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제5편 유물 조사 (2)
저택의 옆에 자리하고 있는 기사들의 연무장도 돈을 많이 들였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작은 숲이 연무장 주위를 감싸고 있어, 외부에서 연무장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무장 한쪽에 있는 거치대에 세워져 있는 무기들도 방금 만들어진 것처럼 빛을 받아서 반짝였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깔끔하게 정돈된 연무장에는 기사나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만이 연무장 중앙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판금 갑옷을 입은 중년 기사였다.
후작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풍겨오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후작이 장사꾼처럼 보인다면,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기사 같았다.
누구인지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후작의 동생이자, 후작가의 기사단장인 세르히오 경이었다.
기사단장이 들고 있는 저 검이 '피센의 신검'일 터였다.
대표로 대공녀가 인사를 했다.
"프리다입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르히오입니다."
대공녀의 인사에 기사단장이 기사의 예법으로 답례했다. 그리고, 그는 대공녀의 감사를 받지 않았다.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귀족이 약속했으면 지키는 게 당연합니다. 더구나 결투의 약속이었습니다. 잘못한 당사자야 책임을 지면 그만일 터이니."
아무래도 결투에서 져버린 당사자는 생각보다 많은 책임을 져야 할 모양이었다.
평범한 기사단장이라면 모를까. 후작의 동생, 작은아버지가 저렇게 말하고 있었다.
후작에게 혼나는 것보다, 눈앞의 기사에게 더 심하게 혼날 것 같았다.
"그래도 직접 나서주실 줄 몰랐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대공녀의 말에 기사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 다루기 어려운 놈입니다. 제대로 된 성능을 보여주려면 제가 보여주는 게 맞지요. 그런데 상대할 만한 실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말을 하면서 그는 우리를 살펴보았다.
검을 든 공주를 보고 조금 감탄했고, 요하힘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지막으로 나를 보고 기사단장이 말을 이었다.
"사람이 있었군요. 설마, 가엘이 저 친구에게 덤빈 겁니까?"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기사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엘이 미쳤군요. 책임지는 정도로 끝내서는 안 될 것 같군요. 사람 보는 눈을 그렇게 키우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정신머리부터 뜯어고쳐야……."
시간이 지날수록, 후작 아들의 벌이 늘어나고 있었다. 잘못하면 아카데미에 돌아오지 못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대충 이야기가 끝난 것 같았다.
다음은 대련일 테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시겠지만, 이 검은 신검이라고 불리지만, 진짜 신검은 아닙니다. 신검은 용사님들 중에서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성기사님이 쓰시던 검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그 검은 소실되어 지금,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바로 대련하고 싶었지만, 기사단장은 검의 유래를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이곳에 온 이유가 유물 조사였으니,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검을 처음 찾았을 때는 그 신검이 아니냐고 소란이 일어난 적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신검은 아니었습니다."
신검이라고 오해할 만은 했다. 신검과 비슷한 능력을 갖췄으니.
"신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훌륭한 검입니다. 신검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것을 빼고도요."
그 비슷한 능력 때문에 오해를 받았지만, 신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뒤로는 오해하는 사람도 없었고, 나도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머릿속에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단검이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신검은 아닌데, 뭔가……. 신검하고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아예 관련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다른 사람들이 비슷하다고 오해해도, 네가 오해하면 안 되잖아.
[확실히 뭔가 연관된 점이 있습니다. 제 몸을 걸고 맹세합니다.]
단검은 이상한 맹세까지 했다.
자신의 몸을 걸어서 어쩔 건데, 어차피 내 물건인데.
이상한 맹세는 둘째치고, 단검의 말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용사의 유물도 아니고, 연관이 있는 검이라니.
이걸 어떻게 하지?
그때 대공녀가 입을 열었다.
"그 검을 제가 한번 살펴봐도 될까요?"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
단검 때도 검을 쥐었을 때 알 수 있었다.
"살펴보시는 거야 괜찮습니다."
기사단장은 흔쾌히 검을 대공녀에게 건네주었다.
대공녀가 검을 확인한 뒤에 내가 검을 받아서 기사단장에게 돌려주었다.
돌려주기 전, 손잡이를 잡고 마나를 흘려 보았지만, 환영도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단검처럼 되지는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서 단검이 떠드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연관이라고 했지, 신검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될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다시 한번 단검을 조용히 시켜야 했다.
그래도, 마나를 흘려 넣은 덕분에 이 검의 능력은 알 수 있었다.
다루기 어려운 검이라더니, 마나도 잘 받아들이고, 다루기도 무척 쉬워 보였다.
검을 돌려준 뒤에 드디어 대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요하힘도 싸워보고 싶어 했지만, 요하힘의 부탁은 기사단장이 거절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기사였지만, 계산은 확실했다.
검을 들고, 마주 서니, 기사단장의 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후작가의 최고수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내가 만나본 귀족 기사 중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우리 공작가의 기사단장보다 강했고, 왕실기사단의 선임 기사들보다 강했다.
정확한 비교는 하기 힘들었지만, 내가 죽인 제국 기사 비드보다도 강할 것 같았다.
아마, 왕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강한 기사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20살 용사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그레시아 공작이나 세우타 공작에 비해서도 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싸워볼 만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군. 계속 볼수록 가늠하기가 어렵다니. 이런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설마 나와 비슷한 실력일 리도 없고."
앞에 서니, 기사단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말에 따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련으로 보여주면 될 뿐이었다.
이번에는 대충 싸울 수 없었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었다. 상대방의 최대한 실력을 뽑아내야 했다.
다행히 세르히오 기사단장은 세우타 공작만큼 눈썰미가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평범한 장검으로 싸우니, 대련 중에 못 알아차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성기사라고 불리던 용사의 검을 신검이라고 불린 이유는 그 용사가 성기사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이유도 있지만, 검의 능력 때문이기도 했지."
아직도냐! 유물에 대해 잘 설명하는 친절한 기사인 줄 알았는데, 엄청나게 말 많은 아저씨일 뿐이었다.
"마나로 만든 방어력을 무시하는 검, 강대한 마물의 마나방벽을 뚫어 버리는 검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그의 검을 신검이라고 불렀다."
신검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신검에 대해 듣자마자, '이건 방어무시, 방무검이잖아!' 라고 큰 소리로 소리쳤던 창피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이 검도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싸울 때 주의하길 바란다."
이런, 말 많은 아저씨가 아니었다. 사고가 날까 봐서 검 능력을 미리 알려 준 친절한 기사였다.
하지만,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검 능력의 한계와 활용법까지.
이야기가 진짜 끝났다. 그는 선수를 양보했다.
"들어와라."
이번에는 그의 말을 따랐다.
장검에 마나를 불어넣고,
쿵.
앞으로 몸을 날렸다.
시야가 변하고, 감각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빨라!"
놀란 외침이 귀 옆을 스쳐 갔다.
아쉽게도 검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이 정도 공격에 당할 리도 없으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슈욱.
이번에는 상대의 검이 날아왔다. 마나를 불어넣었지만, 눈으로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마나와 감각으로 느껴야 했다.
옆으로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러 검을 쳐냈다.
카앙!
검을 튕겨냈지만, 충격이 몸을 흔들었다.
급하게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 상대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훨씬 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군. 아무튼 믿기지 않는 실력이군. 어디서 이런 기사가 나온 거지?"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거기다, 아직 아카데미 학생이었지만, 그는 나를 기사로 여기고 있었다.
전용 검도 아니었고, 봉인한 능력도 많았지만, 두 공작이나 20살짜리 용사와는 다르게 충분히 싸울만했다.
문제는 저 검이었다.
"다른 검으로 싸우고 싶을 정도군. 하지만, 어차피 이 검의 능력을 보여주는 거니까."
열화된 신검.
"신검보다 덜하지만, 이 검도 주인의 마나를 변형해서 상대의 마나 방벽을 뚫을 수 있지."
"마물에게만 효과가 있는 아쉬운 검이었지만, 오래 사용하면서 인간에게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지."
또 설명인가.
내 몸을 회복할 시간을 주는 거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마나 장벽이 없는 대신 사람은 방패나 검, 갑옷으로 검을 막지, 그래서 나는 이 검으로 마나 장벽 대신에 그 방어구들을 뚫기로 한걸세."
직접 맞아보니, 검을 뚫고 공격한 것이 아니라, 검에 실려있는 마나들을 역류해서 몸을 타격하는 느낌이었다.
전생의 무협지에서 보던 내부를 공격하는 '침투경' 같은 느낌이랄까.
그럼 신검도 방어 무시가 아니라, 마나를 역류하는 방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검의 능력은 지금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의 능력을 알았으니, 대응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은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다.
'정말 들키지 않아야 할 텐데.'
"버티기 힘들면 바로 이야기하게. 나중에 골병이 들면 포션으로도 고치기가 어려워."
내가 다시 검을 들자, 그도 말을 멈추고 검을 들었다.
그가 든 검이 광채를 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눈에는 내 검날도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시 달려 나가, 검을 휘둘렀다.
내가 무식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기사단장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가 검을 들어, 내 검을 막아섰다.
카앙!
검이 튕기고, 그의 검에서 마나가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계속 검을 움직였다.
"어떻게?"
기사단장의 커진 눈이 보였다.
기사단장은 놀랐겠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장검에는 보이지 않는 검기가 얇게 둘러싸여 있었다.
카트린이 넘겨주었던 능력, '마나 유형화'였다.
마나를 다른 형태로 변형시킨 것이었다.
마나로 만들어낸 불덩어리와 번개와 같이 이미 변형된 것이었다.
마나를 뚫는 신검이었지만, 이 능력을 뚫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성기사가 첫 번째 주인님과의 대련을 매번 피한 거군요. 이제 알았네요.]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알려 줄 것이지. 역시 도움이 안 되는 검이었다.
나는 신나게 싸움을 이어갔다.
검이 봉인되었으니, 가지고 있는 심법과 검술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어린 녀석과 막상막하로 싸우고 있으니, 대충 싸울 수도 없었다.
자, 어서 숨겨져 있는 가문의 비법을 토해내도록.
내 생각대로 기사단장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고, 나도 신나게 내 솜씨를 뽐냈다.
서로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서, 나와 같이 온 조원들이 넋을 놓고 싸움을 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거기다, 시간이 흘러서 찾아온 집사와 다른 기사들이 구경하는 것도.
그렇게 구경꾼들이 늘어나는 것도 모르고 나와 기사단장은 싸움을 이어갔다.
한 시간 이상, 기사단장이 지쳐서 검을 내려놓을 때까지 대련이 이어졌다.
대련이 끝나고, 많은 사람이 구경하는 것을 본 기사단장과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나는 먼저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상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실력이 차이가 나는데도 배려해주셔서, 많이 배웠습니다."
내 인사에 그는 머뭇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배운 것이 많긴 했지만, 실력 차이는 나지 않았다.
"어떻게 능력이 안 통했지?"
"유물 때문입니다."
나는 유물 핑계를 댔다.
"그런 유물이 있었나?"
"네, 시간제한이 있어서 오래 쓰지는 못합니다."
내 말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있지도 않은 유물에 시간제한까지 늘어놓으니, 겨우 기사단장이 안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 대련에서 승자가 누구인지.
신검의 능력이 봉인된 그는 나를 이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