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제3편 피센 후작가로 (2)
개학 얼마 전에, 파울라는 왜 자신들이 카를로스 왕국으로 보내졌는지 듣게 되었다.
반년 동안 다른 정보원들이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의 압력은 더 심해졌고, 알아낸 정보는 없었다.
지부가 망하고, 사람들이 죽고, 실패한 계획들이 보였지만, 누가 왜 그랬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정보원들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정보원들은 고양이 손인 파울라에게 이야기를 한 것이다.
"예언자님의 예언을 어그러지게 하는 능력자나 유물이 있으면 찾고, 어그러진 계획들의 이유를 확인하라는 건가."
막막하고, 결과를 찾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힘든 주문이었지만, 정보원들이 카를로스 왕국에 들어와 보니, 사태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지부가 망가진 사이에 왕국은 예언과 조직의 계획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위에서의 닦달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파울라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이야기를 들은 파울라도 막막할 따름이었다.
왕국 주재원으로 행정기관과 왕실에 파견이 된 정보원들이 못 알아낸 일인데, 왕국 아카데미 학생인 그녀가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요하힘을 공주의 조원에 밀어 넣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솔직히 요하힘에게 별다른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형과 달리 요하힘은 단순한 기사일 뿐이었다.
그냥, 친분을 만들어 놓고, 흘러오는 소식이나 듣고자 했는데, 뜬금없이 딴 곳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다.
2학년 중에서 제일 강한 기사라는 공작 서자와 신입생의 결투.
물론, 신입생이 이기리라고는 다른 재학생들은 물론이고 그녀도 믿지 않았다.
요하힘도 이겼던 남자였다. 신입생에게 질 리가 없었다.
"육체 능력이 아니었으면 이쪽도 의심해볼 만했는데……."
왕국에서 나오기 힘든 육체 능력자였다. 물론, 아예 없는 경우는 아니라서 금방 관심을 끊었다.
물론 신입생이 졌지만, 결투를 본 사람들에게서 몇 가지 묘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싸우면서 계속 강해지는 것 같은 신입생과 그가 계속 거론하던 여학생.
의문을 느낀 파울라는 계속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바나 본인을 만나고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그녀의 본질은 조직의 정보원이었다.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껍데기는 이제 그만 쓸 때가 되었다.
파울라는 식당에서 나와 정문으로 향했다.
지금부터 다른 조직원들을 만날 생각이었다.
* * *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던 나는 평안한 짧은 여행을 했다.
수도에서 영지 하나를 지나 도착한 피센 후작 영지는 부자 귀족이라는 말과 달리,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여기도 마찬가지인가."
다른 영지들처럼 이 영지도 내전에 대비하느라 치안이 안 좋아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은 미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원래, 피센 후작가는 살기 힘들다고 들었어요. 광산에서 도망쳐 나온 유민도 많은 모양이에요."
미리사의 말에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족들이 알고 있는 정보와 평민들이 알고 있는 정보가 달랐다.
그동안 귀족 위주로 정보를 모았는데, 그 정보가 전부가 아니었다.
입장이 다르면 보는 것도 달랐다. 앞으로는 평민 쪽 정보도 제대로 구해야 할 것 같았다.
미리사의 말대로 피센 후작가는 영지 안에 있는 광산으로 부를 일군 귀족이었다.
금과 철, 구리까지.
광산 덕분에 많은 대장간이 생겨났고, 이 영지는 광산뿐만 아니라 무기와 방어구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후작가는 유물을 끌어모았고, 지금은 부자 영지라는 이름과 함께 왕국에서 유물이 가장 많은 귀족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영지민에게는 그 혜택이 안 내려갔다는 거겠지."
내 말에 발레아는 물론이고 미리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지에 있는 광산은 영주의 것이었다. 아니, 영지 전체가 영주의 것이었다.
전생처럼 영지에서 나온 수익을 영지민에게 복지로 나누어준다는 개념은 이 세계에 없었다.
그렇게 허름한 영지민의 마을들을 지나, 후작가의 본성에 도착했다.
후작가의 성은, 이 영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광산에서 시작되었다는 피센 후작의 성은 산 한쪽을 반원으로 빙 둘러서 세워져 있었다.
아직도 성안 쪽의 광산에서 채굴이 이뤄지고 있다는 말처럼 외성 문으로 광석을 가득 실은 마차가 지나다녔다.
외성 위로는 검은 연기가 가득 올라가고 있었다.
성안 대장간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였다.
"마스크라도 써야 하나……."
나는 이 세계에서 처음 보는 대기오염에 질색했지만, 발레아와 미리사는 마냥 신기한 듯했다.
미리 연락해놓은 덕분에 우리는 검문도 없이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대한 성벽 안에는 도시가 들어서 있었다.
의외로 공기도 나쁘지 않았다.
어떤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대장간의 연기가 도시에 쌓이지 않고 밖으로 흘러나가게 만든 모양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왕국에 피해가 가겠지만, 왕국이나 대륙으로 보면 이 정도 오염은 무시해도 될 것 같았다.
대기오염은 없지만, 도시는 상당히 더러웠다.
광산에서 나오는 여러 찌꺼기가 건물들을 더럽혔고,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들도 무척이나 지저분했다.
광산 도시라 어쩔 수 없다지만, 이렇게까지 지저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도시의 중앙을 지나 북쪽 주택가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고급 주택이 가득한 주택가였다. 딱 봐도 귀족들이나 돈 많은 이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런 주택가를 지나 영주의 저택에 도착했다.
"우와……."
미리사가 저택을 보자 입을 벌렸다.
미리사가 입을 벌릴 만했다.
수도의 여러 고급 저택도 보고, 왕궁도 보았지만, 이 저택을 보고는 나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저택이었다.
이 광산 도시에서 저걸 어떻게 관리하는지, 반짝이는 대리석이 저택의 바닥과 벽을 두르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 집사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각종 장식과 조각상이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설마, 전부 금은 아니겠지?
금박을 씌웠다고 해도 엄청 돈이 들었을 것 같았다.
"기둥이나 벽은 금박을 씌웠지만, 조각이나 장식은 전부 금입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안내를 하던 집사가 의문에 답을 해주었다.
하긴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다 물어봤을 것 같았다.
그걸 알려 주는 것도 이 저택의 집사로서 기쁨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돈지랄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왕궁보다 화려해 보이는 홀과 복도를 지나 접견실에 도착했다.
"후작님이 오실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접견실도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의자와 테이블도 번쩍거려서 앉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미리사는 아예 다가가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잠시 뒤에 집사와 함께 중년 귀족이 들어왔다.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귀족이었다.
"내가 가브리엘 드 피센, 피센 후작입니다."
그는 상석에 서서 자기를 소개했다.
후작은 귀족이라기보다 장사꾼처럼 보였다.
농사를 짓는 다른 영지들과는 하는 일이 다르니, 그렇게 보이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우리도 공주부터 순서대로 그에게 인사를 했다.
모두 인사를 하자, 후작은 먼저 자리에 앉아 빈 의자를 가리켰다.
"모두 앉아요. 긴 시간은 아니지만, 공주와 대공녀 일행을 세워 둘 수는 없으니."
우리는 번쩍이는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미리사는 번쩍이는 장식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의자에 등도 기대지 못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후작은 먼저 대공녀와 공주에게 양해를 구했다.
"공주님과 대공녀님의 방문이라면 좀 더 성대하게 해야겠지만,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라서 따로 준비는 안 했습니다. 공주와 대공녀는 양해해주기를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공주와 대공녀가 괜찮다고 하자,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네가 우리 아들과 결투를 한 소년인가."
협상도 끝났고 꿀릴 것도 없는 자리였지만, 그래도 예의를 지켜야 했다. 나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네."
그는 내 대답에 혀를 찼다.
"쯧쯧, 조금 실력이 좋아졌다고 말을 함부로 하다니, 애를 잘못 가르쳤어."
다행히도 그가 혀를 차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들었네. 나이답지 않게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요구를 했더군."
유물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보여달라는 부탁이었다.
조별 과제라는 이유도 충분했고, 유물이라는 점 때문에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아, 양쪽 가문의 명예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레시아 공작가는 서자가 승리한 덕분에 보상이 어찌 되었건 별 상관이 없었을 터였다.
그럼, 별문제 없이 유물을 구경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후작은 딴 이야기를 꺼냈다.
"실력도 있고, 서자라 가문에 얽매이지도 않을 테니, 내 기사가 돼 볼 생각은 없나?"
스카우트 제의였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조원들은 모두 나와 후작을 쳐다보았다.
"왕실기사단도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라고 들었네. 하지만, 서자라서 어려움이 많을 거야."
왕실기사단은 들어갈 수 있다는 기대를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들어갈 생각도 없었고.
"차라리 우리 가문의 기사가 되어 최고를 노려보는 편이 좋을 걸세. 또 모르지, 잘하면 우리 가문의 아이와 결혼을 해서 가문에 들어올 수도 있지 않겠나."
후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마나들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을 조심해야 할 때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감사합니다만, 아직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어서 결정을 내리기는 이른 것 같습니다."
다른 가문의 기사가 된다고 해도 후작가에 올 생각은 없었다. 기사로 간다면 갈 곳은 많았다.
내 말에 후작은 잠깐 눈썹을 찡그리더니, 다시 표정을 폈다.
"여기서 바로 결정하는 것도 무리긴 하겠지. 그럼 이곳에 있는 동안 고민해보도록 해라."
그렇다고 바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후작은 다시 대공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유물은 어떻게 확인할 생각입니까? 유물 전부를 보여준다고는 했지만, 그게 전부라는 보장도 없을 테고, 전부 안 보여줬다는 오해를 받기는 싫습니다만."
"그래서 저희가 준비했습니다."
대공녀는 준비해 온 종이를 후작에게 건네주었다. 조원들이 모은 정보 중에 후작가에 있다는 유물만 모은 것이었다.
후작은 종이를 살펴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제대로 준비하셨군요. 소실된 것도 있지만, 망가져서 방치해놓은 것도 제법 적혀 있는 것을 보니."
대공녀에게는 그게 제일 중요한 것이었느니, 열심히 찾았을 터였다.
"이 정도면 무리가 없겠군요."
일부로 후작이 가졌다는 소문이 도는 유물 일부를 빼놓았다. 괜히 그런 것까지 적어놓으면 서로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흠, 그런데 이 검은 당사자의 승낙이 있어야겠군요."
그렇지만, 유물 하나는 절대 뺄 수 없었다.
내가 이 후작가에 온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후작은 집사에게 종이를 건네고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모두, 이 후작가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모두 좋은 결과가 있기를."
그는 나를 보면서 말을 마쳤다.
말을 하는 것을 보니, 후작은 귀족이었지만, 확실히 장사꾼 기질도 있었다.
문제는 후작이 사고 싶은 게 나였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돌아갈 때 할 걱정이었다.
나는 다음날 있을 신검 주인과의 만남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