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제1편 유물 조사대
쓰러져 있는 후작 아들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피센 후작가의 심법도 초대 왕인 카를로스의 심법이 맞았다.
후작 아들과 겨루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심법을 가졌다고 해도, 제대로 된 상대가 아니라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원래 용사 카를로스의 심법들은 고유한 검술과 왕의 능력이라 불리는 '마나 감응력'이 필요했다.
'마나 감응력'을 지닌 왕족이 다음 대 왕이 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마나 감응력이 없으면 심법과 검술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그레시아 공작가의 기사들도 그랬고, 왕실 기사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배워서는 제대로 된 심법과 검술을 알 수 없었다.
카를로스 유령이 검술이나 심법을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었고.
결국, 마나 감응력이 없더라도, 최선을 다해 심법과 검술을 연구하고 발전시킨 고수가 필요했다.
그레시아 공작이나, 왕실기사단의 고문이라는 세우타 공작처럼 그 심법과 검술의 마스터가 있어야 했다.
후작 아들을 성장시켜준 능력이 심법과 검술까지 키워주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심법과 검술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이겼으니, 요청을 말해야겠지만, 지금 후작 아들을 보니, 내 이야기를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요청 사항은 나중에 말해줄게."
잘못하면 울 것 같은 모습에 나는 바로 자리를 떴다.
뒤에서 많은 시선이 느껴졌고, 그중 하나는 특히 강렬했지만, 나는 전부 무시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어쨌거나 하루에 두 번이나 대련을 했다.
피곤한 하루였다.
* * *
후작 아들과의 대련은 아카데미를 뜨겁게 달궜다.
물론, 1학년 때 내 행적을 보고 들었던 재학생들은 내가 이겼다는 말에 시큰둥했다.
하지만, 폭풍 성장으로 이슈몰이를 했던 후작 아들의 몰락은 신입생들 사이에서 큰 이슈를 불러왔다.
덕분에 나는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져 버렸다.
하지만, 내 주변에서는 놀림감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었다.
"유명인이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발레아가 나를 보고 외쳤다.
"막 입학한 신입생을 결투하게 만들어서 진흙탕에 처박은 무시무시한 선배. 명예 파괴자, 결투 종결자."
발레아가 나를 놀릴 때 쓰는 별명이 더 늘어났다.
거기다, 방금 발레아가 말한 것 같은, 사실과 다른 소문도 꽤 돌고 있었다.
"괜찮아요? 정당한 결투였다면서요."
대공녀가 걱정되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소문 도는 게 한두 번도 아니니까요."
예절 교육을 받기 전에는 더 대단한 소문도 많이 돌았었다. 이 정도는 귀여웠다.
대공녀 외에는 걱정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놀리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제국 귀족 요하힘은 왜 안 놀라지?
"어라? 사실 아니었습니까? 그동안 들었던 이야기가 전부 사실인 줄 알았는데……."
그 무시무시한 소문을 다 믿고 있었다는 건가? 이 인간은 왜 나와 대련을 계속할 생각을 한 거지?
제국 귀족의 의연함에 다들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이 자리는 조별 과제 첫 번째 모임 이후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
한 주 만에 많은 일이 있었다. 개학 때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모양이라니.
개학 때 새로운 '저장 시점'이 생길만했다.
나에 관한 이야기와 서로의 안부를 물은 뒤,
땡, 땡.
대공녀가 숟가락으로 찻잔을 두들겼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니, 대공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조사해 온 걸 이야기해볼까요?"
대공녀의 말에 다들 조별 과제 이야기로 돌아갔다.
"제가 먼저 말할게요. 많지는 않지만 제가 아는 경로를 통해서 유물 목록을 뽑아왔어요. 이 중에 용사가 쓰던 유물이 무엇인지 파악은 못 했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대공녀는 테이블 위에 종이 여러 장을 펼쳤다.
많지는 않다고?
종이 여러 장에 꽉 채운 유물들을 보고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들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공녀를 보는 사이, 나는 종이를 살펴보았다.
출처가 애매한 유물도 있고,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유물도 많았다.
망가졌다는 소문이 난 유물도 여러 개 보였다.
오히려 멀쩡하고 유명한 유물이 드물었다.
왜, 이런 식으로 준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대공녀는 조별 과제를 핑계로 망가진 유물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걸 겉으로 드러낼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준비한 게 분명했다.
슬쩍 대공녀를 살펴보니, 그녀는 민망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알아차릴 게 뻔하니, 내 시선을 피한 것이었다.
"저도 준비하긴 했는데, 대공녀님보다는 양이 정말 적어요."
이번에는 공주가 종이를 꺼냈다.
대충 살펴보니,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영주들이 가지고 있다는 유물들이 적혀 있었다.
'이건, 영주들의 위치와 지위 등을 고려한 건가.'
국경 요새 근처의 던전도 적혀 있는 것을 보니, 공주는 이 조별 과제를 두 왕자의 시선을 피하고 영주들의 호의를 사는 시간으로 쓸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발레아와 미리사는 평범했다.
"학생들에게 집안에 내려오는 유물들이 있는지 물어봤어요."
발레아가 꺼낸 종이에는 학생들 이름과 집안, 유물들이 적혀 있었고,
"죄송해요. 아카데미 도서관을 살펴보았는데, 유물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었어요."
미리사가 꺼낸 종이에는 전설이나 역사로 내려오는 유물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두 남학생, 요하힘과 나는 가져온 종이가 없었다.
"왕국 쪽은 아는 게 없어서……. 제국으로 가게 되면 내가 안내하겠습니다."
요하힘의 뻔뻔한 말이 끝나니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모두에게 두 손을 펴 보였다.
얼마나 바빴는지, 자료 조사할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처음에는 그냥 묻어갈 생각이었다.
다들 어느 정도 내 사정을 알고 있으니,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영지를 찾아가서 대뜸 유물을 보여달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대공녀님이나 공주님의 부탁이라면 들어줄지도 모르겠지만,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발레아의 말에 공주도 대공녀도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발레아 말대로였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공주와 대공녀의 부탁은 정치적인 청탁이 되기 충분했다.
괜한 오해를 살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여겨서 오히려 거절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이용할 수 없다면 귀족들이 가진 유물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귀족들 앞에 서서 유물을 보여달라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렸는지, 미리사는 이미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러면, 우선 던전 같은 곳을 찾아봐야 할까요?"
공주가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모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던전이라니, 처음부터 너무 난이도가 높았다.
더구나 이미 알려진 던전은 다 털린 뒤였고, 알려지지 않은 던전은 찾기부터 쉽지 않았다.
괜히 내가 봉인지에서 그 고생을 한 게 아니었다.
"공자님은 무슨 방법이 없나요? 후작가 자녀를 혼내주느라 바빠서 자료 조사할 시간도 없었는데, 이런 의견이라도 내 주셔야죠."
모두 말이 없자, 발레아가 말로 나를 찔러댔다.
이번에는 뭘 원하는 건지.
죽이면 죽였지, 괜히 말로 사람을 찔러대는 여자가 아니었으니, 뭔가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녀를 쳐다보자, 발레아가 씩 웃었다.
"다른 의견이 없으시면, 가엘, 아니 피센 후작 아들에게 뭘 요구했는지 알려 주세요. 다들 궁금해하더라고요."
역시, 원하는 게 있었다.
그리고, 발레아 말대로 다들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나를 보는 눈들이 무섭게 반짝였다.
그녀의 말에 어제 만났던 후작 아들이 떠올랐다.
내가 요구 조건을 말하자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나를 쳐다봤었다.
그 뒤에도 몇 번이나 내 요구 조건이 맞는지 물었었지.
나는 모두에게 어제 한 말을 다시 해주었다.
"조별 과제를 위해 피센 후작가의 유물을 모두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후작 아들이 보여준 표정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다들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발레아였다.
"거짓말! 결투 요구 조건을 조별 과제를 위해 썼다고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발레아도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음을 건 결투는 아니었지만, 대귀족의 자녀 간의 명예를 건 결투였다.
명예를 잃지 않는 조건으로 큰돈을 받을 수도 있고, 공식적인 사과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정치적인 후원을 받을 수도 있었다.
내가 그런 많은 기회를 버리고, 조별 과제에 써버린 것이 황당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별 과제로서는 이만한 게 없었다.
명예를 건 요청이었다. 신전에서 계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명예를 생각하면 그보다 떨어진다고 볼 수 없었다.
결투의 요구 조건으로 유물을 보겠다는 것은 후작가로서도 거절하기 어려웠다.
정치적으로 끼어들 여지도 없었고, 소문이 이상하게 날 여지도 없었다.
다만, 어찌 되었건 후작 아들은 집에 돌아가면 박살이 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두 본인 잘못이었다.
내 말에 발레아는 물론, 공주도 무척 놀랐지만, 제일 놀란 것은 대공녀였다.
"아니, 저를 위해서 이럴 것까지는……."
대공녀는 내가 그녀를 위해 이런 요청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가진 구슬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녀의 능력을 키워야 했다. 그래서 이 요구 조건을 건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원들이 대공녀와 나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그 안의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게 된 것 같았다.
미리사는 슬쩍 뒤로 물러서서 영화를 관람하듯이 나와 대공녀를 보고 있었다. 팝콘이라도 주면 맛있게 먹으며 구경할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는 이야기를 들으며 얼굴색이 마구 바뀌었는데, 이제는 아예 포기하고 남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구경하고 있었다.
잘된 건지 잘못된 건지 영 알 수가 없었다.
그 옆에서 요하힘은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분명, 저 인간은 내가 뭘 하든지 그럴만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계속 고마워하는 대공녀에게 조금 미안했다.
대공녀만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부유하기로 유명한 후작가에는 많은 유물이 있었다.
대공녀가 가져온 종이에도 상당수 적혀 있었지만, 망가지거나 더는 보이지 않는 유물도 많았고.
그렇지만, 지금도 유명한 유물 하나가 있었다.
후작가가 세워진 이후 항상 후인에게 내려온 유물이었다.
후작가 최고의 기사에게 항상 내려오는 검. '피센의 신검'이었다.
그 검은 지금도 후작가의 최고수. 후작의 동생인 기사단장이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유물을 핑계로 그를 만날 생각이었다.
결국, 내 생각대로 첫 방문지가 결정되었다.
후작가는 다행히도 수도와 그리 멀지 않았다.
가는 데 마차로 이틀이면 충분했고, 일을 처리하고 왕복하는 데도 일주일 이상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출발할 수는 없었다.
조원들의 일정도 맞춰야 하고, 후작가에 연락도 해놓아야 했다.
그런 일들은 모두 대공녀가 하기로 했다. 자기가 한 일이 없다고 먼저 나선 것이었다.
솔선수범하는 조장이라니.
생각보다 잘 돌아가는 조별 과제에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하지만, 모임이 끝나고 길로 나서자, 행복했던 기분이 바로 가라앉았다.
내 앞을 또 다른 신입생이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여자였다.
저번 결투를 뒤에서 지켜보던 소녀.
후작 아들을 빠르게 성장시킨 것으로 보였던 능력자가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