게 싸운 덕분에 검술이나 심법은 꽤 얻어냈지만, 이제부터는 벌여놓은 일을 수습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후작의 두 딸의 눈이 낮과는 조금 다르게 빛나는 것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 * *
만찬이 진행되던 밤.
왕국 수도의 거리는 과거와 달리 어둠이 내리자 빠르게 한산해졌다.
나빠진 왕국 상황이 밤이 되자 슬슬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평일이었지만, 파울라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수도의 거리에 나와 있었다.
따로 외출증을 끊은 것도 아니었고, 들킨다면 주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파울라는 개의치 않았다.
오늘 할 일에 비하면 주의를 받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이 지나면 그런 것들은 그녀에게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대로변도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이 적은 뒷골목 어둠 속에 숨어있었다.
그녀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그녀와 같이 망토를 두른 남자가 있었다.
그는 파울라와 같이 이 왕국으로 파견을 온 제국의 관료였다. 그리고, 조직의 정보원이기도 했다.
남자의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파울라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설마, 이대로 진행하는 건가요?"
"어쩔 수 없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으니 따르는 수밖에."
정보원이자 조직 선배의 말에 파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요하힘도 없고, 저희는 정보원이라 무력도 부족한데요."
왕립 아카데미 학생 한 명을 납치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기사 학부도 아니었고, 공격적인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상당한 실력을 가진 후작 아들도 집에 내려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가장 납치하기 좋은 때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불안했다.
후작 아들도 없지만, 요하힘도 옆에 없었다. 거기다, 다른 지원도 없이 정보원들만으로 일을 진행하라니.
그녀가 보고를 올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진행할 줄은 몰랐다.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서 준비할 줄 알았는데, 며칠 만에 바로 진행하라는 대답이 올 줄이야.
그만큼 위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이고, 이 일을 보고한 그녀의 입지도 훨씬 좋아질 거라는 게 자명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자신까지 이렇게 납치 현장에 나올 줄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이제 겨우 수습 정보원, 나름 공격형 능력을 갖추고 있다지만, 겨우 제 목숨 하나 지킬 정도였다.
훈련은 많이 했지만, 이런 실전 상황은 처음이었다.
요하힘이라도 있으면 걱정을 덜었을 텐데.
선배가 파울라의 불안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파울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파울라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싸우는데 기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야. 물론, 기사가 있으면 좋겠지, 전열을 지켜주는 기사가 있으면 싸우기가 훨씬 편해지는 게 당연하니까."
파울라는 선배가 내뿜는 박력에 눌려 그의 말을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항상 앞을 지켜줄 기사와 다닐 수는 없는 법이다. 너도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으니 알 테지. 상속능력 학부가 기사 학부 위에 있는 것을."
어두운 골목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다른 능력들을 가진 귀족들이 기사 없이 싸우지도 못한다면 누가 그 능력들을 인정할까."
파울라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동의했지만, 처음 느낀 현장의 긴장감은 그런 상식을 넘어섰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사 없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야."
다행히, 말속에 느껴지는 선배의 자신감은 파울라가 더 이상 무섭게 느끼지 않게 해주었다.
"네 손을 빌리고자 널 이 자리에 부른 게 아니야. 네 보고를 칭찬하는 의미로 제일 가까운 곳에서 실전을 구경시켜주기 위해 이곳으로 오게 한 거다."
알겠냐는 물음에 파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랫동안 현장에서 일했던 선배들이었다.
제국과 다른 나라들에서, 정보를 얻는 것 이상의 일들을 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제대로 된 무력을 갖추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제국에서 이번에 파견된 관료들은 전부 각성한 귀족들이었다.
제국 행정부에서 보낸 것이었으면 카를로스 왕국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귀족으로 채운 것일 테지만, 조직은 그렇게 겉치레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파울라의 불안이 가라앉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로 쪽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대로 쪽에 배치된 다른 정보원이 연락을 준 것이었다.
이 납치 작전에는 이번에 파견된 모든 관료가 다 참가하고 있었다.
조직의 윗분들은 들켜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납치 작전을 진행했다.
운이 좋으면 모르겠지만, 파울라도 납치가 끝난 뒤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요하힘에게도 연락을 보냈다는데, 늦지 않을까 모르겠네.'
그는 조직과 관련이 거의 없는 순진한 귀족 소년이었다.
그래서 연락이 늦어진 것이었고, 이번 일에도 배제된 것이다.
얼마 전 실종된 형 때문에 더 정보를 숨긴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연락이 늦으면 자신들이 벌인 일을 그가 뒤집어쓸지도 몰랐다.
그는 관련이 없지만, 누가 그렇게 생각할지.
'지부가 다 부서져서일까. 이 왕국에서 벌이는 일은 점점 더 과격해지는 것 같네.'
그만큼 이 일이 중요하거나, 아니면, 제국과 왕국과의 관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벌어질지도.
잠깐 머릿속에 여러 가지 것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파울라는 다시 작전에 집중했다.
이제 곧, 이 골목으로 목표가 들어올 것이었다.
이바나.
파울라의 노력과 망가진 조직의 능력으로는 그녀가 은퇴한 왕실 기사의 양녀라는 정도밖에는 알아내지 못했다.
왕실 기사의 양녀라도, 이바나의 신기한 능력이라면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온 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능력이 신기한 이상으로 이바나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 어려웠다.
양녀가 되기 전의 신분은 어떻게 되는지, 어떤 가문의 능력이 그녀에게 상속이 되었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런 능력자라면 숨겨진 후원자가 있겠지. 대충 집안 사정이라던가, 가족 문제가 얽혀 있을 테고."
뜬금없이 등장한 능력자는 제국에서도 흔한 이야기였다.
다만, 이 경우는 그 뿌리가 어디인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일 뿐이었다.
"제가 처음 보고하긴 했지만, 정말 시간에 관계된 능력이 맞을까요?"
"글쎄, 정확하게 어떤 능력을 찾으라는 말이 없었으니, 위에서 파악한 것으로 움직이는 수밖에."
"설마, 예언자와 관련된……."
"그만."
그들은 예언자가 이 왕국에만 미래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조직에서는 예언자가 능력 일부를 잃었다는 것을 비밀로 했다.
이 왕국에서만 조직에서 하는 일이 계속 실패하는 것으로 뭔가 이상하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예언자의 권위는 그 정도로 깨질 만큼 작지 않았다.
조직원들이 희생하는 것도, 이렇게 최선을 다해 움직이는 것도 예언자가 알려 준 미래를 막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왔다."
두 사람이 지켜보는 골목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가 두 개, 두 사람이었다.
이 뒷골목은 수도에서 유명한 여관과 이어지는 길이었다.
입학하기 전, 이바나가 수도에 왔을 때 투숙했던 여관이었고, 갑자기 수도에 올라온 이바나의 양아버지가 머무는 곳이었다.
물론, 이바나의 양아버지는 여관에 없었고, 수도에 올라오지도 않았다.
파울라와 정보원들이 아카데미에 거짓 연락을 보낸 것이었다.
아카데미 면회실을 이용하지 않고, 대리인을 보내서 학생을 밖으로 부르는 귀족적인 방법이었지만, 납치를 위해 제삼자가 써먹기도 충분히 좋은 방법이었다.
그림자에 이어 두 사람이 골목에 들어왔다.
파울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작은 사람과 큰 사람.
작은 쪽은 이바나이고, 큰 쪽은 가죽 갑옷을 입었으니, 용병일 터였다.
확실히 수도라도 요즘은 밤에 혼자 다니기 위험했다.
각성했다고 하지만, 육체 능력도 아니고, 저 정도 호위는 충분히 예상했었다.
"제 차례겠네요."
"네가 안 나서도 돼."
아까 말한 대로 뒤로 빼줄 생각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파울라는 몸을 뺄 생각이 없었다.
"제가 움직이면 더 쉽잖아요."
이미 첫 작전의 두려움은 사라져버렸다. 최선을 다해 작전을 성공시켜서 보란 듯이 제국으로 귀환할 생각이었다.
파울라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골목 안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에 이바나와 용병은 움찔 놀랐다.
"어라? 이바나?"
파울라는 이바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긴 웬일이야? 이쪽이라면……. 아! 너도 누가 온 거야?"
파울라는 반가운 얼굴로 이바나에게 다가갔다.
그때 이바나의 입이 열렸다.
"움직이지 마세요."
"응?"
"다가오지 마시라고요."
이바나의 말에 그녀 옆에 있던 용병이 검을 꺼냈다.
스르릉.
무척이나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파울라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바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을 피해 다니다가, 능력 말고도 다른 능력을 키우게 되었어요."
파울라는 난감했다.
'설마 들킨 건가?'
"위기를 남들보다 잘 느끼고, 제게 다가오는 사람이 진심인지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게 되었어요. 위기감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도 잘 파악할 수 있어요."
이바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파울라를 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알겠네요. 당신은 내 적이군요."
파울라는 혀를 찼다.
아무래도 시작하기도 전에 들킨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