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179화 (179/563)

제179화

제4편 유물 조사 (1)

왕실 아카데미 신입생 여자 기숙사의 한 방.

다른 여학생들의 방과 달리 이 방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방을 꾸미기 위한 소품도 보이지 않았고, 화장품도 생활용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교과서들과 필기도구들. 벽에 걸려있는 교복이 전부였다.

방안에서 이바나가 침대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성숙해 보이고, 모든 일에 초연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아직 십 대 중반의 소녀였다.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지만, 힘든 일도 있고, 참기 어려운 일도 많이 있었다.

더군다나, 왕실 아카데미에 들어온 뒤로는 그런 일이 더 늘었다.

열심히 키우던 자가 허무하게 져버리고, 자신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하는 선배도 있었다.

거기다, 괜히 시비를 거는 여선배까지.

그녀가 집에 있을 때는 이런 취급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남에게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의 응어리가 계속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응어리가 참기 힘들어지면 그녀는 편지를 읽었다.

[……자주 찾아가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언제나 너를 생각하고 있단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 나는 내 형제는 너밖에 없다고 맹세했단다. 아버지의 피를 이은 자들은 모두 경쟁자이자 적일 뿐이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라. 내가 왕위에 오르는 날, 숨어 살아야 했던 네 아픔을 모두 풀어줄 테니…….]

편지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오빠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이 많이 들려왔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그녀가 보았던 오빠는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했다.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왕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오빠 말대로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왕이 죽고 오빠가 새로운 왕이 되면 왕을 피해 숨어 살던 시절이 끝나게 될 것이다.

왕에 의해 왕궁에서 쫓겨난 어머니.

외로움에 지쳐서, 그리고, 왕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그녀를 낳은 어머니.

이바나는 사생아로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미워했고, 어머니를 버린 왕도 미웠다.

그녀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그녀를 여태까지 숨겨주고, 지켜준 아버지가 다른 오빠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접었다. 응어리졌던 가슴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이바나는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녀는 아카데미에 입학시켜준 오빠에게 보답해야 했다.

후작 아들, 가엘이 예상보다 빨리 성장 한계를 맞이했으니, 새로운 실험용 생도도 찾아봐야 했다.

그녀의 지금 능력으로는 아직은 한 사람만 능력을 부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실력을 키우면 한 명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능력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하고, 성장 가능성이 큰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 건방진 2학년이 제일 좋은데……."

이 아카데미에는 그 정도 되는 학생이 없었다. 그녀를 몰래 지키고 있는 기사들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조별 과제를 위해 수도를 떠난 그 2학년이 돌아오면 다시 한번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바사는 편지를 다시 책상 깊이 숨겨두었다.

이 편지를 다른 사람이 보게 할 수는 없었다.

이 편지는 그녀의 오빠이자 후원자인 이 나라의 황태자가 보낸 편지였다.

* * *

후작의 저택에서 편하게 쉰 뒤에 다음 날 우리는 저택 안쪽 깊숙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 방 입구에는 기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방 안에는 큰 테이블 위에 유물로 보이는 낡은 물건들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옆에는 나이 든 서기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고에 있던 유물들을 꺼낸 것 같았다.

아쉽게도 후작가의 보물창고는 구경하기 어려울 듯했다.

하긴 들여보내 줄 이유가 없었다.

유물을 보고, 대공녀가 눈을 빛냈다.

사라졌다고 알려졌던 유물들이 망가진 채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부 가져가서 수리해보는 것이 실력을 키우는 데 제일 좋겠지만, 이렇게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으려면, 이렇게 살펴보는 게 최선이었다.

망가진 유물을 수리하는 쪽은 저번에 내가 가져다준 유물이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대공녀가 정신없이 유물을 살피는 사이, 공주와 미리사는 늙은 서기관에게 유물들의 유래를 들었다.

"이 시계는 100년 전에 봉인지를 탐색하던 용병이 찾은 것이랍니다. 고대 제국 시절의 유물입니다. 발견되고 한동안은 주변의 마나를 흡수해서 시간을 알려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망가진 지금은 골동품에 불과하지만요. 그리고, 이 유물은……."

계속 유물을 관리해온 서기관이었는지, 각 유물의 유래와 쓰임새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런 자리에서 받아적을 수는 없으니, 미리사는 열심히 기억해두었고, 공주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었다.

대공녀, 공주, 미리사가 각기 열심히 움직여 주었지만, 남은 세 사람은 멀뚱하게 서서 잡담을 나누었다.

"신기한 게 많네요. 저 유물 중에 용사들이 썼던 물건들도 있을까요?"

"글쎄요. 좀 더 살펴봐야겠지만, 아마도 없을 것 같은데요."

발레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용사들이 썼던 유물이 있다면 허리에 찬 단검이 난리를 쳤을 게 분명했다.

얼마 전부터 심통이 났는지 말수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용사들이 쓰던 유물이 나오면 바로 떠들어 댈 것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 대화는 요하힘처럼 멍하니 있기 싫어서 떠드는 잡담에 불과했다.

발레아는 유물에 관심이 없었고, 나는 이 유물들보다 오후에 있을 만남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발레아와 잡담을 나누다 보니, 할 일이 생각이 났다.

될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조원으로 왔으니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나는 발레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문 앞에 서 있는 집사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생각보다 집사는 나를 정중하게 대했다.

아마, 후작에게 따로 지시가 내려온 모양이었다.

일이 더 수월해질 것 같았다.

"혹시, 망가진 유물 중에서 파실만한 것은 없을까요? 공주님이나 대공녀님에게 드리면, 후작가에 방문한 기념품이 될 것 같아서요."

조금은 건방진 말이었지만, 선물을 받을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그리 건방지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이 유물들은 파는 것이 아닙니다. 공주님과 대공녀님의 선물은……. 아마 후작님이 따로 말씀이 있을 겁니다."

오케이,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유물을 팔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후작가가 공주나 대공녀가 왔는데 선물도 없이 그냥 보낼 리가 없었다.

내 말은 그 선물을 망가진 유물로 달라는 뜻이었다. 집사도 내 말을 잘 알아들은 것 같았고.

역시, 돌려 말해야 하는 귀족의 대화는 피곤했다.

"기사가 아니라 행정 관료를 하시는 게 어때요? 잘하실 것 같은데."

발레아 옆으로 돌아오자, 내가 집사에게 한 말을 들었는지, 발레아가 작게 속삭였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잘한다는 칭찬이었다. 칭찬이긴 한데 칭찬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내가 그런 쪽을 싫어해서였을까?

그래서 나도 그녀에게 반문해보았다.

"발레아 영애는 책사나 첩자 쪽으로 생각이 있으신가요?"

"아, 생각해보니 비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고 바로 되받아 칠 줄이야."

발레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못하는 말이었다. 발레아도 나 아니었으면 하지 않을 말이었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그 상대가 발레아라는 게 조금 난감했지만.

그렇게 다시 잡담을 나누는 사이, 오전이 지나갔다.

대공녀는 배부른 얼굴로 방을 나섰고,

서기관의 이야기를 들은 미리사도 공주도 만족한 것 같았다.

생각 외로 말을 재미있게 하는 서기관이었다.

다만, 오전 내내 떠들어야 했던 늙은 서기관은 꽤 지친 것 같았다.

우리는 저택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후작 가족을 만났다.

후작 가족과의 만찬은 저녁에 따로 잡혀 있었지만, 점심 식사를 따로 잡지 않았으니, 후작 가족과 만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식사였고, 평범한 대귀족의 가족이었다.

교양있어 보이는 중년 부인인 후작의 아내, 우리 나이 또래의 소년 소녀들.

아들 셋과 딸 둘. 이 세계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숫자의 자녀들이었다.

그 셋 중의 한 명은 아는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얼굴을 푹 숙이고 있기도 했지만, 겉모습도, 흘러나오는 마나도, 나와 싸웠던 그때와 달랐다.

키는 그대로였지만, 덩치도 근육도 줄어든 것 같았고, 마나도 확실히 줄어들어 있었다.

나와 싸우면서 강해졌을 때와 비교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 보았을 때, 정식 기사 정도의 실력으로 느껴졌던 그때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다.

지금도 아카데미 신입생치고는 괜찮은 실력이었지만, 이 정도 실력이라면 내가 알 정도로 아카데미를 시끄럽게 하기는 어려웠다.

'며칠 사이에 상처를 입어 실력이 준 것은 아닐 테고, 설마……. 부여해준 능력이 회수도 가능한 것이었나?'

싸워보니 어떤 식의 능력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쌓을 수 있는 최고의 육체와 마나를 빠르게 쌓아 올릴 수 있는 능력이었다.

자신의 최전성기의 모습으로 빠르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능력.

제대로 된 실력자와 싸워야 성장 속도가 빨라지는 모양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능력이었다.

물론, 경험이나 능력, 검술 같은 것은 그 능력으로 키울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까지 된다면 정말 사기 같은 기술이었을 터였다.

'의외로 약점이 더 있었네.'

능력을 거둬들이면 키워놓은 능력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니. 이건 예상도 못 했었다.

물론, 성장시켜놓았던 근육이나 마나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처음 수준까지 내려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잃은 사람의 좌절은 앞에서 보고 있는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주었다가 빼앗았다는 건, 여러 사람에게 줄 수 없다는 말일 테고. 혹시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건가?'

왜 그녀 옆에 신입생들이 모여 있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모두 그녀의 능력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일 터였다.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느꼈다가 빼앗겼으니, 그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저 신입생도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그 무리에 속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자꾸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작의 두 딸이 보내는 시선이었다.

호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녀석을 제외한 두 형제는 대공녀와 공주를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놈 때문이겠지.'

어떻게 우리가 후작가에 오게 되었는지 후작의 딸들도 들었을 것이었다.

그럼, 누가 일을 만들고, 누가 이겼는지도 들었을 터였다.

아마도, 그런 호기심일 터였다.

어제 후작이 한 말 중에 가문의 아이와의 결혼 어쩌고가 떠올랐지만, 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시선을 느끼는 동안, 다시 주변의 마나가 불안정해졌다.

무슨 이유인지, 여성 조원들의 심기가 다시 안 좋아진 모양이었다.

조금 답답했던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제, 신검과 검의 주인을 볼 차례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